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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락치의 성장기 <없는 사람>

외로움이 우릴 거기 가게 했다-프락치와 IS 김 군

by 보는 사람


가까운 기간에 한 작가의 소설을 연달아 읽은 것도, 전작을 읽고 싶은 작가도 오랜만이다. 최근에 최정화 작가의 단편집 두 권과 장편 두 권을 틈을 두고 읽었다. 나머지 작품들은 마음과 시간이 될 때 또 읽기로 하고 도서 장바구니에만 담아뒀다.

단편이 개인 내면의 불안과 속물성을 주로 묘사한다면, 장편은 내면의 불안을 사회적 불신으로 확장한다. 그런 불안과 불신을 블랙 코미디, 심리극, 서스펜스적 요소로 단순한 일상과 평범한 개인도, 복잡한 사회적 문제도 몰입감 있게 묘사한다.



소설의 리얼리티는 재연이 아닌 재현


<없는 사람>은 자동차 제조 회사의 노동자 대량 해고, 공장 70일 투쟁 등 소설 속 특정 장면과 단어들이 자연스럽게 쌍용 자동차 사태를 연상시킨다. 노동, 농성 소설로 예상하고 읽었는데 시위 주동자보다는 프락치에게 무게 중심이 더 가 있다.

시위 주동자 자희와, 그를 사찰하는 밀정 무오가 주인공이다. 현실에서는 히어로, 승자가 주인공이고 그들 중심으로 돌아간다. 루저는 성공해야만 각광받는다. 끝내 역전하지 못한 낙오자가 주인공이 되고 그들 중심의 세계가 펼쳐지는 건 예술과 종교의 영역일 것이다.

<없는 사람>은 내성적인 청년이 어떻게 용역회사에 들어가게 되고, 그 뒤에 겪는 정체성의 혼란과 각성의 과정을 무오와 자희 두 인물의 역전되는 심리 변화를 따라 스릴감 있게 전개한다.


픽션과 논픽션의 리얼리티는 다르다. 이 소설이 쌍용 사태라는 역사적 사실을 재연하는데만 충실하고, 노동자 시점에서만 그렸다면 사회적 책무감에 짓눌린 메시지만 남았을 수도 있다. 최정화는 쌍용 사태라는 모티브, 그 상징성을 배경으로 가져와 문학적 상상력의 재현성에 집중한다. 복사지 같은 재연보다 상징과 상상으로 공동체적 윤리, 노동 현장의 고통을 훨씬 설득력 있게 재현한다.

거대 악의 폭력 속에서 시위 주동자와 프락치를 교차해 보여주다가 독자가 두 인물에 대한 연민과 공감이 깊고 높아지는 그들은 파국을 맞는다. 이해와 연민을 용서로 무마하지 않고, 주인공들에게 자기변명의 구원을 허용하지 않는다.



경계적 공간


소설 속 배경과 인물 대부분은 대립과 경계에 서 있다. 공장은 밖이면서 안이다. 밥과 (합법적 위) 법의 전장이다. 열면 공장, 닫으면 농성장. 자희와 그의 동료들에게 공장은 생과 사, 생업과 폐업, 안과 밖의 경계지, 대립적인 장소다. 회사는 회계를 조작해 고의 부도로 공장 문을 닫으려 하고, 노동자들은 공장 문을 다시 열기 위해 대립한다. 공장 문을 다시 열기 위해 공장 문을 걸어 잠가야 하는 모순적 상황이다.

이런 대립적인 공간은 결말에 이르면 공장이 아파트란 장소로 이동한다. 용역의 집요한 사찰, 은밀한 폭력과 조작 속에서 자희의 정신세계는 망가진다. 주변인 모두를 의심하면서 공장에서 나와 아파트 문 안으로 자폐적 유배에 들어간다. 경찰과 대립하던 자희는 체납 고지서를 전달하러 온 수위와 대치하게 된다. 불안증과 오지랖의 친절이 만났을 때 발생하는 희비극적 결말이 눈앞에서 보는 듯 섬뜩하고 서늘하다.


인터넷에서 '경계'의 이미지를 검색하니 나온 사진


이름의 복선


무오, 도트/자희, 이부, 반점, 우경.

소설 속 인물들의 이름이 하나같이 독특해 이름의 배경, 상징성을 궁금하게 한다. 소설 속엔 별도의 설명이나 한자어가 병기돼 있지 않으니 독자가 글을 통해 상상해 볼 수밖에 없다. 소설을 다 읽고 등장인물들의 이름을 다시 들여다보면 그 속에 캐릭터와 서사의 복선이 암시돼 있다. 또, 이름 역시 어떤 ‘대립적인 경계’를 상징한다.


