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성들의 가부장적 분열을 찬탈한 여자

분석의 범주에서 벗어난 여성을 분석하다(3)

(앞의 글: 1. 새로운 여성의 등장, 주인도덕 갖춘 남근적 여성

2. 현대판 황진이 : 사랑받기 거부, 남자에게 군림하기)


자유가 아니라 가부장적 구조의 그림자


그녀에 대한 이야기를 들으며 가장 먼저 떠오른 것은 ‘자유’라는 단어가 아니었다. 누군가의 시선에서 벗어나 마음껏 욕망을 선택하고 관계를 재배치하는 삶, 겉으로 보기에 그것은 분명 해방처럼 보일 수 있다. 그러나 조금 더 깊이 들여다보면, 그 삶은 자유라기보다 오래된 구조의 그림자에 가깝다. 남성 권력이 수백 년에 걸쳐 만들어 온 분열의 기술을 완벽히 학습하고, 그것을 거의 흠잡을 데 없이 수행하는 한 인물의 초상이 떠오른다.


그녀는 전통적인 가부장제 사회에서 남성들이 누려왔던 삶의 방식을 거의 그대로 재현하고 있다. 가정과 사회적 안정, 책임과 체면의 영역은 단단히 유지한 채, 욕망과 감정, 쾌락의 영역을 별도로 분리해 운영하는 방식이다. 달라진 것은 단 하나, 그 주체가 남성에서 여성으로 바뀌었다는 점뿐이다. 구조는 그대로이고, 권력의 문법도 변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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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여성이 보여주는 삶의 방식은 정확히 전통적인 가부장제 사회에서 남성들이 누려온 분열적 권력 구조’를 그대로 미러링(Mirroring) 하고 있다. 남성들이 오랫동안 사용해 온 전략—자아를 통합하지 않고 분할함으로써 모든 것을 소유하려는 방식—을 그녀는 놀라울 만큼 정교하게 재현한다. 가정은 유지되고, 사회적 평판은 관리되며, 동시에 개인적 욕망은 다른 공간에서 소비된다. 이 모든 것이 서로 침범하지 않도록 철저히 분리된다.


중요한 것은 이 분열이 혼란이 아니라 기술이라는 점이다. 감정과 책임, 욕망과 윤리를 하나의 인격 안에서 통합하는 대신, 그것들을 서로 다른 방에 배치함으로써 죄책감과 갈등을 최소화하는 방식. 그녀의 삶에는 흔들림이 적다. 그것은 도덕적으로 옳아서가 아니라, 구조적으로 안정적이기 때문이다. 이미 검증된 권력의 구조를 그대로 가져와 자신에게 맞게 적용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녀에게서는 방황하는 자유인의 불안 대신, 냉정하고 계산된 안정감이 느껴진다. 이 안정감이야말로 주변 사람들을 압도하는 힘의 정체다. 그것은 새로운 삶의 가능성이라기보다, 오래된 권력이 다른 얼굴로 다시 등장한 장면이다. 자유처럼 보이지만, 실은 자유의 언어를 빌린 구조의 반복. 그녀는 구조를 부수지 않았다. 구조 속으로 들어가 그것을 자신의 것으로 만들었을 뿐이다.


남성 권력이 발명한 분열의 기술, 그리고 그것을 떠받친 두 개의 DNA


조선시대 사대부 남성들의 삶은 하나의 인격으로 통합되어 있지 않았다. 그들의 삶은 철저히 분할되어 있었다. 가문을 잇고 사회적 위신을 관리하는 영역에는 ‘부인’이 있었고, 욕망과 감정, 유희의 영역에는 ‘기생’이 존재했다. 이 두 세계는 서로 만나지 않아야 할 공간으로 설정되었고, 남성은 그 사이를 자유롭게 오가며 두 영역을 모두 소유했다. 남성의 분열은 한 가정에 부인과 첩이라는 제도로 공존하는 형태를 취했다. 부인과 첩은 한 남편을 사이에 두고도 같은 세계에 살지 않았다. 그들은 의도적으로 비켜 선 존재들이었고, 바로 그 거리와 분리가 갈등 없는 공존이라는 기이한 평화를 가능하게 했다. 이 평화는 관계의 성숙이 아니라, 분열이 만들어낸 질서였다.

