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트남 행정 절차에서 시작된 명제 하나. 여긴 사회주의라 그래!!
어제 저녁, 지인들과 둘러앉아 술자리를 하다가 베트남 이야기가 나왔다. 화제가 된 건 바로 사회보험 환급이 또다시 연장된 일이다. 이유는 두 가지였다.
첫 번째 연장 사유는 ‘기입 용지가 잘못되었다’는 이유였다. 외국인 전용 양식이 아닌 내국인용 양식으로 제출했다는 것이다. 문제는, 그 종이를 그들 스스로 건네줬다는 사실이다. 자기들이 준 용지를 그대로 냈는데, 다시 그걸 문제 삼아 시간을 끄는 모습. 말이 되지 않았다.
두 번째는 더 황당했다. 주소란에 현(?, 군)이 일부 빠져 있다는 이유였다. 담당자가 새로 기입해 넣었다며 일주일을 더 기다리라고 했다. 스스로 고쳐 넣었으면서, 그걸 이유로 일정을 다시 미루는 셈이다.
이쯤 이야기하자, 함께 있던 한 사람이 말했다.
“베트남은 공산주의니까 원래 그래. 돈 몇 푼 쥐어주면 해결돼.”
그 말을 듣는 순간, 한편으로는 알 것 같으면서도 미묘한 불편함이 밀려왔다. 맞다. 베트남 행정은 느리고, 말도 안 되는 절차가 많다. 서류 한 장 때문에 며칠씩 오가야 하는 일이 흔하다. 나 역시 경험자로서 충분히 공감한다. 하지만 그 지인의 말은 자신이 겪은 몇 번의 불편함을 베트남 전체 시스템에 대입하는 방식처럼 느껴졌다.
'공산주의라 그래서 그렇다?'
너무 쉽게 만들어진 원인, 너무 빠르게 붙여진 꼬리표
우리 사회도 예전에는 행정 절차에 대한 불만이 많았다. 공무원은 갑처럼 굴었고, 오토바이 순찰 경찰의 장화 속에서 ‘뒷돈’이 뭉치로 나온 장면이 뉴스로 보도되던 시절도 있었다. 그때 우리는 ‘한국이 자본주의라서 그렇다’고 말하지 않았다.
그런데 베트남에서 비효율적이거나 불합리한 일을 마주하면, 우리는 너무 쉽게 말한다.
“사회주의니까 그렇지.”
“공산주의는 원래 그래.”
'부정적 경험 = 사회주의 때문' 이 공식은 놀라울 만큼 자주 등장한다.
하지만 따지고 보면, 행정의 비효율, 부패, 지연은 특정 정치 체제의 전유물이 아니다. 사회주의든 자본주의든, 후진국이든 선진국이든, ‘사람’이 운영하는 시스템은 어느 곳이든 반드시 허술함이 존재한다. 그럼에도 우리는 베트남에서 벌어진 불편만 보면 곧바로 체제 탓으로 귀결시키곤 한다. 이건 사실 우리가 낯선 환경 속에서 자신의 경험을 이해하기 위한 가장 쉬운 방식일 뿐이다. 익숙하지 않은 사회를 설명하려다 보니 단순화된 언어를 붙여 버리는 것이다.
경험 하나를 ‘전체’처럼 바라보는 심리
: 편향은 언제나 조용히, 그러나 강하게 작동한다
사람은 누구나 ‘대표성 휴리스틱’이라는 심리적 경향을 갖는다. 간단하게 말하면, 조금 본 것을 전체라고 믿는 습관이다.
베트남의 한 공무원이 불성실했다. → “베트남 행정은 원래 그래.”
몇 번 부패 사례를 들었다. → “공산주의는 다 썩었어.”
이건 인간의 자연스러운 사고 방식이다. 문제는, 이런 판단 방식이 현실을 왜곡하고 문화 이해를 가로막는다는 점이다. 내 경험이 아무리 불편하고 답답했어도, 그건 어디까지나 ‘개인의 사건’일 뿐이다. 그것이 한 나라의 본질을 말해주는 건 아니다.
그렇다고 경험을 무시할 필요는 없다. 중요한 건 ‘어떤 관점으로 정리하느냐’다. 경험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경험을 정리하는 태도다. 경험은 소중한 데이터다. 다만 그 데이터를 해석할 때는 다음과 같은 질문이 필요하다.
- 이 경험이 ‘전체’라고 말할 근거가 충분한가?
- 비슷한 사례가 반복되는지, 아니면 예외적 사건인지?
- 그 현상이 체제(사회주의) 때문인지, 사람(담당자) 때문인지?
- 같은 종류의 문제를 한국에서도 겪어본 적은 없는가?
- 이 경험을 더 깊게 이해하기 위해 조사나 비교가 가능한가?
이 질문들만 던져도, 경험은 훨씬 더 선명해지고 불필요한 오해는 줄어든다.
경험을 ‘관찰’로 남기고, ‘판단’은 나중으로 미루기
하나의 사건을 전체로 확대하지 않고, 성급한 결론을 내리지 않는 것. 특정 체제나 민족성으로 연결시키기 전에 ‘구체적 원인’을 먼저 살피는 것. 이게 우리가 경험을 바라보는 가장 건강한 태도일 듯 하다.
베트남에서 겪는 불편함이 분명히 있다. 하지만 그것을 단순히 “공산주의라서 그렇다”고 결론짓는 순간, 우리는 더 이상 그 나라를 이해할 수 없게 된다. 오히려 그 말 한마디가 시야를 좁히고, 배움을 막아버린다.
경험은 사실 그 자체로 끝이 아니다. [ 경험 → 해석 → 질문 → 이해 → 정리 ] 이 과정을 거쳐야 비로소 ‘나만의 지식’이 된다.
마지막으로 남는 생각
어제 저녁 대화는, 어쩌면 베트남이라는 나라의 문제보다 우리의 사고방식이 얼마나 쉽게 ‘일반화’의 덫에 빠지는지를 보여준 시간이었다.
경험은 소중하다. 하지만 경험을 전체로 착각하는 순간, 우리는 사실을 잃어버린다.
베트남이든 한국이든, 사회주의든 자본주의든, 문제는 체제보다 그 일을 담당한 ‘사람’의 태도에서 더 많이 발생한다. 그리고 어떤 사회도 완벽하지 않다.
그래서 나는 오늘도 스스로에게 묻는다.
'내가 본 것이 정말 ‘전부’일까?'
'혹시 내가 너무 빠르게 결론을 내리고 있는 건 아닐까?'
이 질문만 잊지 않는다면, 우리는 베트남에서도, 한국에서도, 어느 곳에서도 조금 더 넓은 시야로 세상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