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로사회, 고통없는사회, 불안사회
회사를 언제 잘릴지 모른다는 불안감. 뭐 해 먹고살아야 할지 모르는 불안감. 노후대비를 하지 못한 것 같은 불안감. 아들딸내미 대학 입학시켜야 하는 불안감. 남들은 아파트 하나씩 마련하고 코인투자해서 돈들 벌었다는데 나만 뒤처진 것 같은 불안감. 새로 차린 가게가 망할 것 같은 불안감. 이러한 불안감을 없애고자 밤낮 휴일 없이 자기 자신을 일터에 보내어 돈을 벌고 저축을 한다. 하지만 불안은 해소되지 않고 잠은 오지 않는다. 스스로를 세상의 연료로 갈아 넣어 소진시켜 보지만 삶의 생산은 눈에 띄지 않고 감성은 메말라간다. 이러다가는 점점 닳아 없어진다. 마침내 나 자신은 점차 재가 되어 가을바람 속 건조한 낙엽처럼 바스러져 사라질 것이다.
권위와 규율이 지배하던 모럴의 시대를 지나, 오로지 자본만이 세상을 지배하는 성과의 시대로 접어들면서 개인들은 난데없이 맞닥뜨린 자유에 적응하지 못하고 도처로 도피하고 싶어 한다. 내가 몸 담아야 할 곳은 어디인가. 누가 나를 붙들어주는가. 나는 어디에 의지할 수 있을 것인가. 어느 집단에 속해야만 안정감을 얻을 수 있을 것인가.
자유로부터 도피했던 인간들의 시행착오를 반영이라도 하듯 21세기를 필두로 하여 세상은 점점 외양적으로 연결되어 간다. 포장은 소통과 네트워크라는 고상한 단어의 형태를 취하지만, 속살은 이 시대의 절대적 군주인 '자본'의 아방가르드라고 불리는 거대기업들의 시장판일 뿐이다. 개개인들은 매일매일 인스타나 페이스북을 보면서 마치 자신이 지구촌 세계와 연결되어 있어서 언제나 결속된 존재 혹은 공동체의 일원인듯한 착각을 할 수 있지만, 알고 보면 대기업들이 돈을 벌기 위해서 마련해 놓은 그물망에서 허우적거리면서 낚시 떡밥이나 덮석 물어대는 물고기 신세가 아닌가. 인간 개개인들은 거대기업들의 이익을 위한 하나의 숫자나 데이터에 불과하고, 언제나 측정이 가능하고 계산될 수 있는 네트워크라는 이름의 그물망 안에 갇혀있다. 이제 당신은 한마디로 숫자에 불과하다. 당신은 언제든 측정될 준비가 끝난 것이다.
현대인들에게 자기 창조란 생산성을 높이는데 도움을 주는 자기 착취의 한 형태에 불과하다... 디지털커뮤니케이션은 사람들의 고립을 심화한다. 소셜미디어는 역설적으로 소셜한 것을 해체하여 결국 사회적 결속력을 약화시키는 결과를 낳는다.
철학가 한병철의 예리한 시선은 현대인의 디스토피아적 정서 풍경을 묘사한다. 깊고 날카로운 사색으로, 병들어가는 현대인의 불안과 공포를 고발한다. 이것은 완벽한 불안 고발이다. 핀셋으로 끄집어낸 듯한 단어, 개개인의 심장을 해부해 놓은 듯한 설명, 항상 가슴속을 짓누르는 근원적 우울을 명쾌한 단어와 문장으로 단속적이면서도 담담하게 풀어내는 필력은, 동시대에 살면서 동일한 피해를 보면서 고통받고 있는 독자들의 마음을 사정없이 헤집어 놓는다. 그의 뛰어난 통찰은 2010년 내놓은 명저 '피로사회'를 필두로 '고통없는사회(2021)', '불안사회(2023)', ' 서사의 위기(2023)' 등을 통하여 병들어가는 현대사회를 일관성 있게 관통한다.
이 철학가의 붓 끝에서 헤어 나올 수 있는 현대인은 과연 누구인가.
