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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 민화(民畫), 이종철 <까대기>

박스처럼 까이고 버려지는 노동기

by 보는 사람


이 만화를 보고 이런 생각을 했다. 돈 많은 문화 사회 사업가, 노동부, 문화부에서 이 만화책을 애니메이션으로 제작했으면 좋겠다. 개봉 첫날엔 택배 노동자들을 초청해 이 영화를 보게 했으면 좋겠다고.


<까대기>: 벽이나 담 따위에 임시로 덧붙여 만든 허술한 건조물.

국립국어원, 표준어 대사전 등에서 쓰는 까대기의 뜻이다. 직업상 '까대기'라는 말을 참 많이 썼지만, 내가 알던 까대기와는 완전 다르다. 저런 뜻이 있는 줄도 몰랐다. 내가 아는 까대기는 백화점/대형마트, 대형 온라인 쇼핑몰 등의 유통 단지에서 공장, 물류센터 등에서 보낸 상품 박스를 박스 개봉, 정리하고 고객 주문 상품 및 행사/시즌 종료 상품을 택배 발송하는 일이다. 주로 외부 하역장이나 창고에서의 작업을 일컫지만 넓게는 매장에 진열하기까지의 전반적 노동 행위가 다 포함된다.


-꼴랑 몇 박스 가지고 하루 종일 까대기 할래?
-닌 까대기 하나는 참 기똥차게 빠르게 잘해
-자, 오늘 까대기 할 거 태산이니 박카스 하나씩 마시고 일하자.


하루에도 최소 몇 번씩은 쓰던 그 말이 사전에 검색도 안 되는 말이라니 서운하다. 특정 직군에서 많이 쓰는 노가다의 비속어, 혹은 사투리쯤으로 나올 줄 알았는데 말이다.


매장에 이쁘게 대량 진열된 과자, 참치, 음료수, 옷 등의 수많은 상품은 우리가 보는 그 상태로 오는 것이 아니라 상품 훼손과 도난 방지를 위해 박스 속에 담겨온다. 신상품과 판매 보충분같이 오늘 당장 진열, 판매할 상품은 박스에서 꺼내 '까고' 시즌 아웃, 행사 종료 상품은 '싸고'를 반복하는 게 유통, 판매업자의 주요 일이다. 시즌 초, 행사, 시즌 아웃 때는 매장에서 판매하는 시간보다 까대기 시간이 더 많다.


남자 담당들이 여자 판매 사원을 뽑을 때 키, 외모 같은 신체 조건을 언급하면 내가 농담 삼아 이런 말을 했다.

"여리, 야리 이쁜 44 사이즈 뽑아 까대기 하루 시키면 다음 날 안 나올걸요? 창고 델꼬 가서 박스 들어보게 해서 뽑아야 오래 합니다."

동료들은 내 말에 맞다 맞다, 박수를 치며 크게 웃곤 했다. 입 짧은 소식가들이 들어오면 처음 며칠은 힘들어서 더 못 먹다가 일주일, 한 달 지나면 식판에 퍼는 밥이 고봉밥이 됐다.


행사 상품 까대기 중. 왼쪽 박스 밑 빨간 깔판이 대용량 박스를 쌓아 자키나 지게차로 옮기는 팔레트다.


매대 행사가 잡히면 상품이 적게는 수십 박스, 많게는 백 박스도 넘게 온다. 여름엔 지글지글 용광로, 겨울엔 냉장고 같은 주차장 빈 곳 등 야외 하역장에서 뜨거운 태양과 칼바람을 맞으며 박스 까대기를 한다.

박스 속 상품과 전표를 대조해 수량이 맞는지를 검수해 오늘 매장 들어갈 건 카트나 매대에 싣고 나머지는 매대 하부장, 창고에 넣는다. 까대기로 헐렁해진 박스는 남은 옷끼리 복종별로 모아 박스가 꽉 차게 새로 담아야 쌓아 올렸을 때 찌그러지지 않는다.

열 박스 미만으로 오면 *L 카로 두 번 나르고, 열 박스 이상이면 *대차로 나른다. 수십 박스 이상이 되는 대물 박스는 지게차, 자키로 움직이는 *팔레트에 쌓아야 한다.

<까대기>란 만화를 보며 3, 40대를 까대기로 밥 벌던 시간이 생각나 그때 하던 일의 일부를 좀 길게 썼다.