1. 무오(無吾) : 내가 없는 사람. 정체성을 상실한 무력한 개인


‘무오’는 <없는 사람>이란 소설의 제목과 내용을 가장 직관적으로 드러내는 이름이다. 무오의 한자는 ‘無吾’가 아닐까? 내가 없는. 있지만 없는 것처럼 취급되는 사람, 존재감 없는 사람. 있어도 없어도 쉽게 대체되는 소모품 같은 대상.

무오의 관심은 출근해서 오늘 할 일, 구내식당의 오늘 점심 메뉴 정도가 다였다. 그날의 생존에만 관심을 두고 사는 자. 만나고 헤어진 사람의 얼굴을 떠올려 본 적 없는 자. 나도 타인도 궁금해 본 적 없는 자.

지금까지 그 누구와도 살아간다는 그것에 관한 얘기를 나눠본 적이 없었다. 무오에 대해서 그렇게 궁금해한 사람도 없었고, 충고나 조언을 하는 사람도 없었다. 아버지는 매사에 자신이 없는 사람이었다. 자기 몫의 생활을 이끌어가기에도 버거워 보였고, 무오를 낳고 기르는 것에 대해서도 매 순간 당황스러워했다. (중략) 아무에게도 자기 얘길 할 사람이 없었다. 아무도 무오를 궁금해하지 않았다. 그러다 보니 무오 자신조차도 자신에 대해서 점점 더 모르게 되었다.


최근 모 씨가 관계에 관한 얘기 중 ‘어떻게 사람이 친구가 한 명도 없을 수 있을까?’라는 말을 했는데, ‘없는 사람, 무오’가 떠올랐다.

'비대면'이라는 단어가 일상이 된 코로나 전후해서 친구가 없다는 외로움과 대인 관계의 어려움을 호소하는 청(소)년들이 증가했다는 말을 종종 듣는다. 경제적 형편이 괜찮고, 학업 외 자녀의 정서와 교우 관계까지 세심하게 신경 쓰는 부모를 둔 자녀들도 그런 경우가 증가하는 것으로 보인다.

사춘기에 관계의 어려움을 겪으면 성인이 돼도 새로운 관계를 만들거나 유지하는 게 쉽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아동기부터 학교와 집에서 방치되고, 성인이 돼서는 불안정한 계약직, 비정규직만 전전하는 상태가 지속되면 가난과 외로움의 이중고가 중첩, 심화된다. 어떤 관계를 만들고 유지할 경제적, 심리적 여유 없이 오늘 하루 무사했음에 안위하며 지내다 보면 고독한 중년, 독거노인이 돼 있기 쉽다.


무오는 미래 같은 건 생각하지 않고 무기력한 성실성으로 썰물처럼 밀려오는 택배 일을 하는 상하차 노동자였다. 하루 일하고 그만두는 사람도 많은 그곳에서 사 년을 일했다.

어느 날부터 누군가가 자꾸 말을 건다. 뜨내기 일꾼 이부다. 무오가 듣건 안 듣건 말을 하고, 대답을 안 해도 의견을 묻는다. 먼저 다가와 그의 얼굴을 보며 자꾸 말을 시킨다. 여기서 몇 년을 일 했다면 어떤 일도 잘할 거라는 칭찬도 한다. 그러면서 여기보다 좋은 조건으로 같이 일하자는 스카웃 제안을 한다.

무오는 이부의 제안을 받고 하는 일, 세세한 조건도 묻지 않은 채 순순히 따라 나간다. 친구도 부모도 선배도 없던 무오에게 이부는 그 모든 것의 대체자다.



2. 이부(義父/異父): 유사 아비, 통제자, 설계자, 조종자


이부는 용역회사의 관리자, 설계자다. 이부의 지시에 따라 시위 주동자인 도트를 감시하고, 그들 조직에 침투해 정보를 캐는 게 무오의 일이다. 폭력을 조장해 불리한 여론을 만들기도 한다. 그들이 분열하고 불안하게 만들어 조직을 와해시키는 게 최종 목표다. 무오는 도트를 따라 농성장을 들락거리며 성실한 프락치가 된다.


이부는 허술한 외양과 달리 인간 심리를 파악하고 조종하는데 능한 사람이다. 노조 와해 설계가 그의 주 업무이지만, 현장 실무자를 뽑는 것도 그의 일이다. 무오가 일하던 택배 회사에 들어간 것도 채용의 일환이었다. 그는 주로 열악한 환경의 업장에 들어가 그곳에서도 가장 말단에 있는 사람들을 면밀히 관찰한다. 무오 같은 청년들. 기댈 곳 없는, 미련하게 성실한. 미래를 꿈꾸기 힘든, 정이 고픈 애들을 골라낸다. 외로운 그런 애들은 조금만 잘해주면 따라와 성실하게 일한다. 일하다 다치거나 죽으면 또 다른 사람을 구하면 그만이다.


