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과 속의 씨는 셀 수 있지만 씨 속의 사과는 셀 수 없다.
한국에서 교사로 첫 해에 가르쳤던 아이들이 이제는 30대 중반을 넘어 40을 바라보는 나이가 되었을 것이다. 유난히도 활발한 학생들이 많았던 그 반 아이들은 스스로 연극을 만들어 공연을 하기도 했고, 그룹을 만들어 노래하고 춤을 추기도 했다. 나는 당시 인기가 많았던 아이돌 그룹의 이름을 빌려 그들에게 그룹 이름을 지어주기도 했다. 초임 교사였던 나는 아는 것도, 할 줄 아는 것도 많지 않았지만, 그저 아이들과 즐거운 시간을 많이 보내기 위해 노력했던 기억이 생생하다. 이 학생들이 자라서 무엇이 될지 항상 궁금했었다. 물론 여러 가지 문제를 일으키는 학생들도 몇 명 있었다. 그 아이들이 자라서 어떤 사람이 될지 걱정이 되기도 했다. 문제 행동을 보이는 아이들을 달래기도 하고, 타이르기도 하며 친구들과 잘 지내길 바랐지만, 학년이 바뀔 때까지 그런 문제들은 좀처럼 사라지지 않았다.
얼마 전, 미국에서 교사로 일하던 중 첫 해에 가르쳤던 학생 한 명을 우연히 마주쳤다. 나를 본 그 학생은 자신이 누군지 아냐고 물었지만, 나는 도무지 알아보지 못했다. 변명처럼 들릴 수 있지만, 지금의 그 아이 모습에서는 15년 전의 기억 속 아이의 모습을 전혀 떠올릴 수 없었다. 어색함을 참지 못한 듯, 그 학생은 곧 자기 이름을 말해주었고, 나는 그 순간, 오랜 기억 속에 묻혀 있던 여러 장면들이 빛의 속도로 스쳐 지나가는 것을 느꼈다. 사실, 그 아이에 대한 기억은 그리 좋지만은 않았다. 내 기억 속의 그 아이는 주어진 일을 제시간에 끝내지 못하곤 했고, 고집이 세서 규칙을 잘 따르지 않았으며 친구들과의 관계도 원만하지 않았다. 스페인어를 주로 쓰던 부모와의 소통도 원활하지 못했다. 당시 그 학생은 저학년이어서 큰 문제를 일으키는 건 아니었지만, 그래도 이 아이가 커서 어떻게 될까 가끔 걱정이 되곤 했었다.
그런데 이 아이가 현재 어떤 일을 하고 있는지를 듣고는 깜짝 놀랐다. 성인이 된 그는 인근 학교에 보조교사로 일하러 왔다고 했고, 앞으로 정식 교사가 되고 싶다고 말했다. 교직과정을 이수하기로 결정하기 전까지 여러 직업을 경험했지만, 어느 것 하나 자신과 맞지 않았다고 했다. 다양한 일을 겪은 끝에 학교에서 아이들과 함께 일하면서, 이 일이 자신이 계속하고 싶은 일일지도 모른다고 느끼고 있다고 했다. 내 기억 속의 그 학생이 자라서 교사가 될 것이라고는 전혀 생각지 못했었다. 여전히 15년 전의 모습만을 기억하고 있었던 나는 이렇게 달라진 모습으로 나타난 그 학생이 한편으로는 놀라웠고, 한편으로는 미안하기도 하였다.
교직에 몸담은 지 25년이 넘은 지금, 어쩌면 나는 ‘딱 보면 안다’는 태도로 학생들을 대하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굳이 보지 않아도 뻔하다는 생각, 교사나 부모가 아무리 노력해도 아이는 변하지 않을 거라는 생각이 점점 내 안에 자리 잡으면서, 도움이 필요한 학생들을 돕고 변화시키려는 마음은 점점 흐려지고, 결국 나 자신의 무력감을 외면하기 위한 자기 합리화의 매너리즘에 빠져 있었던 것은 아닐까. 만약 그때 내가 이 아이가 교사가 될 수도 있다는 생각을 했더라면, 내가 이 아이를 대하는 태도는 분명히 달랐을 것이다.
‘Educare’라는 라틴어는 ‘(잠재력을) 밖으로 이끌어 내다’라는 뜻이라고 한다. 보이지 않는 잠재력을 볼 수 있는 능력, 아니, 보이지 않더라도 그것을 ‘믿는’ 능력이 진정한 educator의 역할이 아닐까. 내가 미처 보지 못해서 꺼내어 주지 못한 잠재력을 끌어내어 지금의 나에게 보여준 이 학생이 참으로 신기했고, 고마웠다. 나의 예상을 벗어나 주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