나는 당대 노동자들이 자기 노동의 애환을 그린 노동 에세이를 종종 읽는다. 요즘은 작가, 의사, 간호사, 요양사, 운전기사, 유품정리사, 요리사, 호텔 종사자 등 글 속 직군도 다양하다. 심층 취재부터, 문학성 높은 1인 에세이, 여러 직업군의 글을 모은 공동 저자 에세이도 있다. 내가 몰랐거나 표피적으로만 알던 다양한 노동의 세계를 보고 배운다. 몰라서 무심했거나 내 편의에서만 생각했던 일들을 맞은편의 시선으로 돌아보게 된다.


시인 K는 소설가 J가 서울에서 만날 때는 말이 없었는데, 고향에서는 수다스러웠다고 했다. J는 에세이에서 '내가 사는 동네가 소설에 나오면 그 글이 더 잘 읽힌다'라고 썼다. '아는 얘기'이기 때문일 것이다. 한마디 하면 두, 세 마디를 알아들을 수 있는. 이 만화가 그랬다.


글의 장르, 목적과 성격, 문체에 따라 그 감동의 질량이 조금씩 달라진다. '경험'이라는 면에선 같지만 짧게는 몇 주, 길게는 일 년 남짓한 기간에 소재를 위한 노동을 한 사람과 생업으로 몇 년에서 십수 년 이상을 일 한 사람의 노동기는 다를 수밖에 없다. 유려한 문체만으론 재현할 수 없는 활어(活魚)의 생생함, 그 활어(活語)가 일터라는 도마 위에서 죽어가는 핍진성.

유려한 문체의 문학적 에세이는 정서적 감응이 크지만 관객, 독자의 시선에서 수동적, 일방적으로 읽기 쉽다. 반면, 노동 일지 같은 글은 좀 투박하지만 내 바로 옆, 앞에서 듣는 현장감이 높다. '읽는' 게 아니라 나도 나도 '맞장구' 치며 대화를 주고받는 느낌.


나는 물류, 유통업과 직결된 대형 쇼핑몰, SPA 매장에서 꽤 오래 일했었다. 또, 온라인 쇼핑 빅 3중 하나인 업체의 물류 창고에서도 짧게 일했었다. 그래서 '까대기'에 대해선 좀 알지만 그 일이 99%인 사람과 50%인 사람은 일의 양도 밀도도 다를 수밖에 없다. 택배 기사가 내게 옷 배송을 매일 해도 옷에 대해선 전혀 모르듯 나 또한 까대기를 매일 해도 내 일과 관련된 영역 안에서만 알뿐이다. 이 만화는 내가 일부만 알았던 '택배 노동자'들의 '까대기' 얘기다.

작가는 생계를 위해 다섯 군데의 택배사를 전전하며 6년을 일했다. 그때 경험을 글과 그림으로 생생하게 기록했다. 택배 만화를 그리기 위한 잠깐의 취재가 아니라, 몸으로 버텨낸 생계형 삶의 기록이다.



작가의 동료이자 만화 속 인물 대부분은 투잡을 한다. 택배 노동자들은 일하다 중간에 도망가는 사람, 며칠하고 그만두는 사람들을 많이 봐서 '이름'도 묻지 않는다. 오늘 내 옆에서 땀 흘리던 동료와 미리 헤어질 준비를 하며 이름조차 묻지 않는 일은 얼마나 쓸쓸한가.

일하다 다쳐 쉬게 되면 그날 대체 퀵과 배달 비용을 기사가 내야 하고, 그런 '계약 위반 벌점'이 누적되면 해고된다. 서류상 자영업자지만 실상은 자율성 없는 일용 노동자다. 작가가 받던 '까대기' 임금은 택배사 사장이 아니라 택배 기사가 주는 것이다. 그 돈이 아까우면 기사가 출근 몇 시간 전에 나와 새벽 까대기까지 해야 한다. 가족이 상을 당해도 낮에는 배송하고 밤에 장례를 치러야 할 상황이다.



폐업과 개업 사이 ㅍ 물류센터에서 잠깐 일 했었는데 창고 입장 전 휴대폰을 압수했었다. 그때는 근무 집중도와 열악한 작업 환경의 영상, 녹음의 외부 유출 방지를 위한 대비책으로만 생각했었다. '작업 중 도망방지'의 이유까지 있는 건 이 만화를 통해서 알았다. 실지로 내가 짧게 근무한 당시에도 식사 전후 사라진 근무자, 작업 속도를 채근하는 관리자와 언쟁하다가 장갑을 벗어던지고 가버리는 사람들이 하루에 몇 명씩 있었다.