이 분리는 단순한 관습이나 우연한 문화가 아니었다. 그것은 전략이었고, 기술이었다. 인간으로서의 욕망과 사회적 의무를 하나의 인격 안에서 조율하고 통합하는 대신, 남성들은 자아를 관계와 공간으로 쪼개어 관리했다. 책임은 ‘부인’의 세계에 남겨두고, 쾌락은 ‘기생’의 세계에서 소비함으로써 죄책감 없이 모든 것을 가질 수 있었던 것이다. 이것이 바로 남성 권력이 발명한 분열적 권력 구조다.

중요한 점은 이 구조가 개인 몇 명의 일탈이 아니라, 하나의 사회적 합의된 시스템이었다는 사실이다. 남성은 분열할 권리를 부여받았고, 그 분열은 오히려 남성다움, 능력, 사회적 성공의 증거로 승인되었다. 가정에서의 책임과 외부에서의 욕망은 서로 다른 인격의 몫이 되었고, 그 사이의 균열은 문제로 취급되지 않았다.

그리고 이 구조는 사라지지 않았다. 형태만 바뀌었을 뿐이다. 오늘날의 한국 남성들 역시 이 분열의 DNA를 상당 부분 이어받아 살아가고 있다. 한편으로는 성실한 가장, 책임 있는 직장인, 도덕적인 시민의 얼굴을 유지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감정적 공백과 욕망의 영역을 별도의 공간에 격리시키는 방식이다. 과거의 ‘기생’은 사라졌지만, 그 자리를 채운 것은 술자리 문화, 외부 관계, 디지털 공간, 혹은 정서적 단절이다.

그러나 이 구조가 유지될 수 있었던 이유는 남성의 DNA만으로는 설명되지 않는다. 여기에 반드시 함께 언급되어야 할 또 하나의 축이 있다. 바로 이 분열을 감내하고 떠받쳐 온 여성들의 DNA다. 부인의 자리에 있었던 여성들은 남성의 분열을 모른 척하거나, 알면서도 보지 않기로 선택해야 했다. 가정을 지키는 역할, 침묵하는 역할, 이해하는 역할은 여성성의 미덕으로 미화되었다.

이것은 여성의 약함 때문이 아니라, 생존의 방식이었다. 분열된 구조 안에서 여성은 통합을 담당하는 존재였다. 남성이 쪼개 놓은 삶의 파편들을 묵묵히 감당하며, 전체가 무너지지 않도록 붙들고 있는 역할. 그렇게 한국 사회는 오랫동안 남성의 분열과 여성의 인내가 맞물린 구조 위에서 유지되어 왔다. 남성 권력이 발명한 분열의 기술은 이제 성별을 바꿔 다른 몸에 이식될 뿐, 구조 자체는 여전히 작동하고 있다.

이 지점에서 질문은 더욱 깊어진다. 우리는 과연 이 분열의 기술을 넘어서고 있는가, 아니면 그 기술을 더 세련되게 반복하고 있는가. 그리고 이 오래된 DNA를 끊어내는 일은 가능한가. 그것은 개인의 선택을 넘어, 한국 사회가 감당해야 할 가장 근본적인 과제일지도 모른다.


