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정한 '킬링타임'의 대가

영화감독 정가영

by 흰지

그것이 한 사람에 대한 지나친 신화일지라도, 감독의 필모그래피를 따라 영화를 보는 일에 그 어느 때보다 안정감과 통일감을 느끼고 있는 요즘이다. 영화를 만들고자 하는 일련의 행보가 단편영화, (대중 상업영화보다 상대적으로) 단출한 독립영화 필드에서 벌어진 무엇이라고 했을 때 그 짧은 시간 동안 드러나는 메시지, 감각, 혹은 직관을 발견하는 일의 재미는 무척 쏠쏠하다. 그렇다. 나는 단편영화를 보는 행위에 짧은 호흡만큼이나 시간을 죽일 겨를이 없이 무언가를 끊임없이 발견해내는 능동성이 존재한다고 믿는다.

그 믿음으로 말미암아 이번 매거진에서는 한 감독의 단편영화들에 대한 단평, 그리고 그 단상을 '짧게나마' 추려보는 시간을 가져볼까 한다. 그야말로 '미니미'한 감독론을 써보겠다는 이 시도는 한 사람의 자취를 영화로서 확인하고 영화에 대한 글로 담아내는 일이 내 그릇에 넘치는 작업이었음을 확인하는 자리이기도 했다. 좋아하는 감독에 대한 주접이 흑역사가 될지라도 기어이 업로드를 누르는 이 손가락까지 어찌하진 못하겠다. 좋으면 좋은 대로 말하고 쓰련다.



영화감독 정가영

<밤 치기>(2018), <너와 극장에서>(2018), <조인성을 좋아하세요>(2017) 등

유튜브 채널 '가영정' 운영 (https://www.youtube.com/channel/UCGqPnH9L-2sJKOV8h9oEujw)


매거진의 첫 번째 주인공은 정가영 감독이다. 정가영 감독을 처음으로 기억하게 된 영화는 작년에 개봉한 <밤치기>에서였다. 영화를 극장에서만 세 번을 보고 밤새도록 박수를 쳐도 정가영에 대한 후유증이 가시지 않았던 나에게 감독의 유튜브 채널 '가영정'은 보물 같은 장소였다. 정가영이 2015년부터 자신의 단편 영화 등을 업로드해온 이 채널은 감독 특유의 재치와 아이러니에 대한 감각이 어떤 과정을 통해 무르익게 되었는지 몸소 증명해보인다. 본 리뷰에 적힌 전편의 영화들 역시 링크에서 확인할 수 있다.



혀의 미래 / 2014 / 5 min 41 sec


2G 폰을 쓰고 있는 감독이 스마트폰으로 영화를 찍어 영화제에 출품했고 상까지 탔다. 제목은 <혀의 미래>, 첫 장면에서 주인공 가영은 거울을 보며 혀를 낼름거리는 연습을 해본다. 연인과의 첫 키스를 앞둔 남자와 여자에 대한 5분여간의 이야기는 우리의 예상을 뒤엎는 스토리로 나아간다.


본격적인 스킨십 전에 긴장을 풀기 위한 담소를 나누다가 뜬금없이 자신의 아버지가 재혼을 앞두고 있다는 가족사를 고백하는 남자. 덩달아 자신의 어머니 또한 재혼을 앞두고 있다는 여자. 서로 신기해하며 축하를 나누던 그들은 문득 재혼 상대에 대한 단서를 맞추어나가다 좋지 않은 방향의 직감과 마주한다. 설마 정말 '그것'이 사실일까라는 반문은 아이러니한 타이밍과 맞물려 흥미를 더한다. 정말 그들의 부모가 결혼하는 사이일 수도 있다는 황당무계한 전개의 정보들로 키스를 하기도 전의 두 남녀가 입을 맞추고, 시작 장면, "정말 첫 키스를 하면 귀에서 종소리가 들릴까?" 질문하던 여자의 대사에 답해주 듯 영화 말미 갑작스러운 종소리가 울려온다. 남자가 여자에게 달려든다. 그를 밀어내며 걱정스러운 표정의 여자가 입을 연다. "우리 혀는 넣지 말아 보자."