언제부터인지 몰라도 불안과 공포는 우리 주변에 도사리고 있다. 나 같은 경우에는 아마 고등학교 때부터 시작된 것 같은데, 입시에 대한 공포, 학점에 대한 공포, 취직에 대한 공포, 가정을 꾸리는 것에 대한 공포, 집 장만에 대한 공포, 그리고 가족을 먹여 살려야 한다는 것에 대한 공포가 단계적으로 어깨를 눌러왔다. 물론 그러한 배경에는 좁아진 지구촌과 네트워크의 배경이 숨어있다. 나는 내 나이의 숫자도 관심이 없었고, 살고 있는 집의 평수도 정확히 알지 못했고, 매매가의 정보도 알고 싶지 않았다. 누가 승진했는지 누가 퇴사했는지 나에게는 중요하지 않았다. 어느 친척이 돈을 벌었는지 어느 친구가 아파트를 샀는지 관심이 없었다. 하지만, 내가 원하지 않아도 주변에서는 끊임없이 나에게 접근해 온다. 과연 그 기작은 무엇인가. 시샘? 비교의 본능? 관음증? 내가 원하지 않아도 어디에선가 나의 귀에 대고 속삭인다. 누구누구는 얼마만큼의 돈을 벌었다더라. 누구누구 아들은 어느 대학에 갔다더라. 누구누구는 어디에 가게를 차려서 대박을 냈다더라. 누구누구는 코인으로 망했다더라. 급기야는 내 나이가 정확히 몇 살이라고 거꾸로 알려주기도 한다. 내 집의 가격이 지금 어떻게 움직이고 있는지 내 귀에 대고 알려주기도 한다. 원하지도 않았던 인터넷과 네트워크의 발달로 인하여 나의 휴대폰은 지속적으로 알림이 뜨고 내가 모르는 이들에게 전화나 문자가 온다. 나는 이제 이 연결고리들을 끊을 수 없는 지경에 내몰린다. 사지를 좀먹은 암덩어리의 세포들처럼 이곳저곳에 퍼져있어서 어느 한 부분을 도려낼 수도 없는 것처럼 나의 관계가 주변과 모두에게 어느 새 속해있고 나는 도저히 발을 뺄 수 없다. 듣기 싫어도 들어야 하고 보기 싫어도 봐야 한다. 물론 이러한 모든 연결은 행복과 기쁨, 축하와 풍요를 매개로 하지 않는다. 대부분 공포와 불안, 시샘과 열등감, 원망과 저주의 자극적인 소재를 매개로 한다. 그것이 네트워크의 더욱 강력하고도 유혹적인 연료이기 때문이다.
언제부턴가 우리는 원하지 않게 서로 연결되어 불확실한 정보를 주고받으면서, 각가 어느 위치에 서 있는지 불안해하며 자신의 모습을 확인하고 싶어 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오래전 각자의 대지에 발을 붙이고 하늘을 바라보면서 운명에 따르는 삶을 살았던 시기를 지나, 시시각각 내 옆의 존재가 나를 앞질러 가고 혹은 뒤로 처지는 변화를 목격하면서 뜻하지 않게 나 자신을 저울질하며 스스로를 깎아내고 소모시키는 것일지도 모른다.
성과주체는 성과의 극대화를 위해 '강제하는 자유' 또는 '자유로운 강제'에 몸을 맡긴다. 과다한 노동과 성과는 자기 착취로까지 치닫는다. 자기 착취는 자유롭다는 느낌을 동반하기 때문에 타자의 착취보다 더 효율적이다. 착취자는 동시에 피착취자이다. 가해자와 피해자는 더 이상 분리되지 않는다. 이러한 자기 관계적 상태는 어떤 역설적 자유, 자체 내에 존재하는 강제구조로 인해 폭력으로 돌변하는 자유를 낳는다.
바로 이것이다. 정밀한 복지구조와 체계화된 사회시스템이 견고하게 발달하고 있는 문화적인 시대에도 묻지 마 살인 이라든지 난데없는 자살, 혹은 보복살인 같은 폭력이 만연하는 것은 풍선효과의 일종이다. 그럴싸해 보이는 겉모습은 언제나 안으로 곪은 종양을 키우는 법이다.
