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레드릭 배크만, 『오베라는 남자』
여름이 시작되기 전, 나는 봄과 잘 지내지 못했다. 여러 겹으로 옷을 껴입으며 함부로 다정해진 날씨에 짜증이 치밀었다. 어딘지 모르게 자꾸 마음이 불편한데 해소가 되지 않아서 한쪽으로 치우친 생활을 하기도 했다. 어느 주엔 도서관 서가에 파묻혀 매일 책을 1~2권씩 읽어댔고, 또 어느 주엔 매일 3시간이 넘게 체육관에서 운동을 했다. 또 어느 주엔 여행을 떠나겠다며 머릿속을 헤집어놨다. 나는 왜 이렇게 뭔가가 불편하고 쉽지가 않지? 무엇이 내게서 안정감을 앗아가는 거지? 생각은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그리고 깨달았다. 사실 나는 여름만 미워했던 것이 아니었다. 봄과는 잘 지냈나? 그 작년 겨울은? 그 전 가을은? 여름은? 생각해 보니 어느 계절도 잘 지내지 못한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람들과 잘 지내지 못하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여전히 책을 닥치는 대로 읽고, 스터디를 하고, 운동을 했지만 6월이 시작되면서 한 가지를 그만두었다.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는 것이다.
최근에 나는 오래된 물건들을 정리하다 발견한 펜과 노트에 ‘사랑하는,’으로 시작하는 글을 썼다. 매끄러운 종이에 연필로 사각사각 소리를 내며 천천히 적어보았다. ‘사랑하는’으로 시작했지만 그 뒤의 공백엔 선뜻 쓸 수 없는 문장과 단어들이 이리저리 정리되지 못한 채 떠돌았다. 나는 내가 금쪽이라거나 예민한 성격의 사람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러나 내가 최근 들어 무언가 풀리지 않는다거나 삶을 대하는 태도에 고민하기 시작한 것에는 새롭게 만난 사람들 때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커뮤니티 활동을 시작하면서 운이 좋게도 다채로운 매력을 지닌 사람들을 많이 마주할 수 있었다. 그중에는 내가 상상조차 하지 못한 비밀을 품고 있는 사람도 있었고, 나와는 정반대의 세계를 살아가는 사람도 있었다. 내 마음을 괴롭혀 주거나 나를 놀려 먹는 사람도 있었다. 그래서 나도 내 방식대로 그들을 괴롭혀 주려 했다. 처음엔 모든 게 다 낯설고, 어색하고, 불편하고, 때로는 화가 나고 싫기도 했는데 요즘엔 나를 둘러싼 어른들이, 선배들이, 그리고 함께하는 사람들이 어떤 종류이든 귀엽다는 생각을 하고 있다.
요즘 나는 사람들과 함께 시간을 보내는 것보다, 그들로부터 호기심이나 관심을 받거나 애정을 갈구하는 일을 벌이는 것보단 오랜시간 혼자 있을 때가 좋다고 생각한다. 외향성을 타고난 데다 사람들을 좋아하는데 나는 왜 그럴까 의문을 품었다. 몇 달 동안 여러 일 때문에 새로운 사람들을 너무 많이 만나서 마음이 지쳐버렸나? 혹은 내가 지극히 내향적인 사람이었던 건가? 아무튼 혼자 책 읽고, 운동하고, 일하는 게 재밌다. 요즘은 그게 좋다. 그런 생각을 하고 있다. ‘영면’을 택한 것이다. <오베라는 남자> 속에서 주인공 ‘오베’가 선택한 ‘영면’은 사람들 사이의 관계의 단절, 즉 고립을 의미한다. 인간이 사회적인 동물인 것은 분명하나, 이때의 ‘사회성’은 어쩌면 루틴화된 관계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무리 외향성을 타고났다고 하더라도 인간 내면의 본성을 짚어내는 진짜 마음의 문을 열 수 있는 건 얕은 관계가 아닌 자주 만나지 못하거나 한 번 스쳐 지나갈 수 있는 깊은 관계에서 오는 것 같다고 생각하고 있다.