'비정규직'이란 명칭은 기업 구조조정으로 대량 해고가 많았던 IMF 때 정착했다. 그때 각 분야에서 노동자들을 '강제 자영업자화' 시켰다. 4대 보험, 퇴직금, 유급 휴가를 없애고 산업재해 시 책임을 회피하기 위해 '특수고용직'을 만든 거다.

통신사 데스크 직원, 학습지 강사, 캐디, 화물/택배 기사, 배달노동자, 미용사…. 등 월급과 수익이 불안정한 영업, 서비스, 운송업 종사자들이 주로 그 대상이 되었다. 말이 자영업, 사장이지 1인 노가다나 마찬가지였다. 부가세, 종합소득세 등 안 내던 세금이 생겼지만 휴무와 명절은 사라졌다.



IMF 여파로 실직, 폐업을 전전하다 직원 8명이 일하던 대기업 계열사의 대형 의류매장에 판매 사원으로 들어갔었다. 어느 날 같이 일하던 사원들을 경쟁시켜 판매, 재고관리, OJT 평가를 합산한 고과 평가로 갑자기 사장이 됐다.

월 평균 억대 매장, 80평 넘는 공간에서 8명이 하던 일을 3명이 하게 됐다. 한 달에 두 번 겨우 쉬고 하루 15시간 일해도 그날 온 상품 까대기를 다 못하는 날이 많았다. 아침에 출근해 다음 날 새벽에 퇴근하는 날도 많아졌다. 해도 해도 끝나지 않은 높고 무거운 박스는 산 같고, 승강기 없는 빌딩 같았다. 너무 힘들어 울면서 퇴근하던 새벽이 기억난다.

방광염, 하지 정맥, 디스크, 탈모, 불면증, 야식과 폭식으로 인한 위장 장애 등의 갖은 병을 얻었고 정신력이 몸을 이기지 못하는 상태가 되었다. '밖에 나가면 더 지옥!'이라는 드라마 대사가 안에 있던 사람들을 울릴 때 바깥 지옥으로 나왔다.


일 할 때 장갑이 불편해서 안 끼는 습관을 들이면 손톱 및 까스래기, 튼 손은 기본이고 손가락 관절도 붓고 휜다. 특히 습한 장마철, 추운 겨울 아침엔 손가락도 잘 안 펴진다.


만화 <까대기>는 당시에 내가 느꼈던 육체노동의 고강도와 고달픔을 신파 없이 담담하지만, 사실적으로 묘사한다.

물류, 택배사에서 일하는 노동자 대부분은 더 할 것도 갈 곳도 뭘 번듯하게 차릴 돈도 없고, 자본주의 사회에서 남은 자본이라곤 자기 몸뚱이 밖에 안 남은 사람들이 많다. 해외여행, 어학연수를 위한 목돈용 단기 아르바이트하러 온 대학생, 제대 후 복학하기 전 용돈 벌이하러 온 청년, 다른 일 하기 전의 임시직인 사람들도 있지만 상대적으로 살 만한 그런 경우는 소수다.


만화 말미에 작가이자 주인공인 나는 그림 동기이자 취업해 그 나름의 노독에 시달리는 친구를 만나 서로를 위로하고 응원하며 회포를 푸는 장면이 나온다. 나보다 형편이 조금 나은 친구가 술을 사주며 말한다.

두 발로 꿋꿋하게 버텨! 그리고 힘들면 꼭 연락하기


"힘들면 언제든 연락하기!"라고 말하는 친구가 한 명이라도 있으면 다시 내일을 살 힘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그 장면을 보면서 마치 내가 고된 일과 후 오늘의 피로와 슬픔이 씻겨 나가는 듯 뭉클했다.



만화 속 노동자들의 자조처럼, 현실 속 택배 노동자를 비롯한 수많은 노동자들이 쓰다가 구멍 나면 버리는 일회용 장갑 같은 소모품으로 취급되는 세상이 바뀌길 바란다. 죽을 만큼 일하지 않아도 살 수 있고, 아프고 다치면 나가라, 니 몸은 니가 책임져라가 아니라 걱정하지 말고 쉬어라고 말할 수 있는 환경에서 일할 수 있는 세상이 되기를. 고속전철보다, 비행기보다 빠르게.



