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보와 보수
나라와 가족과 친구들을 위하여 산 사람, 또 부자가 되고 사회적인 지위를 높이는 것을 목표로 살아온 사람. 만일 전쟁이 일어나 노예로 끌려가면, 그때부턴 오로지 살아남기 위해서 온 힘을 다하여 영원히 애써야만 한다.
그것은 참혹하고 있을 수 없는 일이기에 아무리 하찮은 목표라도, 설영 그것이 옆에서 일하는 노예를 벌 받게 하는 목표일지라도, 매달리게 된다. 닥치는 대로 목표로 삼는다. 붙잡는 목표가 무엇이든 그것은 물에 빠진 사람이 붙잡고 매달려 있는 나뭇가지와 같다.
- 프랑스 철학자 Simone Weil -
Bing chat GPT, 최민식 공저
역사를 통틀어 사람들은 서로 다른 우선순위와 목표를 가지고 삶을 살아왔습니다.
어떤 사람은 자신의 나라, 가족, 친구를 위해 살았고, 어떤 사람은 오로지 부자가 되고 사회적 지위를 높이기 위해 살았습니다.
두 가지 유형의 개인 모두 고유한 강점과 약점이 있으며 경우에 따라 이러한 우선순위가 어렵고 어려운 시기에 생존하는 방식에 영향을 미칠 수 있습니다.
국가, 가족, 친구를 위해 살았던 사람들은 종종 자신보다 다른 사람의 필요를 우선시하는 고귀하고 사심 없는 개인으로 여겨집니다.
그들은 사랑하는 사람과 지역 사회의 안녕을 보장하기 위해 자신의 편안함과 안전을 기꺼이 희생합니다.
이러한 개인은 군대에 입대하거나 지역 사회봉사를 위해 자원 봉사하거나 해당 지역 사회에서 리더십 역할을 맡을 수 있습니다.
그들은 다른 사람들의 삶을 변화시키려는 그들의 헌신과 의지로 인해 존경과 찬사를 받습니다.
반면에 부자가 되고 사회적 지위를 높이는 것을 목표로 사는 사람들은 이기적이고 물질주의적으로 보일 수 있습니다.
그들은 다른 사람의 필요보다 자신의 필요와 욕망에 더 관심이 있습니다.
그들은 부와 권력을 추구하는 데 있어 무자비할 수 있으며, 공동체의 복지보다 자신의 개인적인 이익을 우선시할 수 있습니다.
전시에는 두 유형의 개인 모두 중대한 도전에 직면할 수 있습니다.
조국, 가족, 친구를 위해 살던 이들은 노예로 끌려가게 되면 이전에 의존하던 지원 체계 없이 살아남기 위해 고군분투할 수 있습니다.
그들이 이전에 행했던 이타적인 행동은 더 이상 가능하지 않을 수 있으며 다른 사람의 안녕보다 자신의 생존을 우선시해야 할 수도 있습니다.
이러한 개인은 이전 가치와 현재 상황을 조화시키는 데 어려움을 겪을 수 있으므로 이 새로운 현실에 적응하기 어려울 수 있습니다.
부자가 되고 사회적 지위를 높이겠다는 목표를 가지고 살았던 개인들에게 노예가 되는 어려움은 더 클 수 있다.
그들은 이전에 실제 역경에 직면한 적이 없을 수 있으며 이전에 개인 이익에 초점을 맞추던 것이 생존이 유일한 목표인 상황에서는 도움이 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이러한 개인은 단순히 생존하기 위해 이전 목표와 욕구를 제쳐두어야 할 수 있으므로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는 데 어려움을 겪을 수 있습니다.
결론적으로, 다른 우선순위와 목표를 가지고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은 전쟁과 위기의 시기에 다른 도전에 직면할 수 있습니다.
국가, 가족, 친구를 위해 사는 사람들은 이전에 의지했던 지원 시스템 없이 새로운 현실에 적응하기 위해 고군분투할 수 있고, 부자가 되고 사회적 지위를 높이는 것을 목표로 살았던 사람들은 생존이 유일한 목표인 상황, 두 가지 유형의 개인의 강점과 약점을 인식하고 우리 각자의 행동과 결정을 안내하는 고유한 우선순위와 가치가 있음을 기억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어느 누구도 순수하게 나라와 가족, 친구들을 위해 살 수는 없다.
다만 개인적인 안위보다는 타인, 가족, 사회, 국가를 위한 가치에 더 큰 방점을 두는 사람들이 몇몇 있을 뿐이다.
이런 사람들은 아무래도 진보적 사상으로 무장하기 십상이다.
여기에는 어느 정도의 자기모순과 딜레마가 항상 따라다닌다.