해서는 안 되는 것의 금기를 말하는 정가영 감독의 태도가 가장 일찍, 그것도 위트 있게 드러난 첫 번째 단편이기도 한 영화 <혀의 미래>는 금기를 앞둔 사람들의 회피 혹은 돌진, 그럼에도 비장하지 못한 인물들이 발 디딘 현실을 여실히 보여준다. 정말 그 연인이 남매가 될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한 미래를 묻는 일은 현재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표정과 결부하며 5분여의 짧은 러닝타임 내내 웃음을 유발한다. 난처하고 어리숙한 미래를 그리는 일은 이후 감독의 세계관에도 중요한 방향 중 하나가 된다. <혀의 미래>는 단지 시작일 뿐이었다.



처음 / 2015 / 10 min 17 sec


방 안에서 여자 둘이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영화를 만드는 작업에 대해 가영이 성토하고 이를 듣는 가영의 친구 앞에 왠 낯선 남자가 문을 연다. 자신이 연기과의 학생이며 키스신 촬영을 앞두고 있다는 이 남자가 오늘 초면인 사람들 앞에서 부탁하는 요구사항은 실로 당황스럽다. 카메라 앞에서 인생의 하나뿐인 첫 키스를 할 수 없다며 두 여자에게, 그중에서도 처음인 여자와 스킨십을 하고 싶다는 이 전개는 조금만 엇나가도 재미가 아닌 불쾌감을 유발하기 십상이며 그렇기에 위태로워 보인다.


이때 가영은 그중 유일하게 남자의 처음을 반가워하며 귀여워하는 여유를 보인다. "나 94년생이랑 올해 처음 얘기해봐" 혹은 "나도 처음인 사람은 처음인데" 식으로 대화의 주도권을 잡는 이 또한 여자 가영이다. 더 나아가 이런 식의 준비도 정말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가 아니라면 소용이 없다는 조언까지, 이 무례한 남자의 의지를 무력하게 만드는 설득은 사뭇 진지하고도 솔직한 가영의 패에서 비롯한다.


이 단편영화의 결말에서 감독 정가영은 이제까지 영화에서 가영이 적극적이라 쉬운 여자라 쉽게 칭하는 손가락질하는 이들에게 한 방을 날린다. 쉽게 패를 드러날지언정 눈치 보지도 않고 숨길 것도 없는 이 당당함이 가영의 이야기를 쉽게 읽히지 않게 만든다. 부럽고도 희귀한 매력은 연기과 남학생은 물론 관객들까지 설득시킨다. 필모가 쌓일수록 감독의 페르소나인 배우 '정가영'에게 더 과감한 초점이 주어지는데 오히려 우리의 주인공은 자신에게 주어진 무게감을 즐기는 듯한 인상마저 안긴다.



조인성을 좋아하세요 / 2018 / 19 min 48 sec


앞의 두 편의 업로드 이후 시간이 조금 더 흘렀고 <조인성을 좋아하세요>는 이전보다 좀 더 좋은 화질의 카메라를 통해 더 많은 수의 컷이 배치되는 영화이다. 실제 배우 조인성의 목소리 출연으로도 나름의 유명세를 탄 이 영화는 가영이 바람피우는 남자들에 대한 불만을 친구에게 실토하는 전화로부터 시작한다. 푸념을 담은 전화는 감독 본업인 차기작 계획으로 흘러가는데 미리 준비한 이야기인지 충동였는지 모르게 가영은 조인성을 캐스팅하고 싶다 얘기한다.


