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통은 주관적이다. 가끔 '불행한 이야기 대잔치'를 맞이할 때면 다들 하는 이야기다.
나도 힘들어, 세상에 안 힘든 사람이 어딨냐.
불행자랑을 끊임없이 외는 친구를 적당히 무마시키고 다음 대화로 넘어가기 위한 좋은 마침표다.
그리고 그렇게 말한다면 사실, 더 이을 말도 없다.
누구나 고통은 주관적인 거고, 손톱에 가시가 찔린 사람은 건너편에 허리에 칼에 찔린 사람의 고통을 정확히 이해하진 못한다. 본인에게 집중되는 건 손톱의 가시니까.
기생충이 상을 받았다. 기생충이 나왔을 때 주변 사람들의 반응은 대부분 두 가지였다.
재밌었다 vs 찝찝, 불쾌하다
나는 재밌었다. 이렇게라도 이런 이야기를 해줘서 고마웠고, 그 이야기가 뻔하게 흘러가지 않아서 더 좋았다.
그리고 이제 기생충은 대표적인 '국뽕' 아이템이 됐다. 사람들은 기생충이 상을 받아야만 했던 이야기를 반복하고, 또 관련한 재밌는 짤방을 만들어 내서 힘을 생산해 낸다. 기생충은 아이템과 심벌이 됐다.
기생충에서 이야기하는 건 계급과 계층의 문제다. 그렇다면 기생충에 열광하는 만큼 반치하에 사는 사람들의 인권은 나아졌을까?
모든 사람들이 본인이 가장 힘들고 열심히 산다고 외치는 시대다. 그게 노인이던, 아이던, 어떻게 세상이 이렇게 됐을까를 걱정하면서도 가장 먼저 걱정하는 건 본인의 안위다.
내가 힘든 만큼 너도 힘들 수 있다. 하지만 힘듦에 내쳐진 사람들에게 시간은 다르게 흐른다.
우리에게 공평한 건 시간과 목숨이 하나라는 것 정도 밖엔 없는데, 누군가는 고고하게 아픔을 치유할 수 있는 경제적 여건이 주어지고
누군가는 오늘 술을 먹고 잠들지 않으면 안 될 거 같은 텁텁함에도 다음날엔 5시에 기상해 일을 찾으러 가야 하는 여건이 주어진다.
고통이 모두에게 공평한가? 법조차도 판검사 출신이면 죄 사함을 받는다.
같은 피와 살을 가지고 태어나도, 어떤 인류는 항상 용서받고 시간을 더 받으며 더 좋은 스타트라인에서 출발한다.
우리는 공평하지 않다. 가난한 사람들은 좌절에 허비할 시간이 없다.
가난한 게 죄일까? 기택은 자신에게 딸린 가족을 먹여 살려 보려고 여러 가지 사업을 하다가 망했다.
그 종착역은 대만 카스텔라였고, 여간해서 화내지 않는 기택을 누군가 화나게 한다.
기우는 '어차피 내가 들어갈 대학이니 사기가 아니다'라고 말하지만, 분명 사기다.
하지만 그 사기 대한 벌이 누군가에겐 더 무겁고, 누군가에겐 더 가벼울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