개인보다 나라, 개인보다 가족, 나 자신보다 친구를 앞세울 때 나의 타고난 본연적인 이기심을 늘 감춰야 하는 이중성 때문에 늘 갈등을 겪는다.
아니, 그런 삶을 살고자 하는 사람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그런 이중성을 드러내고 있고 구조적인 모순이 개인을 위기에 빠뜨려 가고자 하는 방향성의 어느 지점에서 좌초하게 된다.
현대 그리고 미래 사회구조는 절대 자기보다 상위개념의 조직(또는 개인)을 위해 살아서는 안 되는 방향성을 가지고 있다.
유교사회에서는 자신이나 배우자, 또는 자식보다 부모가 더 중요했다.
그것은 인간의 본성을 거스르는 사회적 이데올로기였다.
그래서 어머니의 병을 낫게 하기 위해 아들의 배를 갈라 간을 빼서 어머니의 병을 고치는 약으로 쓰는 등의 효자 이야기는 유교사회에서는 미덕으로 여겨졌다.
심청전이 바로 그런 이야기가 아닌가?
심청전이 오늘날 현대인의 마음속에 남아 있을 수 있는 것은 심청이 다시 살아나는 반전 때문이다.
오늘날에는 아버지를 위해 딸이 죽는 것이 효도라면, 그런 효도 자체가 말이 안 된다.
대학병원에는 신장 이식과 같은 장기이식 수술을 하는 경우가 많다.
병원 측의 말을 들어보면, 가족 간에 장기이식을 해도 부모의 것을 자식에게 이식해 주는 경우는 있어도 자식의 장기를 떼내어 부모에게 이식하는 경우는 없다고 한다.
그것은 자기 생명을 후대로 이어가야 하는 원리 때문이며, 생명이 뒤로 후퇴해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개인과 나라의 관계에서도 마찬가지이다.
나라가 개인을 보호하고 돌보는 것이 맞다.
물론 우크라이나와 같이 전쟁상황에서는 나라를 지키기 위해 개인의 희생은 불가피하다.
그렇지만 일상의 삶에서 개인은 나라 걱정하면서 살 필요가 없다.
나라를 부유하게 만들기 위해 개인을 희생시키는 것이 아니라, 각 개인이 자신의 이기심을 극대화하면서 재산을 축적해 가는 동안 나라가 부유해지는 것이다.
북한이나 그 주변국가들은 개인보다 국가가 더 중요하다.
개인의 웰빙보다는 국가의 강력한 국방력이 중요하다.
개인보다 위의 조직의 우위를 강조하면 전체주의로 갈 수밖에 없다.
이런 사람은 기본적으로 보수주의에 속한 사람이다
보수주의라는 사상을 갖고 싶어서 보수가 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살아가면서 뭔가를 누리고 있고 지킬 것이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자동적으로 보수라는 계층에 속한 사람이 되는 것이다.
이런 기본적인 삶의 패턴을 가진 사람이, 집단 또는 공동체 사상을 어느 정도 가지고 있으면 그는 사상적으로 보수주의자가 되는 것이다.
좌파학자들의 모임인 프랑크푸르트 학파의 일원인 허버트 마르쿠제는 현대사회에서 진정한 공산주의자를 배출하기 힘든 이유를 찾기 위해 연구한 결과를 [일차원적 인간]이라는 저서에 담았다.
마르쿠제는 사람이 진정한 공산주의자가 되지 못하는 이유는, 현대 사회에서 인간이 자본주의적인 생활 수준을 누리면서 살아가기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즉, 자본주의 경제에 대한 의존도가 높은 현대 사회에서는 개인의 욕구 충족이 중요시되기 때문에, 진정한 공산주의적인 가치와 이념을 실천하기 어려워지는 것이다.
이러한 사회적 연구 분야의 이론을 이해하면서, 우리는 현대 사회의 문제점을 깊이 이해하고 새로운 시각을 갖게 되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방안을 모색할 수 있다.
그리하여 자본주의 사회에서 풍요와 재물 같은 개인적인 욕망, 권력욕 같은 사회적 욕망을 누려본 적이 있는 사람이면서 자신이 사회주의자로 자처한다면 항상 자기모순에 빠져들 수밖에 없다.
자기 주변에 늘 일어나는 자기모순을 인정하고 싶지 않으니까, 아예 양심을 닫아 버린다.
그래서 자신은 모순적인 삶을 살아도 괜찮고, 양심이 없어도 상관없으면, 누가 욕을 해도 욕하는 사람 입만 아프겠다고 안타까워하는 마음만 가지면 된다.