성별만 바뀐 동일한 배치

이 여성은 그 구조를 직관적으로 가 아니라, 거의 본능에 가깝게 꿰뚫고 있었다. 그녀에게 남편은 사랑의 대상이기보다는 삶을 지탱하는 안정된 토대에 가깝다. 가정을 유지하고, 경제적 기반을 제공하며, 사회적으로 ‘정상 가족’이라는 외피를 유지해 주는 존재로 정확히 위치 지어진다. 남편은 교체 불가능한 제도적 기둥처럼 자리하고 있고, 감정의 진폭이나 욕망의 충돌은 그 역할에 포함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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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면, 밖의 남자들은 전혀 다른 자리에 놓인다. 그들은 철저히 욕망의 대상이며, 풍류의 상대이고, 일상에 균열을 내는 감정적 자극을 제공하는 객체다. 이 관계들에는 미래에 대한 약속도, 윤리적 책임도, 구원의 서사도 개입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러한 요소들은 의도적으로 배제된다. 관계는 깊어지지 않도록 관리되고, 감정은 흘러가되 축적되지 않도록 통제된다.

이 배치에서 중요한 것은 감정의 진실성이 아니라 기능의 명확함이다. 누가 무엇을 담당하는지가 분명할수록 관계는 안정된다. 사랑, 성, 책임, 일상은 서로 다른 사람에게 분산되고, 하나의 관계가 모든 것을 감당해야 할 필요는 사라진다. 이것은 감정의 자유라기보다 관계의 효율화에 가깝다.

결국 그녀의 삶에는 낭만도, 희생도 없다. 대신 정확한 분업과 냉정한 거리 조절이 존재한다. 이 배치는 과거 남성 권력이 구축해 온 구조와 거의 완벽하게 겹친다. 다만 이번에는 남성이 아니라 여성이 그 배치를 설계하고, 관리하고, 통제하고 있을 뿐이다.



“성(性)과 인격은 별개다”라는 오래된 언어


과거 남성들이 “성(性)과 인격은 별개”라고 말하며 자신의 이중생활을 정당화했듯, 그녀 역시 동일한 논리를 사용한다. 자신의 관계 확장은 어머니로서의 책임감이나 사회적 성실성과 충돌하지 않는다는 확신, 혹은 선언이다. 이 말은 겉으로 보기에는 성숙한 자기 구분처럼 들리지만, 실은 오랫동안 남성 권력이 사용해 온 분열의 언어를 그대로 차용한 것이다. 이 선언은 윤리적 논증이라기보다 권력의 언어에 가깝다. “나는 그렇게 산다.” 이 문장 안에는 설명도, 변명도 없다. 오직 스스로를 입법자로 세우는 태도만이 남아 있다.


이 언어가 얼마나 오래되고 사회적으로 승인되어 왔는지는 개인의 기억 속에서도 쉽게 확인된다. 40여 년 전, 직장생활을 막 시작했을 무렵만 해도 40대 남성들은 대부분 중간관리자였고, 그들 중 적지 않은 이들이 외도를 하고 있다는 사실은 공공연한 비밀처럼 회자되곤 했다.

그때 한 직속 상사는 이렇게 말했다. “한국 사회에서는 성과 인격을 별개의 것으로 봐야 해.” 놀랍게도 그 말은 당시에는 큰 저항 없이 통용되었다. 업무 능력과 성적 일탈은 서로 침범하지 않는 영역으로 분리되었고, 그 분리는 조직의 안정을 위해 오히려 필요한 것으로 여겨졌다.

그러나 그 말이 가능했던 시대는 지나갔다. 최근 고은 시인의 사건을 통해 한국 사회는 중요한 전환점을 확인했다. 더 이상 창작과 인격, 성취와 윤리를 분리해 면죄부를 주지 않겠다는 집단적 선언이었다. 이는 단지 한 개인의 추락이 아니라, “성(性)과 인격은 별개”라는 오래된 분열의 언어가 사회적 효력을 상실했음을 보여주는 사건이었다.

