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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상담사례

심장이 먼저 말을 걸어온다

이인증과 몸의 기초적 이미지


가끔 상담실에서 만나는 사람들 중에는, 마음보다 몸이 먼저 아우성치는 내담자들이 있다. 오늘 상담을 청한 40대 여성 내담자가 바로 그랬다. 외관상으로 조용하고 침착해 보이는데, 막상 그녀의 몸은 자주 중대한 신호를 보낸다. 항상 그런 것은 아니지만, 어느 순간 심장이 이유 없이 뛰고, 목이 조여들고, 머리가 지끈거리고, 내담자가 한의원에 갔을 때는 '기운이 바닥났다'는 진단을 듣는다.


정작 본인은 이유를 잘 모른다.


“긴장하는 상황도 아닌데 갑자기 심장이 두근거려요.”

“몸이 따로 움직이는 느낌이에요.”

“머리는 괜찮다고 하는데, 몸은 아니라고 말해요.”


이런 호소를 들을 때, 나는 종종 마음속에서 조용히 한 단어를 떠올린다.


이인증


몸과 마음이 연결되지 못하고 서로 다른 속도로 움직일 때,

사람은 마치 자신이 자신이 아닌 것 같은 낯섦을 경험한다.

지성은 성인의 자리에서 살아가고 있지만, 정서는 유아기 어딘가에서 멈춰 있는 것 같은 느낌.

그 괴리는 종종 “심장”에서부터 신호를 보내기 시작한다. 이인증 환자는 지성의 나이와 정서적 나이의 차이에서 오는 고통을 몸서리쳐하는 사람이다.



생각은 앞서가는데 마음은 따라오지 않을 때


내담자는 겉으로 보기엔 매우 건실한 사람이다. 사회적 성취도도 높고, 성실하며, 자기 삶에 책임을 다하려 노력한다. 그런데 어느 날부터인가 몸이 급격하게 힘들어졌다.


이제 과거를 핑계로 살고 싶지 않아요. 과거 그만 보고 싶어요.”


그녀는 상담에서 자주 이렇게 말했다.


그러나 몸은 전혀 다른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어딘가에서 갑자기 심장이 요동치고, 머리가 지끈거리고, 상담만 끝나면 두통이 시작되었다. 이유 없는 피로가 밀려오고, 작은 일에도 에너지가 바닥나는 느낌이 들었다.


생각은 앞으로 가려고 하는데, 마음이 따라오지 못하고 있다. 이 괴리는 누군가에게는 ‘게으름’처럼 보일지도 모르지만, 사실은 더 깊은 곳에서 시작된 문제다.


이런 괴리가 깊어지면 삶이 어딘가 ‘낯설게’ 느껴진다. 몸과 정서가 현실에 뿌리내리지 못하면서 나타나는 현상, 우리는 그것을 이인증이라고 부른다.


이인증은 정신이 나간 상태가 아니다. 정신이 오히려 너무 깨어 있어서, 몸과 감정을 지켜보는 하나의 관찰자가 되어버린 상태에 가깝다. 이인증이란 문자 그대로 de-personalization이다. 도널드 위니캇(Donald Winnicott, 영국의 정신분석학자) 정신과 신체가 결합될 때 인격화(personalization)가 일어난다고 볼 때, 이인증은 바로 그 반대현상으로 일어난다.

내담자의 말처럼 “머리는 괜찮다고 하는데 몸이 아니라고 말하는” 그런 상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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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이 말하는 기초적 언어는 ‘심장’이다


그녀가 상담에서 가장 자주 호소한 증상은 심장의 문제였다.

심장이 꽉 조여들고, 두근거리고, 이유도 없이 불편해졌다.


나는 그 이야기를 들을 때, 프랑스 정신분석가 프랑수아즈 돌토의 개념을 떠올렸다.

돌토는 인간의 몸을 단순한 신체가 아니라 “존재의 기초 이미지를 가진다”라고 말했다.

주로 심장, 폐, 간, 비장, 신장처럼 생명과 직결된 기관들은 태아기부터 강력한 정서적 흔적을 저장한다고 보았다.


내담자의 심장이 보낸 신호는 단순한 스트레스 반응이 아니었다. 그녀의 표현을 빌리면 “몸의 주파수와 심장의 주파수가 서로 다르게 움직이는 느낌”이었다. 어느 순간 심장이 뛰는 것이 갑자기 느껴지는 순간은 몸의 시간흐름과 심장의 시간흐름이 달라지는 순간이다.

