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운 우리말
입술과 코에 맴도는 공기의 온도나, 뺨에 닿는 촉촉한 풀잎으로 미루어 갓밝이 무렵이다.
구병모, 『파쇄』, 위즈덤하우스
몇 년 전 65세 여성 킬러 조각의 이야기를 그린 『파과』를 정말 재미있게 봤다. 강렬했다. 이 작품의 프리퀄, 『파쇄』가 나왔으니 보지 않을 수 없다. 내용도 내용이지만 처음 보는 아름다운 우리말 단어들이 내 눈길을 끌었다. 위에 인용한 문장 중 '갓밝이'라는 단어는 책을 읽다 몇 번이고 소리 내어 말해보았다.
갓밝이... 갓밝이
국립국어원 표준국어대사전을 찾아보니, '날이 막 밝을 무렵'을 뜻한다.
KBS WORLD 사이트 '한국어 배우기' 코너에 갓밝이에 대한 상세한 풀이가 나와있어 가져와 본다.
‘날이 막 밝을 무렵’을 뜻하는 것으로 ‘갓밝이’라는 표현이 있습니다. ‘갓 구운 빵’이라는 말에서처럼 ‘이제 막’이라는 뜻을 가진 표현인 ‘갓’과 형용사 ‘밝다’에서 나온 ‘밝이’가 합해진 말인데, 예를 들어 ‘그는 새벽 갓밝이에 길을 떠났다.’와 같이 쓸 수 있겠습니다.
<KBSWORLD 우리말 배우기>
파괴와 신생의 갈마듦을 반복하며 그녀의 움직임은 그의 손이 더 닳을 필요가 없어질 만큼 나날이 날카로워진다.
구병모, 『파쇄』, 위즈덤하우스
갈마듦은 국어사전에서는 찾아볼 수 없다. '갈마들다'라는 동사의 명사형 인 듯하다. '갈마들다'는 '서로 번갈아들다.'라는 뜻이다. 조각은 파괴와 새롭게 태어남을 번갈아 드는 훈련을 반복하며 킬러가 되어갔다.
갈마들다 역시 KBSWORLD 홈페이지에 가면 상세한 풀이가 나와있다.
‘갈마쥐다’는 ‘한 손에 쥔 것을 다른 손에 바꾸어 쥐다’와 ‘쥐고 있던 것을 놓고 다른 것으로 바꾸어 쥐다’라는 두 개의 뜻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 ‘그는 가방을 왼손으로 갈마쥐면서 반갑게 악수를 청했다.’, ‘그는 이 악기 저 악기를 갈마쥐어 가면서 능숙한 연주 실력을 과시하였다.’ 이렇게 쓸 수 있지요.
‘갈마들다’는 ‘서로 번갈아 나타나다’의 뜻으로, ‘착잡한 생각들이 끝없이 갈마들었다.’, ‘나는 동생과 갈마들며 병실에서 간호했다.’와 같이 씁니다.
‘갈마보다’는 ‘양쪽을 번갈아 보다’라는 뜻으로, ‘그는 두 사람을 갈마보며 서로 화해할 것을 권하였다.’처럼 쓸 수 있습니다.
의자는 다시 식탁 아래로 기우뚱하게 자리를 잡는다. 흐름상 그는 이 이야기에 관한 한 웬만큼 매조지를 지은 것 같은데, 그렇다면 이대로 문을 열고 도망칠 필요가 없어진 것인지 아직 확신할 수 없어서 그녀는 머뭇거린다.
구병모, 『파쇄』, 위즈덤하우스
20대의 조각이 킬러가 되기 위한 합숙 훈련(?)을 한 이야기가 『파쇄』다. 실장이라 불리는 킬러 교육자(?)는 킬러에게 의자는 앉는 기능과 함께 '찍어버리는' 기능이 있음을 알려주며, 운이 좋을 경우 의자 다리 네 개 중 하나는 명치나 목을 찍을 수 있음을 실전처럼 알려준다. 조각은 그 순간 이 교육이 끝난 건지, 아닌지 모르는 상황에서 문을 열고 도망쳐야 할지 고민하고 있다.
국립국어원 표준국어대사전에 따르면 '매조지'는 '일의 끝을 단단히 단속하여 마무리하는 일'을 말한다. 그리고 한국일보 우리말 톺아보기에서 매조지에 대해 이렇게 풀이하고 있다.
‘매조지다’는 ‘일의 끝을 단단히 단속하여 마무리하다’는 의미를 지닌 동사이다. 그리고 ‘매조지’는 그러한 일을 가리키는 명사이다. 이 ‘매조지다’는 ‘매다’와 ‘조지다’(일이나 말이 허술하게 되지 않도록 단단히 단속하다)가 결합한 말로 보인다. ‘신→신다, 빗→빗다’처럼 명사 ‘매조지’에서 만들어졌다는 의견도 있지만 확실치는 않다. 어쨌든 맥이 끊겨 가던 말이 다시 살아나는 모습이 반갑다.
갓밝이, 갈마듦, 매조지. 이 세 단어를 가지고 문장 몇 개를 지어본다.
갓밝이 무렵 재게 발걸음을 옮기며 산을 오른다. 다리 앞섶이 축축하게 젖어있다. 머리에 두 녀석의 얼굴이 갈마들며 내 발검음을 더욱 빠르게 만든다. 어제 매조지었어야 했다. 이렇게 질질 끌 일이 아니었다. 해가 떠오르는 속도만큼 내 심장 박동도 빨라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