<나라와 가족과 친구들을 위하여 사는 사람>은 집단적 사고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여러 가지 노력을 필요로 한다.
이런 사람은 자신의 삶의 두 가지 양식을 충돌하면서도 충돌이라고 인정하지 않을 뿐 아니라, 시간 개념이 통합되지 못해 분열되어 있다.
그들의 사상은 1980년대라는 과거에 갇혀 있고, 현재 안에서는 자본주의적 풍요를 누리고 있으며, 집단적 사고로 전체주의적 안전망으로 미래의 불안에서 벗어나고자 한다.
시간개념의 분열로 시대가 어떻게 흘러가고 있는지, 시대정신이 어떻게 변화되고 있는지, 기술발전이 어떤 방향성을 가지고 있는지에 대해 무관심하여 늘 시대착오적 발상과 무양심의 인간으로 진화하고자 한다.
<부자가 되고 사회적 지위를 높이는 것을 목표로 삼는 사람들>은 현실에서 보존하고 지켜야 할 것이 너무 많다.
그래서 어디를 가나 보수주의를 표방한다.
그들이 말하는 보수주의는 무능하고 무기력한 보수주의다.
조금만 손해가 발생해도 움츠러든다.
두 부류 이들이 자신들이 처한 모순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첫째, 시대정신의 변화를 읽어낼 수 있어야 한다.
50년 전의 사고를 가지고 2020년대에 적용하고자 한다면 수많은 무리수를 두고 있다는 점을 명심하라.
둘째, 사회구조의 변화, 개인의 의식의 변화를 읽어내야 한다.
지난 50년의 사회변화는 과거로 말하자면 500년의 변화와 맞먹는다.
가족구조가 달라짐으로 인해 가족개념이 달라지고 있고, 이데올로기는 갈수록 통하지 않는다.
무엇보다 '인간'에 대한 깊은 이해와 '관계'에 대한 중요성을 인지할 필요가 있다.
셋째, 인간 본성은 변하지 않아도 삶의 방향성은 크게 달라질 수 있다는 것을 인지해야 한다.
조선시대에는 할어버지와 아버지, 아들 세대가 동일한 사고를 하였으나, 지금은 1980년대 생과 1990년 생의 사고와 이해방식이 다르다.
2000년생이 오면 1990년 생과 의사소통이 힘들다고 한다.
북한의 김정은도 요즘 10대에 대한 우상화 작업이 통하지 않아 힘겨워한단다.
이제 이데올로기의 시대는 끝난 것이다.
<나라와 가족과 친구들을 위하여 사는 사람>라고 주장하는 사람은 좌파, <부자가 되고 사회적 지위를 높이는 것을 목표로 삼는 사람들>은 우파라고 주창하면, 그것은 매우 우스운 일이다.
'좌파-우파'로 주창하는 사람이라면, 그는 영원히 이분법적 세계에서 벗어나기 힘들다.
차라리 진보-보수로 나누면, 누구나 보수적이면서 진보적인 면을 가지고 있고,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진보-보수의 구도는 서로 색깔이 다른 사람과 화합해 가며, 다양성을 표방하며 모순을 극복할 수 있다.
각자가 '나는 우파다.''나는 좌파다.'를 주창하면, 서로 대화가 불가능하다.
보수-진보로 나뉘면, 서로 신축성 있는 대화가 가능하다.
다행스러운 것은 우리나라에는 극단적으로 서로 다른 정치적 사상을 가지고 있어도 '내전이 없고', 종교가 그렇게 많아도 '종교전쟁이 없다'는 점이다.
이것은 우리 민족이 가진 저력이라고 볼 수 있다.
또는 우리 사회가 이미 이런 다양성을 수용할 수 있는 넉넉한 관용을 가지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프랑스는 프랑스혁명, 나폴레옹의 등장, 68 혁명, 후기 구조주의의 발흥 등 세계적인 정치 및 사상의 큰 흐름을 주도하였지만, 오늘날 모두 실패한 혁명으로 받아들여져 사회구조 자체가 취약한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우리나라는 짧은 민주화, 짧은 경제발전에도 불구하고 최상위 구조를 가지고 있고, 시민들 간에도 서로 다른 타자에 대한 포용력이 매우 높은 나라인 것 같다.
지금 우리는 2030년대에 터져 나올 문화경제적 폭발의 잠재력을 키워야 한다.
서로 대립하는 타자에 대한 이해를 높이고, 서로 다른 점을 포용함으로써 잠재력을 키울 수 있다.
우리 모두는 과거의 아픔에 대해, 현재의 풍요로움에 대해, 미래를 열어가는 잠재적 폭발력에 대해 자부심을 갖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