싸울 필요가 없는 세상이 온 거 같아요
언제부터인지 모르겠어요
알게 모르게 다툼과 갈등이 줄어들었어요
그게 줄어서 좋다는 것이 아니라
그 대신 다른 대가를 치러야 하니 문제인 것이죠
내 돈을 빌려간 사람이 돈을 제때 갚지 않으면
얼굴을 붉히거나 싸우게 되죠.
하지만 이제 사람들은 다툼과 갈등을 불편한 것으로 여겨요
시간낭비라고 생각할 테니까요
그래서 그것을 감당하기 싫어해요.
그 대신 소송을 합니다
경찰서에 이야기하던가 검찰로 달려가죠.
나와 너
문제와 문제 사이에 다리가 놓이면
이제 그 다리를 건너가지 않아요
다리를 건너가다가 다치기도 하고
새똥에 맞기도 하고
혹은 다리가 끊어지기도 하기 때문이죠
그냥 이쪽에 고요하게 앉아서
변호사를 부른 후
'Yes' or 'No'
'합법' or '불법'
'합의금' or '감빵'
둘 중에 하나 선택하고 싶어 하지요
오우!
이것은 완전히 이분법이에요
이러한 이분법을 발전시키면
'0'과 '1'로 이루어진 디지털 세계에 진입할 수 있겠죠
맞아요.
인간의 일들을 아주 잘게 쪼개면
디지털화할 수 있어요
감정도
서사도
억울함도
채무도
원한도
사랑도
'0'과 '1'로 처리할 수 있다구요
어느 날은 커피숍에 갔는데,
아르바이트생이 레시피를 완전히 외우지 못했는지
엉망이 된 파르페를 만들어주더군요
아이스크림은 덩어리 반쪽이 완전히 녹아서 흘러내리고
토핑은 누락.
게다가 크림 색상도 이상했어요
그래서 내가 한마디 건네지 않았겠어요?
"저기요, 이건 메뉴에 있는 사진과 너무 다릅니다만..."
그랬더니 돌아오는 답변,
"제가 배운 레시피 그대로 제작했습니다.
제가 할 수 있는 것은 여기까지입니다.
문제가 있다면 여기 명함에 있는
사장님 전화번호로 연락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래요, 그 아르바이트생은
그 어떠한 생각
혹은 그 어떠한 고민
또는 그 어떠한 책임과 귀찮음에서
벗어나고 싶었겠지요.
본인은 배운 대로 기계적으로 일을 하면 되고
문제가 생기면
자기를 고용하고 가르친 점주에게
넘기면 그만이었을 거예요.
로보트나 컴퓨터처럼 입력받은 대로 일을 하면
여타의 감정노동이나 생각봉사를 하지 않아도 되니까요
2000년도 이후에 태어난 젊은이들은
'미안하다'라는 말과 '죄송하다'라는 말을 하기 싫어한다고 하지요
그것은 자존심이 강해서 그렇다거나 혹은
실제로 실수한 것이 없어서 그렇다는 말이 아니에요.
미안한 자세와 안타까운 마음은
'0'과 '1'로 나타낼 수 없기 때문에 그렇지요
그걸 아예 배우지를 못한 겁니다.
그래서 미안하다거나 죄송하다는 말을 하기에 껄끄러운 것이 아니라
그 말을 왜 해야하는지 어리둥절한 것이죠.
이제는 스마트폰으로 막상 전화는 많이 사용하지 않고
SNS의 메신저 기능을 주로 사용한다고 하지요
전화라는 것이, 예정되지 않은 시간에
상대방에게서 일방적으로 전달되는 알림이기에
'불시성'과 '일방성'에 익숙하지 않은 신세대들이
난데없이 울리는 벨소리는 겁을 내기까지 한다고 해요
할 말이 있으면 젠틀하고 깔끔하게 메시지로 남겨두고
원하는 시간에 확인하는 것이 에티켓이 되어버렸지요
이제는 정말 다툴 필요가 없어요
기분 나쁜 말을 건넬 이유도 없고
아쉬운 소리를 하는 것도 손해이지요
간편하게 선택을 할 수 있는 사유
피해를 주지 않는 사랑
계산기로 통역할 수 있는 대화
그런 방식을 추구하나 봅니다
떼쓰는 것
애원하는 것
잔소리하는 것
사과하는 것
감사를 표하는 것
한마디 더 물어보는 것
더 관심을 보이는 것
괜히 웃는 것
서운해하는 것
중얼거리는 것
미련을 갖는 것
뭐라도 해주고 싶은 것 모두
부질없는 짓이에요
계산기로 두드려서 '1'이 나오던가요?
그러면 앞으로 가세요
혹시 '0'이 나오던가요?
그러면 집으로 돌아가세요
그게 제가 목격하고 있는 세상이에요.
그래도 저는 잉크 뚜껑을 열어서
펜촉으로 편지를 쓰고
칼날을 꺼내어 연필을 깎습니다
양장제본이 된 책을 어제 또 기쁜 마음에 구입했고,
최근 어느 음식점에서 맛있게 식사를 한 후
"여기는 음식을 참 잘 만드는 곳이군요"
라고 조곤조곤 이야기해 주고 나옵니다
양말은 세탁기 대신 손으로 빨고요
벤자민을 키울 때에는 꼭 손으로 쓰다듬어 주지요
공학도이면서도 유난히 수학에 염증을 느꼈던 저는
'0'과 '1'의 저주를 받은 것일지도 모르겠군요
그래서 그런지
분노도 많고
설움도 많고
원망도
후회도
자책도
기쁨도
우쭐함도
허세도
그리고 헛소리와 쓸데없는 애드립
과도한 감사와
중얼거림도 종특이지요
정말이지 '0'과 '1'은 지긋지긋 하거든요
저는 계산 대신 이야기를 좋아해요
아내가 자고 있는 모습을
스마트폰으로 찍어서 보여주면 그렇게 싫어하는데,
노트에 펜으로 그림을 그려서 보여주면
숨이 넘어갈 지경으로 그렇게 웃어대지요
저는 다툼의 사람이에요
갈등을 불러오는 문제아이고요
난데없이 변증법을 요구하는 독재자이기도 하지요
요새 저 같은 놈을 누가 사람취급이라도 해줄까요
그냥 제 멋에 살지요.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