제목도 조인성, 시나리오도 조인성으로 가득한 영화는 그동안의 필모그래피에서 일련으로 등장했던 황당무계한 변수를 감독 본인의 입으로 스스로 자초했다는 것에 조금은 다른 차별점을 둔다. 통화가 이어지고 주변 지인들의 반응은 처참하다. 독립영화에 조인성을 캐스팅할 수 있을까란 난제는 조인성과 사귈 수 있을까란 전제로 탈바꿈한다. 그리고 꿈처럼 조인성에게서 전화가 온다. 가영과 안면이 있는 감독에게 가영의 계획을 전해 들었고, 전작 <비치 온 더 비치>를 재밌게 봤었다는 이 배우의 달콤한 목소리. 가영과 관객의 입꼬리를 절로 올라가게 하는 이 환상.



조인성과의 통화가 과연 꿈인지 생시인지 분간을 가지 못하게 하는 이유론 독립영화에 실제 조인성 배우가 캐스팅되었다는 이 영화의 놀라운 사실 한 가지와, 영화 중간중간 방 안에 드러누운 가영이 잠에 드는 과정이 인서트 된다는 연출 한 가지를 들 수 있다. 이야기가 전진될수록 더 감겨오는 눈꺼풀이 조인성과의 대화라는 꿈을 더 선명하게 그리는 것인지 알 수 없는 노릇이지만 그렇다기에 대화 중 조인성 배우가 감독 정가영을 배려하는 포인트 하나하나가 이 꿈이 현실이길 간절히 기도하게 만든다.


본격적인 미팅을 앞둔 감독과 배우라기엔 웃음이 난무하는 남녀 사이의 뉘앙스가 강하기에, 약속 장소의 차 한 잔이 술이 되고 서로의 주량과 취향을 묻는 과정은 배우 조인성을 캐스팅한다는 기대에서 나아가 남자 조인성과 대면한다는 설렘까지 부여한다. 미래에 대한 무용이 깊어질수록 벼락같은 행운의 실재는 사람을 정말이지 앞뒤 분간하지 못하게 한다. 그동안 '당혹스러운 현실, 그 이후'를 조망하고자 했던 감독의 직설법은 <조인성을 좋아하세요>라는 영화에서 '손에 잡힐 듯한 환상, 그 너머'의 직구 법으로 또 한 번 변모한다. 때문에 전작들에 비해 전화 통화로써 주변 사람들의 리액션을 최소화한 연출도 그 이유에서였으리라 생각한다. 방해물들은 집어치우고 이 곳엔 나와, 내가 좋아하는 너만이 있을 것이라는 이 확신. 혹은 자신감. 그렇게 정가영의 상상은 현실이 된다.




세 편의, 혹은 이 글에 미처 실리지 못한 그녀의 단편들까지 추슬러보자면 이야기들이 쓰고자 하는 일련의 메시지는 그렇다. 이 여자가 꼬시면 안 넘어오는 사람이 없다고 한다. 그걸 직접적으로 이야기하는 감독은 꼭 그녀에게 좀처럼 넘어가려 하지 않는, 그럴 수 없는 상황의 남자들에 대한 영화를 찍고자 한다. 이때 정가영은 결과보단 과정에 충실하다. 쓰러지는 나무보다 패는 도끼질에 눈을 반짝인다. 때문에 키스 혹은 대시 직전까지의 순간을 좀처럼 놓치려 하지 않는 시선이 빛을 발한다. 현실에 발 디딘 인물들이 예상치 못한 변수에 짓는 다소 애매한 표정에 직구를 날리는 화법이 활약한다. 스스로 "자신의 영화들은 킬링타임"용이라며 너스레를 떨지만 감독 자신이 페르소나가 되어 다방면으로 활용되는 이 짓궂은 표정들의 범위는 결코 소소하지 않다. 시간을 죽일 겨를 없이 끊임없는 무언가를 발견하게 하는 그녀만의 틈새에 몇 번이고 내 시간을 기꺼이 내어주고 싶은 바람이다. 그렇기에 정가영이 정말이지 킬링타임 영화의 대가더라, 이야기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