그럼에도 이 언어는 여전히 다른 모습으로 살아남아 있다. 이제 그것은 남성의 입이 아니라, 어떤 여성의 입을 통해 발화된다. 그녀는 말한다. 자신의 관계 방식은 자신의 삶의 다른 영역과 충돌하지 않는다고. 좋은 어머니이고, 사회적으로 성실하며, 자신의 역할을 다하고 있기 때문에 욕망의 확장은 문제 되지 않는다고. 이 논리는 과거 남성들의 자기 합리화와 놀라울 만큼 닮아 있다.

문제는 그 말의 진위가 아니라, 그 말이 작동하는 구조다. 이 언어는 관계를 통합하지 않고 분리함으로써, 책임과 감정을 서로 다른 칸에 배치한다. 그리고 그 분리는 자유의 이름으로 포장된다. 하지만 그 자유는 통합의 결과가 아니라, 분열의 기술 위에서 성립한 자유다. 과거에는 남성의 특권이었던 이 언어가, 이제는 성별을 바꿔 반복되고 있다는 사실이야말로, 이 장면이 주는 가장 불편한 통찰일 것이다.

과거 남성들이 “성(性)과 인격은 별개”라고 말하며 자신의 이중생활을 정당화했듯, 그녀 역시 동일한 논리를 사용한다. 자신의 관계 확장은 어머니로서의 책임감이나 사회적 성실성과 충돌하지 않는다는 확신, 혹은 선언. 이 선언은 윤리적 논증이라기보다 권력의 언어에 가깝다. “나는 그렇게 산다.” 이 문장 안에는 설명도, 변명도 없다.


마무리: 자유의 언어를 쓴 구조의 반복


이 여성의 삶을 따라가다 보면, 그것이 과연 자유라고 부를 수 있는지 질문하지 않을 수 없다. 겉으로 보기에 그녀는 누구의 시선에도 얽매이지 않고 욕망을 선택하고 관계를 재배치한다. 그러나 그 선택의 방식은 놀라울 만큼 익숙하다. 그것은 남성 권력이 오랫동안 사용해 온 분열의 기술을 성별만 바꿔 수행하는 장면에 가깝다.

그녀는 가정과 사회적 안정, 책임과 체면의 영역을 단단히 유지한다. 그 토대 위에서 욕망과 감정은 다른 공간으로 분리되어 관리된다. 이 구조는 새로운 것이 아니다. 가부장제 사회에서 남성들이 삶을 유지해 온 방식 그대로다. 달라진 것은 오직 누가 그 구조를 운용하느냐뿐이다.

이 삶의 안정감은 도덕에서 오지 않는다. 이미 검증된 권력의 구조를 정확히 차용했기 때문에 가능해진 안정이다. 감정과 책임, 사랑과 욕망을 하나의 인격 안에서 통합하려는 시도 대신, 그것들을 분리함으로써 갈등과 죄책감을 최소화하는 방식. 그래서 그녀의 삶에는 방황이 적고, 계산된 냉정함이 자리한다.

문제는 바로 여기서 발생한다. 이것이 과연 해방인가, 아니면 구조의 완벽한 재현인가. 그녀는 기존의 질서를 부수지 않았다. 그 질서 속으로 들어가, 가장 능숙한 사용자로 자리 잡았을 뿐이다. 자유의 언어를 말하지만, 그 문법은 여전히 가부장적이다.

이 장면은 개인의 도덕을 묻기보다, 구조의 지속성을 드러낸다. 남성 권력이 발명한 분열의 기술은 사라지지 않았다. 그것은 성별을 바꿔 다른 몸에 이식되었을 뿐이다. 그리고 우리는 지금, 그 기술을 넘어서고 있는지, 아니면 더 세련되게 반복하고 있는지 스스로에게 묻게 된다.

이 질문 앞에서 중요한 것은 판단이 아니라 자각이다. 분열을 배워 살아남을 것인가, 아니면 통합이라는 더 불안한 길을 선택할 것인가. 이 오래된 구조를 끊어내는 일은 한 개인의 선택을 넘어, 우리 사회가 감당해야 할 가장 근본적인 과제로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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