이 만화를 보고 내가 하던 일과 택배 노동자들을 생각하다 '까대기'란 원래 사전적 뜻을 다시 보니 '죽을 만큼 일해야 겨우 사는' 노동자들이 마치 그 세계에 일하는 사람을 지칭하는 것 같다.

<까대기: 벽이나 담 따위에 임시로 덧붙여 만든 허술한 건조물.>


'임시로' 덧붙여 만든 허술한 건조물이라 언제 벽에서 떨어나갈지 모르는 대상. 구멍 나면 버려지는 장갑 같은 존재, 하루 쓰고 한 달 쓰다 병나고 느리면 잘릴 허술한 존재들.




7월에만 택배 노동자가 3명이나 사망했고, 8월 최근에도 한 명 사망했다.

'시원한 물, 냉방 장치, 2시간마다 20분 휴식, 보냉장구 지급, 온열질환자 발생 시 119 신고'라는 폭염안전 5대 기본 수칙이 철저히 지켜지길 바란다. 이런 당연한 조건이 파업 요구 조건이라는 게 슬프다.

사망한 택배 노동자들의 명복을 빌며 그곳에서는 과로 없이, 시원하고 따뜻하게 지내시길!




[도난 방지텍의 종류]


중저가 대형 SPA 매장, 행사 매대에선 도난품이 생각보다 많다. 그 로스 금액은 수수료, 인센티브 사장인 매장 매니저, 점주가 부담해야 한다. 그런 도난품을 방지하기 위해 경보장치를 옷에 단다. 면티, 겨울 스웨터, 코트, 청바지같이 두껍고 힘 있는 소재는 박음선 쪽에 두꺼운 플라스틱 하드텍을 달고, 셔츠/넥타이/스카프같이 얇고 민감한 소재엔 스티커 지렁이 텍을 단다. 또 정장, 가죽 같은 고가 소재도 불량 로스 우려 때문에 지렁이 텍을 부착한다.


■ 하드텍: 흰 플라스틱 바로 된 도난 경보텍. 암수 한 쌍으로 한쪽에 침이 부착돼 그것을 옷 사이에 끼워 부착한다. 재활용 가능


■ 지렁이텍: 원래 이름은 DR(Disposable Resonator) 텍이지만 꾸불꾸불한 바코드 모양이 지렁이같이 생겼다고 우리는 그렇게 불렀다. 스티커 부착형이라 일회용.

※ 판매/택배 노동자들의 전쟁터 무기, 연장인

[까대기 이동 기구]


■ L 카

사진-인터넷 발췌(이하 동일)


10 박스 내외의 중소형 짐을 실을 때 많이 쓴다. 보통 돌돌이, 손수레라고 부르는데 우리는 L 카로 불렀다. 수레 모양이 대문자 L 같다고. 손잡이가 길어야 많은 박스를 쌓기 좋고, 허리도 덜 아프다.


■ 대차


직사각형 구조의 접이식 철제 이동 기구다. 높이는 성인 키보다 길고, 두 사람이 올라타면 꽉 차는 면적이다. 열 박스 내외의 상품을 한꺼번에 실을 때 이용한다. 많이 쓰기 때문에 보관 면적을 줄이기 위해 접고 펼 수 있게 돼 있다.(아래 사진)

사람들의 도구 발명 머리는 참 감탄스럽고도 슬프다. 그 편리함이 결국 노동 과잉으로 연결되니.



■ 팔레트

대량의 박스를 적재할 때 사용하는 자키와 팔레트


박스 단위가 수십 박스 되면 팔레트라는 것이 등장한다. 정사각형 형태의 나무나 플라스틱 깔판이다. 깔판 자체만도 무거워서 상품까지 싫으면 사람 근력으로는 옮길 수 없는 무게라 쟈키나 지게차로 옮긴다. 사진에 보이는 홈에 자키나 지게차를 끼워 펌프질 하듯 올린 후 끌고 간다.

물류에 잠깐 일 했을 때 나보다 건장한 남자들도 이걸 처음 봐서 사용 방법을 몰라 저 앞에서 우물쭈물했었다. 내가 속한 팀에서는 쓸 수 있는 사람이 나밖에 없어서 멋 모르고 사용할 줄 안다고 했다가 '사서 고생' 실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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