나의 예전 이인증 환자 중에는 취미 삼아 자전거 타기를 하는 중에 몸과 자전거는 앞으로 가고 있는데, 정신이 분리되어 뒤따라 오는 것이 느껴져 속도를 늦춰야 했다. 나중에는 자전거에서 내려 자전거를 끌고, 갔던 길을 되돌아와야 했다.


어떤 사람의 심장은 그 사람이 과거에 한 번도 다루지 못했던 정서적 상처를 기억하고 있다. 그 상처는 시간이 지난다고 저절로 사라지지 않는다.

언젠가 반드시 “통합하라”라고 외친다. 심장은 그녀에게 이렇게 말하고 있었던 것이다.


나를 밀어내지 말고, 내 이야기를 들어줘.”


상실이 한꺼번에 몰려올 때, 어린 시절의 상처가 깨어난다


내담자는 최근 몇 년 사이 큰 상실을 연달아 경험했다. 아버지의 급작스러운 죽음, 시동생의 극단적 선택, 가까운 가족들의 갑작스러운 부재.


그녀는 이 상실들을 빠르게 '이해'하려 했다.


“그럴 수 있는 상황이었고, 나는 괜찮아요.”

“지금은 과거를 인정하고 받아들이고 싶어요.”


하지만 그녀의 몸은 괜찮지 않았다.

머리가 소화해 내는 이해의 방식보다 훨씬 빠르게, 충격을 온몸으로 받아냈다.


이런 일이 반복되면 오래된 감정들이 자동으로 깨어난다. 특히 어린 시절에 해결되지 않은 감정들, 엄마와의 관계에서 제대로 말할 수 없었던 무력감, 분리불안, 미묘한 외로움 같은 것들.


어떤 사람에게는 이런 감정들이 눈물로 나오고, 어떤 사람에게는 부정(否定)으로 나오고, 어떤 사람에게는 화로 나오지만, 나의 내담자에게는 심장이 알람을 울리는 형태로 나타났다.


심장은 감정을 쌓아둘 그릇이 못된다. 심장에 담긴 감정은 반드시 터져 나온다. 이 두근거림과 조임은 결국 유아기부터 눌러왔던 감정들이 “이제는 봐 달라”라고 요구하는 몸의 신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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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어기제가 무너질 때 비로소 ‘진짜 나’를 만난다


내담자는 자신이 현재 사용하는 감정적 방어기제가 무엇인지 아주 정확하게 알고 있었다.

그녀는 힘들 때마다 모든 감정을 '생각으로' 처리했다. 슬픔도 분석하고, 분노도 해석하고, 불안도 지성적으로 설명했다.


이 방식을 심리학에서는 '주지화'라고 부른다. 말 그대로 감정 대신 ‘지식’을 앞세우는 방식이다.


주지화는 단기적으로는 아주 도움이 된다. 문제를 객관적으로 보고, 감정적 혼란을 줄여 준다. 전문직 종사자나 고학력자의 강점이 되기도 한다. 그러나 너무 오래 사용하면, 사람은 현실의 감정을 “살아내지 못한 채” 설명만 하게 된다. 감정은 현실에서 사라지는 게 아니라, 몸으로 내려간다.


이제 그녀의 몸은 더 이상 설명을 허락하지 않았다. 그녀의 심장은 “이제 설명 말고 느껴 달라”라고 요구하고 있었다.


이 시점에서 상담은 주지화를 해체하고, 내담자가 '여기-지금'에서 자신의 감정을 온전히 경험하도록 돕는 방향으로 움직였다.


그녀는 평생 감정을 느끼지 않음으로써 버텨 온 사람이었을 것이다. 주지화를 생존 전략으로 개발해 냈을 것이다. 감정을 느끼는 것은 바로 그 생존 전략을 내려놓는 일이었다.


그러나 통합은 그렇게 시작된다. 감정을 피하지 않고 마주할 때, 사람은 비로소 자기 자신을 만나게 된다.


