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모든 날들은 자전거를 탈 수 있는 날과 그렇지 않은 날로 나뉜다. 비 오는 아침은 곧 자전거를 탈 수 없는 아침이다. 도쿄에서 자전거는 '레저'가 아니다. 교통수단의 역할을 충실하게 수행하는 유용한 탈 것으로 기능한다. 자전거가 삶의 일부가 되어 버리면 비 오는 아침은 자전거를 탈 수 없는 아침이 된다. 매일 일기예보를 체크하는 것은 자전거를 탈 수 있는 날인지 아닌지의 여부를 확인하기 위해서라는 것도 과장은 아니다. 비 오는 날도 우비를 입은 채로, 혹은 한 손으로 우산을 쓰고 다른 한 손으로 핸들을 잡고 능숙하게 타고 가는 사람들도 있지만 비를 맞으며 자전거를 타는 것은 나로선 영 내키지 않는다. 따가운 햇살이 말랑해지고, 찬바람이 조금 불기 시작하면 금속성으로 된 핸들을 잡은 손이 시려진다. 그 순간 아, 겨울이 오는구나 싶다. 계절의 변화는 항상 자전거에서 먼저 온다.
자전거는 아이가 유치원에 들어가던 해에 처음 구입했다. 스쿨버스가 있는 유치원이 흔하지 않아 약간 애매한 거리에 유치원이 있으면 이곳의 엄마들은 대개 자전거로 등 하원을 시킨다. 아이가 아주 어릴 때는 앞자리에 태우고, 조금 크면 뒷자리에 태우고 달린다. 아이가 한 명 더 태어나면 앞 뒤로 태우고 달리고, 아이가 셋이 되면 둘은 앞 뒤로 태우고 막내는 아기띠로 등에 업은 채 달린다. 아이를 태울 수 있는 자전거를 '마마 차리'라고 부르는데 보통은 전동 장치가 달려있어 언덕길도 가뿐히 올라갈 수 있다. 엄마들은 마마 차리를, 경찰들은 경찰용 자전거를 타고 다닌다. 경찰들에게 차나 오토바이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자전거를 타고 이동하는 경우가 훨씬 눈에 많이 띈다. 일본의 경찰들이 떼를 지어 자전거를 타고 이동하는 모습을 보고 어머 이 얼마나 평화로운 광경인가! 싶기도 했다. 물론 자전거를 타고 범인을 잡으러 가는 듯한 급박한 모습도 본 적 있다. 야쿠르트 아줌마도 자전거로 야쿠르트를 배달한다. 한국에서는 택배 하시는 분들의 탈 것으로 오토바이가 흔하지만 이곳에서는 자전거로 이동한다. 자전거 판매와 수리를 겸한 점포가 동네마다 300미터 정도의 간격으로 포진해 있다.
지금껏 내가 직접 몰아본 ‘바퀴 달린 탈 것’은 두 가지뿐이다. 하나는 유모차, 다른 하나는 자전거다. 그러고 보니 둘 다 아이를 태우기 위한 목적이었다. 자전거를 배우고 첫 한 달 동안은 아이를 태우고 달릴 엄두가 나지 않아 아이를 시트에 앉힌 채 그 무거운 전동 자전거를 끌고 다녔다. 더 이상 이대로는 안 되겠다 싶던 날, 결심을 하고 아이용 시트에 쌀 5킬로그램을 실은 채 남편에게 아이를 맡기고 공원에서 매일 연습했다. 혼자서 자전거를 타는 것조차 10년 만이고 그것도 유원지에 놀러 가서 반 시간 정도 타본 것 밖에는 경험이 없었다. 5킬로그램짜리 쌀을 싣고 사람 없는 공터를 수십 번 뱅글뱅글 돌면서 이래서 어머니는 위대하다고 하는 것인가, 무심코 생각했던 것 같다.
수만 번의 연습 끝에 이제 하산해도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하여 아이를 처음으로 뒷 좌석에 태우려는데 아이가 타지 않겠다고 버텼다. 엄마가 운전하는 자전거는 넘어질 것 같다며 아빠가 운전할 것을 요구했다. 물론 나도 겁나지 않았다면 거짓말이지만 천천히 움직이면 괜찮다며 아이를 달래어 태우고 달렸다. 고백하자면 코너를 돌며 세 번 정도 넘어졌다. 다행스럽게도 한 번도 다치지는 않았다는 것에 감사하고 있다. 일본 유치원의 엄마들도 집이 바로 코 앞인 경우를 제외하고는 대개 자전거로 아이를 태우고 다녔다. 하원하는 아이를 뒷자리에 태우고 조금 먼 공원에 가고 싶으면 다 같이 줄지어 이동했다. 때로 어느 집에 모여서 아이들이 놀고 싶어 하면 역시 자전거 서너 대가 사이좋은 물고기 떼처럼 이동했다. 자전거가 없으면 아이나 엄마나 친구를 만드는 것도 쉽지 않았을지도?
세월이 흘러 그 반짝반짝하던 자전거가 군데군데 녹이 슬고 안장은 조금 찢어졌다. 전동 배터리는 한 번 바꿨다. 전동 자전거에 익숙해 일반 자전거는 잘 타지 못하게 되었다.
