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르소나에 목숨걸다
칼 구스타프 융은 마음의 구조를 탐구하면서 페르소나로 알려진 인격의 가장 외적인 측면을 조명했다.
일반적으로 자아(ego)가 현실과 가장 밀접하게 맞닿아 있는 것으로 알고 있지만, 현실과 자아 사이에는 '페르소나(persona)'라는 인격이 있다.
'가면'이라 번역될 수 있는 '페르소나'는 연극 공연에서 가면을 사용했던 고대 그리스의 관습에서 비롯되었다.
한국의 현대에 이르기까지 과거의 문화권에서도 '봉산 탈춤' '산대놀이'같은 놀이 문화 안에서 '탈'을 써서 본래의 자신을 숨기고 다른 인격을 마음껏 드러낸다.
엄격한 신분사회에서 신분의 높고 낮음으로 인해 본모습을 가지고는 표현할 수 없는 것을 '탈'을 씀으로써 신분사회를 넘어선 인간의 보편적 평등의 가치를 추구하며 상징적 역할의 의미를 넓혀 나갔다.
특히 배우들은 페르소나가 어떻게 작동하는지를 잘 보여준다.
역할을 효과적으로 수행하기 위해 배우들은 자신의 개성을 잠시 내려놓고 자신이 연기하는 가면의 캐릭터에 몰입하게 된다.
심지어 배우가 캐릭터와 너무 깊이 동일시하여 실제 생활에까지 영향을 미치는 경우도 있다.
이렇게 극과 현실의 경계가 모호해지는 것을 '캐릭터와 맹목적인 동일시'라고 표현할 수 있다.
그러한 동일시는 배우가 본래적 성격보다 가면의 성격에 매몰되면서 일상의 삶 속에서 자신의 본성을 잃어버리고 가면(배역)의 성격을 자기 것인 양 역할을 바꾸는 것을 말한다.
그리하여 가장무도회나 가면 공연에 참여하면 종종 위와 유사한 현상이 발생한다.
이 예술 형식에 참여하는 개인이 의식의 변화된 상태나 기억상실증을 경험하는 것은 드문 일이 아니며, 평소의 자신과 "분리"되거나 단절된 느낌을 받기도 한다.
많은 가면무도회 배우들은 자신의 몸이 저절로 움직이거나 자신이 연기하는 캐릭터가 자신 안에 살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는 보고를 한다.
그들의 설명에 따르면 가면은 내면의 인격을 끌어내는 도구가 되어 다른 영혼이 일시적으로 자신의 존재를 점유할 수 있게 한다.
위에서 언급한 가면무도회에 참여하는 개인은 물리적 가면을 쓰는 행위를 통해 은유적으로 다른 페르소나를 착용하게 되면서 종종 평소의 자신과 다른 행동을 하게 되면서, 자아에 대한 인식 변화를 꾀하기도 한다.
가면을 쓰면서 본래적 본성을 잊어버리기도 하지만, 때로는 무아지경에 빠지거나 황홀경에 빠져 무의식 속에 잠재되어 있던 변혁적 힘을 경험하기도 한다.
이는 가면을 통해 자신의 무의식의 역할과 그것이 우리의 정체성에 미칠 수 있는 심오한 영향에 대한 성찰을 불러일으키는 경우도 있다.
때로는 배우가 가면을 쓰고 다른 역할을 맡는 행위를 통해 감정적으로 몰입하고 캐릭터와 동일시하는 동안 자신의 고유한 능력을 발견할 수도 있다.
경우에 따라서는 가면 캐릭터와의 뿌리 깊은 연결은 의식의 변화와 기억 상실 상태로 이어질 가능성도 있다.
가면과 관련된 이상과 같은 여러 경우들을 보면서, 가면을 씀으로써 평소의 인격을 끌어내리고 다른 영혼을 신체로 초대하는 그릇으로 사용되면서 연극의 변화하는 힘과 마음의 의식적 측면, 그리고 무의식적 측면 사이의 상호작용에 대한 설득력 있는 관점을 제공할 수 있다.
칼 구스타프 융은 마음의 구조를 탐구하면서 페르소나로 알려진 인격의 가장 외적인 측면을 조명했다.
위의 그림에서 페르소나는 큰 원의 가장 외곽선이다.
지금 우리는 칼융의 마음의 구조를 이해하는 것이 중요한데, 융이 말하는 페르소나를 잘 이해하기 위해서는 일단 무의식이니, 황홀경이니 하는 것을 배제하는 것이 좋다.
융의 페르소나는 일단 외적인격에 해당되는 것으로 이해할 필요가 있다.
페르소나가 외적인격이라면, 내적 인격은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심혼(아니마, 아니무스)이다.
페르소나를 외적 인격으로 규정하게 될 경우, 그 의미는 매우 축소된다.
그 의미는 주로 '사회적 역할', '체면, '낯' 등이다.
성경에서 바리새인들에 대해 '외식하는 자'라고 꼬집었다.
'외식하는 자'란 바로 '페르소나에 사로잡힌' 자이다.
이렇게 보면, 페르소나의 개념은 위에서 말한 황홀경이나 무아지경으로 인도하는 개념과는 사뭇 달라진다.
바리새인은 외식하는 자로서 자신의 영혼을 살피지 않고 남에게 보이는 자신의 겉모습만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람이다.
위의 그림을 자세히 보면, 페르소나가 견고해야 인격의 다른 요소들이 제자리를 잡으면서 제 역할을 할 수 있을 것 같은 느낌이 든다.
페르소나를 꼭 바리새인의 '외식'과 연결하는 것으로 제한할 필요는 없다.