여성성의 회복: 관계에서의 모성성을 내려놓다


많은 여성들이 모든(?) 관계에서 ‘엄마 역할’을 하는 데 주저하지 않는다. 남편을 보살피고, 이해하고, 달래주고, 조율한다. 여성들은 그것이 바로 '여성성'이라고 생각한다. 나의 내담자도 그랬다. 남편을 이해해 주는 것도 자신의 책임이라고 믿었다.


하지만 상담 과정에서 그녀는 중요한 사실을 깨달았다. 그는 남편의 ‘엄마’가 되어 있었고, 그 과정에서 귀한 자신의 여성성을 잃어버리고 있었다.


나는 상담실에서 조심스럽게 말했다.


“남편을 이해하려고 애쓰는 마음을 내려놓아도 괜찮습니다.”

“지금 필요하신 건 ‘모성성’이 아니라 ‘여성성’입니다.”


여성성이라는 단어는 오해를 사기 쉽지만, 여기서의 여성성은 섹슈얼리티가 아니라 존재 그 자체를 존중하는 힘이다. 약해도 괜찮고, 무너져도 괜찮고, 쉬어도 괜찮고, 도움을 받아도 괜찮은 상태. 내담자는 그동안 너무 단단한 역할만 해 왔다. 그래서 남편과의 관계도, 삶도, 심장도 모두 지쳐 있었다.


여성성을 회복하는 과정은

‘내가 더 이상 누군가를 이해해 줘야 하는 사람’이 아니라

‘그냥 나로서 존재할 수 있는 사람’으로 돌아가는 과정이었다.


분리와 통합: 모든 문제는 결국 한 지점으로 모인다


상담의 핵심은 결국 하나의 주제로 귀결되었다.


분리되지 못한 존재를 어떻게 통합할 것인가.


내담자의 과거, 상실, 분노, 심장의 신호, 주지화, 관계의 피로, 그리고 가족관계에 드리운 죽음의 그림자.

이 모든 요소는 서로 다른 문제처럼 보였지만, 한 줄로 이어져 있었다. 분석가의 입장에서 볼. ㅐ, 그 줄은 아주 오래전, 엄마와의 관계에서 생긴 작은 균열에서 시작되었다.


아이가 엄마에게서 정서적으로 분리되지 못하면 어른이 되어서도 내면의 정서와 몸이 통합되지 못한다.

상실이 닥치면 더 흔들리고, 감정은 몸으로 내려가고, 심장은 빨리 뛰면서 “나 여기 있다”라고 소리친다.


하지만 통합은 가능하다. 천천히, 몸이 보내는 신호를 하나씩 읽어 가면 된다. 심장이 말하는 언어를 억누르지 않고, 머리보다 몸의 속도에 맞춰 걸어가면 된다.


새로운 삶을 향해


상담 세션 마지막쯤, 그녀는 조용히 이런 말을 했다.


“이제는 조금 알 것 같아요. 몸이 왜 이렇게 소리를 질렀는지.”


나는 그 말을 듣는 순간, 상담자로서 깊은 안도감을 느꼈다. 왜냐하면 이 말은 ‘이해’의 말이 아니라, ‘느낌’의 말이었기 때문이다.


몸과 마음의 통합은 이렇게 시작된다.


설명이 아니라 느낌에서.

머리가 아니라 몸에서.

과거가 아니라 현재에서.


그녀는 언젠가 더 이상 자기 몸을 억누르지 않게 되는 시점이 올 것이다. 심장이 빨리 뛰면 잠시 멈춰 서서,

'무슨 이야기하고 싶은 거야?' 하고 묻는다. 그때 심장은 침묵하는 경우도 있지만, 답변을 하기도 한다.


그리고 그 순간, 몸과 마음은 아주 조금씩, 오랜 이별을 끝내고 다시 하나가 되기 시작하는 것이다.


마무리


이 글을 읽는 당신도 혹시 생각은 괜찮다고 하는데, 몸은 여전히 괜찮지 않다고 말하고 있지 않은가.

당신의 몸은 어느 부분이 당신에게 말(통증)을 걸어오는가?


그렇다면 당신도 통합의 문 앞에 서 있는 것이다.


몸이 먼저 말할 때가 있다.

괜찮지 않다고, 힘들다고, 이제는 멈춰 달라고.


그 목소리를 억누르지 말고

조금만 귀 기울여 보자.


그곳에

당신이 오랫동안 잃어버린 ‘나’가 기다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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