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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체와 키르케고르 사이에서...

by Silverback

누군가는 인간의 독자적 창의성과 에너지에 집중한다.

타인의 도움을 바라지 않고 스스로의 힘을 키워 튼튼한 두 다리로 대지위에 굳건하게 서는 것. 그리하여 자신의 생에 주어진 육체의 욕망과 이성의 건강한 성취를 이루어내는 것. 자신을 둘러싼 틀을 깨고 단계를 극복하고 뛰어넘어 나약한 주변인들보다 뛰어난 자아로 우뚝 서는 것. 어제의 나보다 성장한 나를 만들고, 매번 다가오는 장애물과 고통을 이겨내는 저항감을 축복으로 여기면서 초극하는 것.


한편, 다른 누군가는 인간의 절망적 결핍과 귀의성에 집중한다.

유한한 삶 속에서 운명처럼 짊어져야 할 필연성에 절망적으로 대응하는 것. 그리하여 허무를 극복하고 고통을 뛰어넘기 위하여 무한하고 가능성 있는 가치에 의지하는 것. 언어로 포장되는 변증과 현학의 자세에 매몰되기보다는 영혼과 의지의 확약을 이루어내기 위하여 전지전능한 신의 영역에 자아를 내맡기는 것.


헬레니즘과 헤브라이즘으로 상징되는 인류사에서 커다란 두 갈래의 인문학적 가치는 인간과 신이었으며, 둘은 끊임없는 밀당으로 이 세상의 본질을 드러내는 진실의 수레바퀴를 돌린다. 과연 신은 있는가 없는가.


어쩌면 신은 주인공이 아니었을 수 있다. 중세 이전의 세계에서도 사람들은 언제나 말없고 무심한 신을 매도했고 인간존재의 기준으로 삼았을 뿐 그 욕망과 흥망성쇠의 굴레에서 살아남은 것은 언제나 인간이었다. 빛나는 조연은 주연을 드러내는 법이고, 사실 역사에서 주인공은 언제나 인간이기를 갈구하지 않았던가. 르네상스에서 드러난 인본주의는 단지 오염된 기독교 문화의 반향이었을 뿐 신에게서 인간으로 집중된 것은 아니으며, 다만 면죄부 장사치들의 천박한 욕망을 고발하는 기소장에 불과했던 것이 인간을 돋보이게 했던 것뿐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므로 사건의 본질은 신을 믿느냐 아니냐에 있지 않을 것이다. 바꾸어 말하면 신이 죽었건 살았건 각각의 논지는 그 본질을 목표로 두고 있는 여행객들에게는 어느 곳에서 바라보더라도 항상 같은 자리에 있어서 그 어느 곳으로 돌아가더라도 결국은 하나의 정상에서 만나게 되는 성실한 여행객들의 여정과 같은 것이기 때문에, 그릇된 선지자들의 계율과 이 세상의 부조리함에 염증을 느끼면서 낯선 천국에 집착해야만 했던 기독교인이라든지 혹은 그와 반대로 이 땅과 현실에서의 삶을 소중하게 여기고 육체를 통한 욕망과 감각에 솔직하게 반응하면서 매일매일 반복되는 이 굴레 같은 속박에서 다만 아주 조금이라도 나은 내일을 만들기 위해 몸부림치는 고독한 시지프스의 작은 미소 속에서도 인생의 참된 의미와 본질적 가치는 서로 결을 같이 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격동의 근현대를 거치면서 누군가는 니체를 끌어들이고, 또 누군가는 키르케고르를 이용한다 . 지식이라는 것은 언어로 표현된 무기처럼 사용했을 경우 이쪽에서 남용할 수도 있고 저쪽에서 호도할 수도 있다. 우리는 그러한 것들을 너무도 잘 알고 있으며, 단지 기독교이건 초인주의이건 혹은 염세주의이건 휴머니즘이건 간에 본질이라는 것은 겉으로 드러나는 것에 있지 않고 그 안에 들어있는 섬세한 본질의 극진한 심장부에 있는 것이라서, 예수의 진정한 가르침이라는 것이 과연 현시대에 퍼져있는 기독교 문화주의의 제도화된 겉모습에서 과연 얼마나 멀리 떨어져 있으며, 대중과 군중이라는 존재가 탄생한 이 근현대의 거대한 관계의 방향 속에서 어느 쪽이 알파이고 어느 쪽이 오메가인지를 명확하게 구분하지 못할 경우, 과학과 경제의 무게에 짓눌려 위태롭게 그 목숨을 유지하고 있는 철학과 신학의 존재론적 양태의 구분조차 힘들어질 것이 뻔할 것이다.


철학과 인문학 그리고 신학과 종교는 인간과 이 세계를 설명하는 날실과 씨실이다. 그 관계는 이분법과 흑백논리를 오래 견지할 수 없고 결국 결합과 통합을 요구한다. 그렇게 본다면 하나로 합쳐지는 이해와 합치의 뜻은 어쩌면 신의 영역일 수도 있다. 그러한 의미에서 안티크리스트를 주장해던 니체의 넋두리는 오히려 더 신앙적인 것이 될 수 있으며, 영원으로의 귀의를 주장했던 키르케고르의 믿음은 오히려 더욱 인간적인 것이 될 수 있다. 이는 자유에서 자유롭지 못한 인간의 도피를 통찰한 에리히프롬의 가설들이, 무언가 딛고 있어야 할 디딤판을 필요로 하는 인간의 근본적 한계성을 묘사한 것에서 그리 멀지 않으며, 만약 그러하다면 다만 딛고 서 있는 위치가 다를 뿐 그것들은 서로 등을 맞대고 있지 않다는 의미에 한 걸음 더욱 다가가는 것이 된다.


인간은 어떠한 직선의 양 극단에 있지 않다. 매일매일 새로운 해가 떠오르는 곳에, 그것도 둥그런 땅덩어리의 중심부로 계속 끌어당겨지면서 뱅글뱅글 돌고 있다. 니체와 키르케고르로 상징되는 인간의 서로 상이한 존재론적 가치에 대해서 양분과 저울질만을 추구하는 시각에서 벗어나 그 편 너머에 있는 우주적 질서의 의미를 헤아린다면 우리는 이러한 사상가들의 혜안에 즐거워할 수 있으리라.


문득 그러한 생각이 드는 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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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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