처음으로 자전거에 올라 페달을 밟는 순간 '탈 것'에 몸을 싣고 스스로의 힘으로 이동을 한다는 사실에 들떴었다. 조금만 걸어도 지치는 저질체력의 소유자로서, 자전거에 오르면 나의 발이 두 개의 바퀴로 트랜스포밍을 하는 경험을 했다. 말을 타고 벌판을 달리는 기분이 이런 것일까? 속력이 선사하는 즐거움에 들뜨게 된다. 적절한 온도와 습도가 갖추어진 맑은 날 자전거를 타고 천천히 달리면 살아있어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든다. 두 팔에 감기는 햇살 한 줄기에도 바르르 떨리는 듯한 충만함을 느낀다.
19세기 초에 처음 발명된 자전거는 '금녀의 영역'이었다고 한다. 그 사실을 안 뒤로 자전거를 탈 때마다 19세기의 여성들을 종종 떠올리곤 했다. 긴치마를 입고 주변의 시선을 물리치며 자전거를 몰아 달리는 19세기의 여성들을. 바지를 입을 때, 투표소에서 투표를 하고 나올 때, 그리고 거기에 자전거를 탈 때를 추가시킨다. 이런 것이 페미니즘의 소소하지만 대단한 성취로구나. 쏟아지는 햇빛을 온몸으로 받으며 자전거 위에서 페미니즘을 떠올리곤 한다.
때로 밤에 자전거를 타게 되는 일이 있다. 조금 먼 거리를 자전거로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해가 지는 경우도 있고, 어두워졌지만 외출해야 할 경우도 있다. 밤 자전거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랜턴이다. 자전거에 따라 랜턴이 원래 부착되어 나오는 종류도 있고, 그렇지 않은 경우도 있다. 밤에 랜턴을 켜지 않고 달리는 자전거를 교통경찰은 단속한다. 걸렸을 경우에는 벌금을 내야 한다. 어두운 골목길에서 랜턴을 켜지 않고 달리는 자전거는 다른 사람에게 위험하기 때문이다. 자전거의 랜턴은 그러니까, 다른 사람을 위한 것이다. 그리고 물론 그것은 바로 자기 자신을 위한 것이기도 하다.
사람에게도 '나 여기 있어요'를 알려주는 작은 불빛 신호 같은 것이 있으면 좋겠다. 신체의 어느 부분에 부착되어 있는 것이 좋을까. 뒤통수? 아니면 왼쪽 귓불이나 목 부근은 어떨지. 인생의 골목길에서 하나의 불빛이 켜지면 그가 거기 있다는 사실을 알아주고 서로 존중하여 최소한의 예의와 배려를 해주었으면 좋겠다. 불빛을 깜박이면 '너무 힘드니 도와주세요'의 신호로 받아들이고 조심스레 도움의 손길을 내밀기도 했으면 참 좋겠다.
자전거 랜턴에 얽힌 에피소드를 아름답게 그려낸 영화라면 <러브레터>가 떠오른다. 이름이 같은 여자아이와 남자아이가 자전거 불빛을 통해 뒤바뀐 시험지를 확인하는 그 장면이 참 좋았다. 일본인 친구는 한국에서 그 영화가 대히트를 했다는 사실을 알고는 이유가 대체 무엇인지 무척 궁금해했다. 그 정도의 영화는 아닌 것 같은데…라고 하면서. 나로서는 그 이유를 명확히 설명하는 것이 쉽지 않았지만, 오래전 일본에서 드라마 <겨울 소나타>와 욘사마 붐이 일어난 것에 대해 한국인들이 명확하게 이해하지 못한 것과 비슷하지 않을까 생각했다. 그 영화와 드라마는 사람들 안에 있던 '그 무언가'를 건드린 것인지도 모른다. 그것을 통해 전류가 흐른 것이다. 각자의 자리에서 살아왔어야만 이해할 수 있는 그것은 언어로 설명하기에는 곤란한 일이었다.
그렇게 매일의 시간이, 기쁨과 부조리와 풀어야 할 퀘스천들이 자전거 위에서 쌓여간다. 자전거의 시간은 앞으로 내딛으면 페달을 밟은 만큼만 정직하게 앞으로 나아간다. 소설가 김훈의 에세이 <자전거 여행>에서는 자전거의 페달을 밟는 행위를 ‘저어 간다’라 표현했다. 과연! 물 위에서 노를 젓듯 자전거를 탄 사람은 대지 위에서 바람을 저어 가는 것 같다는 건 직접 자전거를 타보아야만 알 수 있는 사실들이다. ‘살아서 몸으로 바퀴를 굴려 나아가는 일은 복되다’고 한 그의 말처럼 자전거 위에 올라앉아 햇빛과 바람을 온몸으로 느끼면 아, 내가 살아있구나! 하는 것을 피부로 실감한다. 발을 멈추면 자전거도 멈추고 발을 내딛으면 나아가는 그 정직함이야말로 가장 바람직한 삶이라는 생각도 덤으로 하면서. 자전거 위에서 철학이 자라나고 사유가 부풀어간다. 자전거의 시간은 사유의 시간이다. 도쿄의 삶에서 가장 잘한 것 중 하나는 자전거를 타기 시작한 것이고, 가장 유용한 구입품은 바로 이 자전거였다. 노쇄한 나의 자전거는 그간 열 번 정도 타이어를 교체했고, 한 번 안장을 바꿨으며, 수십 번의 시술을 거쳤다. 자전거에 대해 예찬하는 글을 쓰니 또 자전거가 타고 싶어진다.
*
아이가 태어나 처음으로 ‘문장으로’ 말했던 순간을 늘 기억하고 있다.
“주황색. 오빠가. 장정거. 타요.”
주황색 점퍼를 입은 남자아이가 자전거를 타고 지나가는 것을 보고 난 직후였다.
우리의 모든 순간에 자전거가 있었다.
- 내 일기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