이 사회를 움직이는 것은 자본이지만 그 위에는 사실 불안과 공포가 군림한다. 자본은 풍요와 이익의 겉모습을 취하고 있지만, 실제로는 인간 개개인들의 생계를 위협하고 있고, 폭넓게 발달한 인터넷문화를 기반으로 한 비교와 시샘의 욕구를 이용하여 사람들을 쉴 새 없이 자극하고 부추긴다. 위협과 부추김은 당신의 희망과 능력을 거론하는 것인 아니라 결핍과 우려를 들추어낸다. 그리하여 즐겁고 행복하게 살기를 바라는 것이 아니라 불안해하고 무언가를 항상 대비하도록 계속 움직여 자신을 소진하게 만드는 것이다. 불안과 공포를 먹고 자라는 포식자인 자본주의는 연필로 그림을 그린다. 인간은 그 연필의 지우개와 흑연으로 전락한다.
한병철은 현대사회의 병적인 증상을 변증하여 '서사'와 '시간'에 집중하는 것처럼 보인다. '서사'는 '연결'을 필요로 하고 연결은 지금 이 시대가 잃어버린 '이야기' 문화의 본질이다. 그것은 앞뒤 '맥락'을 기반으로 한 공동체의 완결성이다. 개개인으로 분절되고 자신 안에서 소모되는 인간성의 상업적 논리는 얇고 가볍다. 그러므로 재생산과 동어반복의 구호를 넘어서 저 앞에 있었던 '처음'과 언제 올지 모를 '끝'으로 완결되는 서사의 인간성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그것은 '발효'를 요구하는 시간, 즉 관조와 읊조림 바라보기와 침잠의 '간격'을 필요로 한다. 인간의 서사는 인간의 역사를 아래로 깊게 하고 흘러가는 시간에 충분히 젖어드는 것은 인간의 역사를 옆으로 깊게 한다. 이러한 의미에서 시간을 단축하려고 하는 모든 시도, 혹은 개개인을 고유의 이야기로 보지 않고 매출의 수치라든지 혹은 동일한 데이터로 보려는 계획은 인간의 마음을 불안하게 만들고 드러난 효과보다도 더욱 고통스러운 허무를 안겨주는지도 모른다.
디지털화된 후기 근대에 우리는 끊임없이 게시하고 '좋아요'를 누르고 공유하면서 벌거벗은, 공허해진 삶의 의미를 모르는 척한다. 소통소음과 정보소음은 삶이 불안한 공허를 드러내지 못하게 만든다
태양에 한번 그을린 적 없는듯한 새햐얀 피부의 현대인들이 지극하게 길러온 육체의 안온한 삶. 물리적으로 쾌적하고 편리한 문명의 이면에 도사린 부산물에 대한 위험을 우리는 감지하고 있을까. 이제는 진정 단 한 차례의 고통도 없이 끝마칠 수 있는 여러 의학적 수술과 과학기술의 혜택에 익숙해진 나머지 우리는 아이를 낳는 진통도, 살을 빼는 고통도, 근육을 단련하는 수고 또한 악으로 규정하고 있지 않은가. 역경과 고난을 이겨내는 성장의 드라마가 비웃음 거리가 되고, 성과에 비하여 지나치게 많이 다루어지는 노력의 과정이 한낯 조롱거리로 전락하는 이 시대에 '고통'과 '저항'의 의미는 어떻게 살아남을 수 있을 것인가.
기쁨이 커질수록 그 안에 숨어있는 슬픔도 더 순수해진다. 슬픔이 깊을수록 그 안에 머물러 있는 기쁨도 더 간절히 부른다. 슬픔과 기쁨은 서로의 안으로 들어가 유희한다. 멂이 가까워지게 되고 그리고 가까움이 멀어지게 함으로써 기쁨과 슬픔이 서로 어울리도록 조율하는 유희 자체가 고통이다
일관된 내용이 하나로 흐르는 그의 책들을 통해서 우리가 막연히 느끼고는 했던 불안과 우울의 근원을 찾아갈 수 있다고 단언한다. 뿌리치고 싶으면서도 거부할 수 없는 현대인의 일상을 도마 위에 올려놓고 우리 자신이 그 재료가 되어 스스로를 돌아볼 수 있는 기회이다. 이 뛰어난 철학가의 도움으로 우리는 우리가 입 안에서 어물거리고는 했던 그 언어, 막연하게 맴돌던 그 감정을 찾는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