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시대부터 오늘까지, 말투가 말해주는 관계의 역사
어젯밤 유튜브에 옛날 이야기를 전해주는 영상을 보다가 갑자기 이런 생각이 들었다. 조선시대에는 부부가 모두 존대를 썼나? 그 전통은 언제부터 였고, 언제부터, 왜 서로가 반말을 하는 것으로 바뀐것이지?라는 의문이다.
부부가 서로에게 존대하던 시대가 있었다
조선 시대를 다룬 사극을 보면 부부가 서로에게 자연스레 존대를 쓴다. “서방님, ** 하시지요” "허허.. 그러시면 아니되오" 같은 말투는 오늘의 관점에서는 낯설지만, 당시 사회에서는 너무나 자연스러운 질서였다. 부부 사이를 포함한 모든 인간관계가 '서열'과 '예법'이라는 틀 안에 있었고, 존대어는 단순한 말투가 아니라 세계를 유지하는 방식이었다.
하지만 이 전통이 조선에서 갑자기 생긴 것은 아니었다. 삼국 시대부터 이미 가부장적 가족 구조가 있었고, 혼례 후 남편 집안에 아내가 들어가면서 상하 관계 기반의 호칭과 언어 사용이 생겨났다. 고려 때도 비슷한 문화가 이어졌고, 조선에 들어서면서 유교적 규범이 강화되면서 부부 간 존대어는 하나의 ‘예의’이자 ‘도리’로 굳어졌다.
언어는 그 당시의 권력과 질서를 반영했다. 그럼 '언제부터 반말이 시작되었을까?'
가족 내부의 수직적 호칭이 무너지기 시작하면서, 부부가 서로에게 반말을 자연스럽게 쓰기 시작한 시점을 정확히 특정하기는 어렵지만, 대략적인 흐름은 다음과 같다.
1) 19세기 말~20세기 초, 개화기, 식민지 시기를 지나면서
여성 교육의 확대와 도시 생활의 등장 그리고 핵가족의 확산. 이런 변화들이 ‘가부장적 가족 구조’를 느슨하게 만들기 시작했다.
언어도 함께 변했다. 부부가 전통적인 상하관계가 아니라 동반자적 관계로 재해석되면서, 자연스레 반말이 확산되었다.
2) 1970~80년대 이후, TV 드라마와 대중문화에서
젊은 부부가 서로 반말을 쓰는 모습이 긍정적이고 현대적 이미지로 자리 잡았고, 학교와 사회에서 ‘평등한 부부’ 담론이 성장하면서 오늘날처럼 '부부끼리의 존댓말은 비정상' 또는 '친하지 않은 사이'라는 인식이 자리 잡게 되었다.
왜 우리는 존대어를 잃었을까?
: 가까운 사이일수록 말을 편히 하는 문화의 역설
한국은 세계적으로 예외적으로 친밀 관계에서 반말을 강하게 요구하는 문화를 가진 사회다. 가까운 사이라면 반드시 말을 낮춰야 한다는 압력이 있고, 부부 사이는 그 중심에 있다. 하지만 이 변화는 단순한 말투의 변화가 아니라, 관계의 구조가 변했다는 신호다.
남편과 아내는 더 이상 상하관계가 아니다. 부부는 생계, 육아, 가사 등 모든 측면에서 공동 책임을 진다. 이렇듯 경제적, 정서적 독립성이 강조되면서 ‘말의 거리’도 바뀌었다.
한편, 반말은 이런 평등적 관계를 상징하는 방식으로 자리 잡았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말이 너무 편해지면서 감정적 폭력이나 날카로운 언어 충돌도 함께 늘어났다. 반말은 평등을 가져왔지만 동시에 친밀함의 예의를 빼앗기도 했다.
그래서 지금 무엇이 바람직할까?
말투의 문제라기보다 ‘존중의 방식’ 문제다. 부부 사이에서 존댓말을 쓰는 게 '좋다/나쁘다'를 단정할 수는 없다. 중요한 건 말투가 아니라 말투에 담긴 태도다. 반말이어도 차분한 존중이 있을 수 있다. 존댓말이어도 층층이 쌓인 냉기가 느껴질 수도 있다. 부부의 언어는 관계의 거울일 뿐, 답은 정해져 있지 않다.
다만 한가지는 확실하다. 우리 사회가 너무 빨리 ‘예의 있는 말투’를 폐기해버린 건 아닐까? 친밀함을 이유로 모든 예의를 생략해도 되는 시대가 과연 더 행복한가? 이 질문은 여전히 유효한 것 같다. 가끔 사극 속 부부의 존대어가 마음을 은근히 끄는 건, 내가 늙어서가 아니라, 지금 우리가 잃어버린 ‘조용한 존중’을 잠시나마 다시 보고 있어서일지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