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매환자가 내려가는 깊은 내면의 세계, 유아기 엄마 품

유아기로 내려가는 정신, 그리고 동일성을 향한 마지막 여정

치매라는 이름의 귀환


치매 환자를 곁에서 오래 지켜본 정신과 의사들의 공통된 증언이 있다. 치매가 깊어질수록 최근의 일은 빠르게 사라지고, 오히려 오래된 기억일수록 놀라울 만큼 생생하게 떠오른다는 것이다. 어제의 일은 잊어버리면서도 수십 년 전의 집 구조를 정확히 기억하고, 이미 세상을 떠난 부모의 목소리를 또렷하게 떠올리며, 젊은 시절의 감정 상태로 되돌아간다. 이는 단순한 기억 손상의 문제가 아니다. 시간의 방향 자체가 뒤집히는 현상에 가깝다.

지금까지 치매는 주로 ‘상실’의 언어로 설명되어 왔다. 기억의 상실, 판단력의 상실, 자율성의 상실. 그러나 이 현상을 다른 각도에서 바라보면 전혀 다른 풍경이 드러난다. 치매는 단순히 사라지는 과정이 아니라, 되돌아가는 과정이다. 더 정확히 말하면, 인간 정신이 가장 깊이 각인된 시간, 가장 원초적인 세계로 내려가는 움직임이다.



꿈의 세계에 머무는 정신


융은 망상을 ‘수정되지 않은 꿈이 의식을 점령한 상태’로 설명했다. 정상적인 경우, 인간은 꿈을 꾸되 깨어나면 그것을 현실과 구분할 수 있다. “꿈일 뿐이다”라는 문장이 작동할 때, 의식은 현재에 머문다. 그러나 꿈이 지나치게 활발해지고 그것을 수정·통합하는 능력이 약해지면, 꿈은 더 이상 밤에만 머물지 않는다. 꿈의 이미지가 낮의 의식을 침범하고, 현실과 구분되지 않으며, 망상으로 굳어진다.


치매 역시 이 구조와 닮아 있다. 수면의 질이 무너지고 깊은 수면과 렘수면이 부족해질수록, 뇌는 기억과 감정을 정리하지 못한 채 깨어 있게 된다. 정리되지 않은 기억은 현재를 침범하고, 과거는 현재 위에 겹쳐진다. 치매 환자가 과거에 머문다는 표현은 은유가 아니라, 실제 정신 구조의 변화다. 그는 더 이상 ‘지금-여기’의 시간에 완전히 발을 디디고 있지 않다. 꿈의 세계, 더 정확히 말하면 유아기의 세계로 내려가 있다.


유아기의 세계로의 하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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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아기의 세계는 꿈과 닮아 있다. 시간의 경계가 느슨하고, 상징과 현실의 구분이 분명하지 않으며, 가장 중요한 기준은 ‘안전’과 ‘돌봄’이다. 유아에게 세계는 이해의 대상이 아니라 감각과 관계의 장이다. 그 세계의 중심에는 언제나 보호자, 특히 엄마의 품이 있다.


이 관점에서 치매는 단순한 퇴행이 아니라, 유아기에 충분히 누리지 못했던 가장 근원적인 돌봄을 찾으러 가는 여정으로 해석될 수 있다. 인생에서 가장 연약했어야 할 시기에 가장 귀한 보호를 받지 못한 사람은, 그 결핍을 완전히 소화하지 못한 채 살아간다. 그리고 생의 마지막에 이르러, 현실에서 쌓아 올린 모든 것을 내려놓고 그 잃어버린 시간을 찾으러 떠난다.

99마리의 양을 두고 떠나는 목자


이 지점에서 복음서의 비유가 떠오른다. 잃은 양 한 마리를 찾기 위해 아흔아홉 마리의 양을 들판에 남겨두고 떠나는 목자의 이야기다. 잃은 양 한 마리가 늑대의 밥이 될지도 모른다는 우려로 99마리의 양을 언제든 늑대가 출몰할 수 있는 들판에 내버려 두고 떠난다는 것은 근대적 합리성의 기준에서 보면 이 판단은 명백히 비현실적이다. 위험하고 비효율적인 선택이다. 그러나 이 비유가 말하는 것은 효율이 아니라 가치다.


치매 환자 역시 비슷한 선택을 한다. 오랜 세월 현실에서 쌓아온 거의 모든 것을 내려놓는다. 관계, 사회적 역할, 경제적 능력, 기술과 지식, 성취와 명예. 이것들이 바로 99마리의 양이다. 인간은 평생 이 99마리를 지키기 위해 애쓴다. 그러나 치매는 이 모든 것을 놓아버리고 단 하나를 향해 움직인다. 잃어버린 한 마리의 양, 곧 유아기의 자기다. 충분히 품어지지 못했던 자기, 보호받지 못했던 자기, 안전하지 않았던 자기다.


