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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플라뇌르 Aug 29. 2024

돈의 가치가 재정의되는 시간들

억대 연봉 은행원이 경단녀가 되면서 생긴 변화들 3

은행원일 때는 매달 통장에 월급이 따박따박 입금됐다. 경제적으로 모자람이 없는 삶을 누렸고 그게 지속될 줄로만 알았다. 사고 싶은 게 있으면 주저없이 샀고 가고 싶은 곳이 있으면 기꺼이 떠났다. 돈의 효용보다는 경험과 시간의 효용을 더 가치있게 여겼기 때문이다. 그러나 회사를 그만두면서 수입은 0원이 돼버렸고 그동안 사느라 경험하느라 저축은 뒷전이었으니 큰 액수를 모으지 못했다. 참고로 나와 남편은 "독립채산제"형 부부라 "니 돈은 니 돈, 내 돈은 내 돈"인 사람들이다. 이제 와서 남편에게 손을 벌리려니 얼마나 모양이 빠지는지! 남편에게 아쉬운 소리를 하느니 그나마 모아놓은 돈을 야금야금 써가며 이런저런 재택 아르바이트를 해가며 살고 있다. 새삼 돈이 얼마나 중요한지 깨닫고 있다. 미래 소득이 사라졌고 크게 모아놓은 돈이 없다는 건 사람의 마음을 매우 불안정하게 만든다. 돈의 가치가 재정의되는 시간들을 보내고 있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돈을 쓸 때 신중하게 고민하기 시작했다. 물론 지금 당장 쓸 돈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회사 다닐 적 소비 습관은 절대 유지하기 힘들다. 또 회사를 그만두고 자유 시간이 많아졌기 때문에 부족한 돈과 남아도는 시간을 잘 견주어 써야 할 것 같아서다. 여섯 살인 막내가 더 크면 아이 셋을 데리고 해외에서 한달살기나 1년 살기를 해도 좋을 것 같다. 구체적인 계획은 아직 없지만 약간의 돈만 있다면 얼마든지 다채로운 경험을 할 수 있을 시간의 여유와 자유가 생겼기 때문에 이 자유를 온전히 누리기 위해서는 돈도 무시할 수 없다.


은행원이었을 때 나는 고정적인 수입의 소중함을 몰랐다. 내가 당연하다고 누리는 것들의 소중함을 깨닫기엔 생활의 리듬이 너무 빨라 찬찬히 생각해볼 여유가 없었고 또 그때 나는 조금 불행했던 듯하다. 노동의 당연한 대가인 월급으로 나의 불행을 상쇄하기 위해 소모적인 소비를 하고 그로 인한 헛헛함을 메꾸기 위해 또다른 소비를 하는 악순환의 연속이었다. 아무리 돈을 써도 불행은 사라지지 않았고 사라지지 않는 불행이 불안해 점점 더 큰 소비를 했던걸까. 돈을 더 많이 벌고 싶었고 불행을 가리기 위한 가짜 행복을 과시하고 싶어 더 쓰기만 하던 시절이었다. 지금 생겨나는 불행은 그저 내가 견뎌낼 수 있을 정도의 불행이고 행복을 꾸며내지 않아도 나는 충분히 행복하다. 이제 돈은 그저 돈일 뿐이다. 돈이 있으면 삶이 조금 더 편해질 뿐이다.


여행을 갈 때도 돈을 쓸 때 신중을 기한다. 예전에는 좋은 호텔과 인스타그램 피드용 화려한 식당을 선호했다면, 요즘은 무조건 가성비 있는 곳을 찾는다. 하이서울유스호스텔이나 청주의 무지개 게스트 하우스, 국립생태원 에코리움처럼 각 지역의 지자체에서 운영하는 숙소들은 가성비가 훌륭하다. 조금 더 일찍 돈의 가치를 깨달았으면 좋았겠지만 어쩌겠는가. 과거의 나는 미래의 내가 결혼을 해서 아이를 셋이나 낳으리라곤, 그토록 애정하던 회사를 그만두리라곤 전혀 상상도 하지 못했을 것이다. 한치 앞을 예측할 수 없는 게 인생의 묘미 아닐까. 어쨌든 나는 지금의 행복에 만족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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