‘오베’는 단절과 고립을 통해 ‘소냐’ 죽음 이전의 삶으로 돌아가고자 한다. 그러나 불변할 수 있는 것은 ’시간‘은 단연코 흐른다는 사실이다. 오베는 성격이 모나거나 별로인 사람이어서가 아니라, 새로운 사람들과의 관계를 형성하는 과정 그 자체를 회피했던 것일지도 모르겠다. 평범하기 그지없는 그의 인생은 긍정적이거나 부정적이거나 타인과의 마찰 그 자체로 깊어지는 대신 이리저리 상처를 입었을지도 모르겠다. 마치 마음의 근육을 단련하기 위해서는 한 번쯤 자신의 근육에 부러 상처를 내야 하는 것처럼 말이다. 한편 이 책을 통해 ’오베‘ 뿐만 아닌 ’나‘와 맞지 않다고 생각했던 주변 인물들, 즉 ’오베‘가 살아온 인생, 그의 성정 등이 타인으로부터 이해받지 못할 때, ’이해‘가 없는 세계에서 그의 행동이 사회적인 시각으로 어떻게 간주되는가를 보여주고 있는 것 같기도 하다. 이웃이 오베를 오해하듯, 오베 역시 이웃을 오해하곤 한다. 마치 제 인생에 막무가내로 끼어드는 이웃을 ’방애물‘이라는 시선으로만 바라보았던 것처럼 말이다.
오베는 사람들과의 관계를 이루는 삶을 회피하지 않고, 끝내 그들과 조화로운 삶을 택한다. 조화롭다는 것은 언제나 안온하다는 것은 아니다. 오베만의 방식으로 사람들을 돕다 마찰이 일어나기도 하며, 때로는 자신의 고정관념이 아닌 신념, 태도를 버린 채 타인을 위해 희생하기도 한다. 그리하여 오베가 진정한 ’영면‘에 들었을 때, 사람들이 기억하는 ’오베‘는 한 평범한 인간이 아닌 ’기부 단체‘라는 키워드 속 상징으로 남게 된다. 책을 읽는 동안 ’오베라는 남자‘, 즉 ’인간성‘에 대해 생각했다. ’인간의 본성‘이자, ’사람의 됨됨이‘로 풀이되는 이것은 절대적인 선악의 기준이 있거나 참과 거짓과 같은 이분법적으로만 해석되는 것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처음 마주했던 오베의 면면은 영 별로인 사람이었지만 책의 후반부에 마주했던 오베라는 사람은 모든 것을 동의하고, 수용할 순 없었으나 이해할 순 있었다. 마찬가지로 어느 시기 동안 계속해서 새로이 마주해야 했던 사람들 역시 내가 한 면들만 보고 오해하거나, 모나게만 바라봤던 것은 아닌지에 대한 생각을 했었던 것 같다. 언제나 ’인간성’을 중요하게 생각했지만 타인의 인간성을 따지는데 급급해 정작 그를 바라보는 나의 ‘인간성’이 어떻게 비춰지고 있는가는 생각하지 않았던 것이다.
여전히 변화는 두렵고, 새로운 사람들을 마주하는 일은 퍽 버겁다. 큰 변수 없이 반복되는 삶을 추구하는 나에게 이것은 때로 어른으로 살아가는 삶에 대한 숙제 같다는 생각도 든다. 잘 정돈된 책상, 풀업 기구 앞에서 부들부들 떨며 온몸에 힘을 꽉 주는 순간들, 오트밀 반죽을 휘젓는 숟가락, 뽀송뽀송하게 마른 빨래를 접어 칸칸이 서랍장에 개어 넣는 시간. 여전히 나는 이것이 좋고, 앞으로도 얼마나 더 좋은 것만을 편식하며 살아갈지 모르겠다. 하지만 숙제는 풀어야 하니까. 지속 가능한 삶을 위해서는 할 수 없을 것이라 생각했던 것들을 조금씩 견뎌내고, 나아가며 나의 세계를 확장해야 하는 것 아닐까? 산을 오르는 일도, 책을 읽는 일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한다. 이 산을 넘었더니 저 너머에 산이 있다는 사실은 때로 나를 미치게 하지마안, 미칠 수 있어서 ‘부동의 정체기’가 아닌 다음을 향한 시작을 또 해낼 수 있는 거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