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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포스트잇

뒤로 밀기

by Silverback

럭비선수들은 공격할 때 몸을 적극적으로 방어한다.

반대로

수비할 때는 상대방을 죽일 듯 달려들어 공격한다.

공격이 방어이고, 수비가 공격이다.


100m 달리기 선수는 출발할 때

스타팅블록을 최대한 강하게 박차고 나간다.

앞으로 튀어나가기 위해서는 '뒤로 밀어야 하는 것'이다.


성장하기 위해서는 비성장을 겪어야 한다.

비성장은 기다림과 인내, 그리고 고통을 수반한다.

그러므로 '성장'은 '고통'과 '인내'라는 단어와 연결된다.


그런데 우리는 '뒤로 미는 것'에 너무도 익숙하지 않다

아래로 침잠하는 것도

쓴 음식을 삼키는 것도

허드레 일을 해보는 것도

잔소리를 듣는 것도

또한

소음과 번잡과 헛수고와 희생을 감수하는 것도

모두 외면한다

현대의 육상선수들에게는 스타팅 블록이 사라진 것이다.


세상을 지배하는 온갖 SNS는 '좋아요'를 강요한다

'싫어요'라는 버튼은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

둘로 갈라진 전쟁 진영에서 이쪽이 응원해도 좋아요 이고

저쪽이 응원해도 좋아요 이다.

사람을 죽여도 좋아요 이고

사람을 살려도 좋아요 이다


내로라하는 대형 서점의 교양서적 매대에는

맹목적 긍정강요의 구호가 난무하다

너는 잘하고 있어...

위로가 되어줄게...

나대로 살기로 했다...

아무것도 안 해도 돼...

아무렇지도 않아...

괜찮은 거야...

맞는 거야...


만약, 이렇게 된다면 세상에는

'그리하여 되어짐(itself)' 만 존재하게 된다.

과정의 통로에 있는 '어떻게(how)'와 '왜(why)'는 사라지는 것이다

타인과의 연결을 의미하는

고통, 극복, 성찰, 사유, 후회, 용서 같은 과정들도 모두 무시된다.

인간은 우주로 상승하여 스타팅 블록이 없는 곳에서

진공 속에서 바둥거리며 딱딱한 우주복을 입은 채 제자리에서만 유영하고

구경꾼들은 계속 앞으로 잘 달리고 있다고 부추겨준다

중력과 마찰과 관성과 반작용을 잃은 곳에서

인간의 신체는 우주복 속에 갇혀 유약해지고 끊임없이 예민한 보호를 요구받게 된다


이러한 자기 순환적 시스템은 인간 개개인의 보호망으로 작동한다

그리하여 지구에 존재하는 70억 개의 고치들이 각각의 껍질을 만들고

외부와의 연결을 단절한 채,

알 속에서 끊임없이 실을 뽑아 뱅글뱅글 피막을 쌓아간다.

고치 안에서 오로지 자기 자신만을 응시하는 현대인들은

외부의 저항이나 사회적 연결망이 좁혀오면 더욱 몸을 움츠리고 고치 안으로 숨는다.


엘리베이터에서 마주친 낯선 사람과는 눈을 피한채

오로지 각자의 스마트폰 속 디지털 타인과 대화를 나눈다.

알고 보면 엘리베이터 속의 낯선 서로가 스마트폰 속의 그들일 수도 있다.


뒤로 밀기 위해서는 껍질이 방해가 된다.

그것을 위해서는 단단한 고치를 벗어야 하고

외기에 신체를 노출시켜야 한다.

9.8ms로 자신을 짓누르는 중력을 밀어내면서 버텨야 한다

그 과정에서 상처나 불편함이 생길 수 있다

하지만 그것은 피부를 단단하게 만들어주는 면역작용으로 기능하고

이 세상의 질감과 온도를 느낄 수 있는 감각을 키워준다

고치를 벗어버린 인간은 서로의 얼굴을 바라볼 수 있게 된다.

그리하여 손을 뻗어 일정한 거리만큼 떨어진 공간을 헤집고 나아가

호기심 가득한 기대와 생각으로 나와는 다른 존재에 대해서 경험한다.

경험은 스스로를 벗어난 그 모든 것으로 향하는 화살표이고

화살표는 전진을 의미하며

전진은 성장과 성취를 선사한다.


뒤로 밀지 않으면 전진은 없다

전진이 없다면 다가오는 질감에 저항하면서 생기는

면역과 단련을 상실하게 된다

면역과 단련이 없다면 감옥에 갇힌다

감옥은 편안하고 따뜻하다

편안함과 따뜻함은 행복이 아니다

편안함과 따뜻함은 닫힘과 멈춤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불편한 중간과정을 헤집고 나아가는 두더지가 되어야

반대편 지면으로 뚫고 나온다

얼굴과 손에 흙을 묻히고

어딘가를 뚫고 나온 두더지가 행복하다


뒤로 밀어라

발꿈치가 닳고 닳도록

그러면

7마일 장화를 선물 받은 행복한 두더지가 될 것이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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