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리서기 요가를 감내하려는 작가의 고통에 감정을 이입하면서, 인생의 합계를 제로로 만들기 위하여, 플러스로 남기를 원하는 삶의 게으른 본능 속에 마이너스를 부어 넣으려는 작가의 소박한 의식들에 귀를 기울이게 된다. 그는 차분하고도 날카로운 시선으로 정서의 사각지대 속에 분실된 인식의 파편들을 되찾아주는 젊은 탐정에서, 이제는 어느새 인생을 회고하는 중년이 되었다. 그러므로 이 산문은 작가의 인생을 비춘다.
그의 언어는 나서는 법이 없이 틈을 내고 소음 없이 침묵을 깨는 신사의 매력을 가졌지만, 아버지와 어머니로부터 시작하는 유년의 기억들은 마치 사운드가 제거된 공포영화처럼 작가도 그리고 독자도 동시에 긴장하게 만든다. 일종의 도발이라면 도발인듯. 오랜만에 공개된 산문 속에서 난데없이 불쑥 튀어나온 부모에 대한 고백이, 의도되지 않은 인간의 운명에 대한 송가처럼 느껴졌던 것은, 그것을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가에 대한 내밀한 성찰로 읽혔기 때문일 것이다.
그는 고통을 언급한다. 수많은 인문학자들이 그리스의 신화 속에서 감탄하던 무용의 그 고통. 인생에 아무런 의미를 던져주지 않는 그 고통의 순간을 통하여 인간 그 자체가 드러난다고 믿었던 아테네의 용사들은 여전히 오늘도 살아남아 의미 없는 고통을 회피하려는 이 시대의 결핍 속에서 조용하게 의미를 전한다. 반가운 언어였다. 행복해하는 시지프스의 상처 난 어깨가 떠올랐다. 카뮈는 삶을 절망적으로 사랑하라고 선언한다. 헨리 데이비드 소로 또한 사람들은 조용한 절망 속에서 살아간다고 말한다. 작가는 어떠하였을까.
외부보다는 자신의 안쪽을 살피는 이 잔잔한 산문은 난데없이 주어진 각자의 인생을 돌아보게 한다. 나는 이 책을 읽으며 그의 나이를 인식하지 않으려고 했다. 감각적인 문체는 여전히 젊고 두서가 없었으니까. 하지만 몇 군데 밑줄을 그을 수 있었다. 그의 인생을 스쳐간 여러 기억들에서 용기와 인내가 느껴지기도 하였다.
어쩌면 그는 조금 높은 산에 올라온 것 같다. 그리고는 아래를 굽어봤겠지. 잠시 중턱에 앉아서 무슨 생각을 하고는 다시금 이어지는 능선을 걸어갈 것이다. 그것이 이 산문이다. 나는 평소의 버릇대로 산문을 낸 작가가 이 다음에 어떠한 소설을 낼 지에 대한 예상을 해본다. 어쨌거나 단 한 번의 삶은 단 한 번만 사는 사람들만의 이야기이다. 그것 때문에 살만한 가치가 있을 것이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