사람이 태어나서 당당한 사회인이 되기까지 수많은 페르소나가 필요하다.
우리 한국사람들은 보통 대학교 졸업장을 따야 사회생활을 원만하게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대학 졸업장을 따기 위해 초 중 고등학교 졸업장이 있어야 한다.
이 모두가 누구나 마땅히 갖춰야 할 페로소나이다.
의사가 되기 위해서는 의과대학을 나와야 하고, 전문적 직업을 갖기 원하면 그에 대해 요건이 맞는 자격증을 따야 한다.
대학교수가 되기 위해서는 박사학위를 받아야 하는 것이다.
페르소나 자체가 나쁠 것은 전혀 없다.
다만 페르소나와 맹목적으로 동일시되는 삶을 사는 것이 문제가 될 뿐이다.
페르소나와 동일시가 심해지면, 자아(ego)는 자신의 내적 정신세계(심혼)와의 관계를 상실하게 되는 것이 문제이다.
페르소나와의 동일시는 가벼운 인격 해리를 일으키는 경우도 있다.
많은 사람들이 페르소나를 제대로 갖추지 못해 열등감으로 살아가기도 한다.
소위 학벌 콤플렉스가 바로 페르소나의 문제인 것이다.
학력 위조도 바로 건강하지 못한 페르소나의 문제다.
어떤 사람은 오랜 기간 각고의 노력을 하면서 획득한 박사학위를 받고 나서 무기력해지기도 한다.
이는 박사학위 자체를 목표로 삼다가 목표를 달성하고 나자 삶의 목표를 상실해 버려 무기력한 삶을 살아가는 경우이다.
과거에는 나쁜 아버지들이 많았다.
밖에서는 누구에게나 친절하고 활달하고 인정 많고, 스마트한 사람, 성인군자로 통하지만 집에 돌아오면 밖에서의 태도와는 다르게, 무뚝뚝하고 소심하고 잔소리 많고 짜증 내고 작은 일에 집착하는 소인배가 되는 모양을 드러내는 아버지들이 있었다.
그런 아버지는 자기 페르소나를 위해 남의 시선을 의식하면서 살지만, 집에 들어오면 가족이기 때문에 자신의 페르소나를 세울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자신에게 가장 소중한 가족에게 함부로 대하고 어쩌다 마주치는, 서로 책임도 의무도 없는 사람들에게 잘 보이려고 하는 중에 그런 관계 역전이 일어나는 것이다.
그런 아버지는 바깥에서 페르소나를 사용하는데 많은 에너지를 사용하게 된다.
그러다가 집으로 돌아오면 가족관계에서는 더 이상 페르소나라고 하는 방어기제를 사용할 필요가 없어진다.
그래서 아버지는 집에만 들어오면 자기 인격의 본래적 상태를 방어 없이 그대로 노출하면서 그렇게 역할이 뒤바뀐 행동을 하게 된다.
외식하는 바리새인들은 역시 그랬다.
그들에게는 겉으로 드러나는 모습이 항상 중요했다.
겉모습이 중요했기에 자기중심, 심혼(영혼)으로 들어가지 못함의 문제를 가지고 있었다.
바리새인들은 <자기의>라는 페르소나에 묶여 하나님 중심으로 들어가지 못한다.
인생을 살아가면서 바리새인처럼 자기중심으로 들어가지 못하는 삶을 사는 것은 대단히 불행한 일이다.
프란츠 카프카의 소설 “성(Castle)"을 보면, 건축기사 K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K는 성의 요청으로 방문을 하게 된다.
그런데 소설의 시작부터 끝나기까지 주인공은 자신을 요청한 사람을 찾지 못해서 성 아래에 있는 사람들을 만나면서 온갖 욕망을 가진 사람들을 만나면서 함께 그 욕망에 연루되어 가면서 자신의 궁극적인 목표에 대한 의식이 갈수록 분명해지지 못하고 끝없이 맴도는 모습을 보여준다.
카프카는 이것이 바로 인생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듯하다.
사람이 자기(Self)의 중심으로 들어가지 못하면, 세상의 온갖 욕망과 접촉하면서 헤어나지 못하고, 욕망의 원리에 사로잡혀서 갖가지 일들이 일어나는 것이다.
자신의 내면세계로 들어가지 못하고 페르소나에 묶여 있는 한, 그는 자기의 중심으로 결코 진입해 들어갈 수 없다.
사람은 스스로 욕망으로 살아가면서 그 가운데서 희로애락을 다 느끼는 삶을 자신의 인생의 전부라고 여기며, 그 정도에서 자신의 인생을 행복하다고 여길 수도 있다.
<성>을 통해서 카프카가 제시하고자 하는 의도는, 일반적으로 자기 욕망과 세상의 원리에 사로 잡혀서 살아가면서, 부와 명예와 권력을 얻어 감으로써 나름대로 자아실현을 하고 있다고 만족하고 있는 상태 자체가, 실존적으로 얼마나 불행한 일인가를 암시하는 데에 있다.
사람들은 이런 질문을 하면서 산다.
'내가 왜 이런 일들을 당해야만 하는가?'
'내 인생에는 왜 이렇게도 환난이 많은가?'
'도대체 하나님은 뭐 하시는 분이시길래, 내 기도도 들어주시지 않는가?'
'현재 상태에서의 하나님의 응답은 무엇인가?'
이런 질문이 내 인생 가운데 끊임없이 생겨나고 있다면, 그것은 자신이 자기의 중심을 잃어버린 삶을 살고 있다는 증거가 될 것이다.
위의 그림에서 볼 수 있듯이, 자기를 잃어버린 사람들이 자기(Self)와 가장 멀리 있는 곳이 바로 페르소나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