치매환자는 치매가 발생하기 전까지 성취해 온 현실의 성과들을 다 놓고 유아기로 내려가는 여정을 떠나는 것이다. 이 여정은 합리적이지 않다. 그러나 인간의 정신은 언제나 합리성만으로 움직이지 않는다. 오히려 가장 중요한 순간에 인간은 비합리적인 선택을 통해 가장 근원적인 것을 회복하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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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일성을 향한 마지막 선택


여기서 프랑스 철학자 폴 리쾨르(Paul Ricoeur)의 Self 개념은 중요한 통찰을 제공한다. 리쾨르는 인간의 정체성(Self)을 ‘자기성(selfhood)’과 ‘동일성(identity)’ 두 측면으로 구분했다. 사람은 생애 첫 1년을 엄마의 품에서 살면서 동일성을 획득한다. 동일성은 '내가 있다'(I am)의 상태를 성취한다. 이때 확보한 동일성은 시간의 변화 속에서도 변치 않고 일평생 유지된다. 자기성은 시간의 변화 속에서 여러 모양으로 경험하는 자아를 말한다. 삶의 맥락 속에서 형성되는 수많은 역할을 하는 자아다. 자기성은 '나는 ~이다'(I am A)에 해당한다. 신분, 직업, 관계, 성취, 사회적 위치가 여기에 속한다('나는 학생이다', '나는 소년이다', '나는 회사원이다' 등). 반면 “나는 나다(I am)”라는 동일성은 근원적 자기 인식이다. 이는 변하지 않는다. 생애의 변화 속에서도, 심지어 기억이 사라져도 동일성은 남는다.


치매에서 무너지는 것은 자기성이다. 이름, 관계, 역할, 사회적 맥락이 사라진다. 그러나 치매 환자는 동일성을 포기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것을 지키기 위해 자기성을 내려놓는다. 치매는 모든 것을 잃는 병이 아니라, 자기성을 희생해서라도 동일성을 붙들려는 마지막 시도로 볼 수 있다.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 앞에서 인간은 끝내 “나는 이것을 해 온 사람이다”라는 답을 버리고, “나는 존재한다”라는 답으로 돌아간다. 동일성은 영원불변하기 때문에 소중하다. 신학적 언어로 말하면, 그것(I am)은 인간 내면에 각인된 신적 속성을 가진다. 그것은 생명이 끊어져도 사라지지 않는 자리다.


왜 가족조차 잊어버리는가


이 관점에서 보면, 치매 환자가 가족을 잊어버리는 이유 역시 다르게 해석된다. 그것은 사랑의 상실이 아니다. 오히려 관계라는 자기성의 요소를 내려놓는 과정이다. 관계는 역할과 맥락 위에 세워진다. 엄마, 아내, 아버지, 자식이라는 이름은 모두 자기성의 언어다. 동일성을 지키기 위해 치매 환자는 이 이름들을 하나씩 내려놓는다.

그는 더 이상 ‘누구의 누구’로 존재하지 않는다. 그저 ‘존재하는 나’로 돌아간다. 그래서 엄마를 찾고, 유년기의 집을 찾고, 가장 오래된 감정의 장소로 향한다. 이는 상실이 아니라 귀환에 가깝다. 존재의 근원적 자리로 내려가는 것이다.


치매를 대하는 태도의 전환


이러한 시각에서 보면, 치매는 단순히 치료의 대상이 아니라 해석의 대상이 된다. 물론 의학적 개입과 돌봄은 필수적이다. 그러나 그 곁에서 물어야 할 질문이 있다. 이 사람은 무엇을 찾으러 가고 있는가. 무엇을 포기해서라도 붙들고 싶은 것은 무엇인가.

치매 환자를 돌보는 가족에게 이 관점은 위로이자 요청이 된다. 그들이 마주하고 있는 것은 단순한 붕괴가 아니라, 마지막으로 가장 소중한 것을 향해 가는 여정일 수 있다. 이 여정을 억지로 끌어내리기보다, 가능한 한 안전하게 품어주는 것이 필요하다. 유아기의 세계로 내려가는 이를 유아에게 하듯 대하는 태도, 그것이 하나의 응답이 된다. 유아기에 잃어버린 엄마의 품을 찾으러 내려간 것임을 기억해야 한다.


마무리


치매는 죽음의 전조라기보다 삶의 가장 깊은 층위로 내려가는 과정일 수 있다. 인간은 마지막에 가장 근원적인 질문으로 돌아간다. “나는 누구인가.” 그리고 그 질문에 말이 아닌 존재로 답하려 한다. 이 침묵의 여정을 두려움만으로 바라볼 필요는 없다.


치매는 인간이 자기 자신에게 돌아가는 마지막 방식일지도 모른다. 꿈의 세계를 지나, 유아기의 품을 향해, 동일성을 향해. 그것은 상실이 아니라, 귀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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