무오가 농성장을 드나들며 심경의 변화를 일으킨 걸 감지한 이부는 이렇게 말한다.

사람들이 노조 측에 감정이입을 해봤자 얻을 수 있는 게 뭐겠느냐? 자괴감이든 분노든, 그게 어떤 감정이든 간에 그런 감정이 자기 자신에게 해가 된다면 인간이라는 종족은 그 감정을 더 느끼지 않는 쪽으로 움직이기 마련이다.


이 소설에서 유일하게 어떤 식으로든 다치지 않는 자, 외부 환경에 별 영향을 받지 않는 자, 끝까지 살던 모습대로 살아남는 자는 조종자, 설계자, 방관자인 이부밖에 없다. 판만 벌리는 가짜 신처럼.


만나는 사람, 가는 장소가 바뀌면 생각도 바뀌게 되는 것일까. 회사가 문을 닫고 직원을 해고하는 것은 사장의 권한이거니 했다. 순순히 나가야 하는 줄 알았다. 그런데 사장의 해고, 회사의 부도 결정은 틀렸다며 싸우는 사람들을 본다. 법이 틀렸다며 광장으로 나오고 공장 문을 걸어 잠근 사람들을 본다.

“공장 주인은 우리다.” “함께 살자” “이겨서 나간다” 같은 구호와 글씨가 자꾸 무오의 마음을 흔든다. 오늘 내 밥그릇만이 아닌 내일, 우리가 함께 계속 먹을 밥통과 법을 말하는 사람들을 본다. 저들은 왜 저러고 길에 나와 울부짖는지, 나는 여기서 무엇을 하는지를 묻게 된다.



이러다 내가 누군지도 모르게 되고 말 것이다. 몸뚱이만 살아 있으면 뭘 하나. 자신이 누군지도 모르게 되어버린다면 그건 사람도 아니다.”



감시하고 분열시키기 위해 시위 대열에 들어가 위장으로 맞댄 어깨와 구호 속에서 자기도 그곳의 일원이 된 것 같다는 착각이 든다. 그런 느낌이 싫지 않다. 우정과 연대, 공동체의 느낌 같은 걸 자기가 망치러 간 곳에서 처음 느낀다.

사소한 일상사를 나눌 수 있는 누군가가 생겼다는 것, 혼자 껌을 씹는 대신 친구와 담배를 피우는 것, 심심할 때 심심하다고 말하고 우스꽝스러운 모양의 이미지를 주고받으며 킬킬대는 것은 무오에게 새로운 경험이었다.

도트가 자신의 작전대로 무너지자 오히려 화가 나고 배신감마저 느낀다. 무오는 각성 후 다른 삶을 살 수 있을까? 처음으로 어떤 결정을 스스로 내릴 수 있을까?

사람들이 신앙을 가지는 이유를 어렴풋이 알 것 같았다. 궁금해하지 앓는 것, 나 대신 다른 사람이 알고 있으니까 나는 몰라도 되는 것, 이런 것이 신앙인가 보다, 하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렇다면 이부가 신이 되는 건가. 그건 어쩐지 내키지 않았다. 이부가 신이라면 이부에게 연락이 올 때마다 이토록 달갑지 않은 기분이 들 리 없다.



3. 자희(自希)-스스로 희망을 품는 자


여자 이름 같은 자희. 신념의 노조 운동가, 시위 주동자의 이름으론 어울리지 않는다. 작가는 왜 캐릭터와 상반되는 뉘앙스의 이런 이름으로 지었을까? 궁금해하다가 ‘自希’란 한자를 붙여봤다. ‘스스로 희망을 품은 사람’. ‘내가 존재하지 않는’ ‘무오’의 대척에 있는 이름.

투옥되는 동료, 시위 이탈자, 퇴사자가 매일 는다. 용역의 공작은 더 치밀해지고, 법원이 사측에게 주라는 손해배상금은 천문학적이다. 사방이 막힌 곳에서 없는 사람과 있는 사람의 경계에 선 자희는 희망을 밀고 나갈 수 있을까?

-가진 거라고는 작업 중에 입은 화상과 난생처음 받아보는 해고증명서와 발음이 정확하게 들리지 않는 플라스틱 확성기와 낡은 중고 트럭, 칙칙한 색깔의 모직 점퍼와 싼값에 인쇄한 붉은 수건, 그리고 검게 타들어 가는 입으로 자기가 억울하니까 계속 싸우라고 마음에 없는 말을 하고 뒤에서 몰래 우는 마누라뿐인.


이 밖에도 조연인 ‘반점’과 잠깐 등장하지만 자희에겐 중요한 인물 ‘우경’.

진보지 기자인 ‘반점’은 노동자와 현장의 목소리를 외부에 알리는 동조자, 기록자다. 중요한 협력자이지만 계급과 역할이 다르기에 도트(온점)가 아닌 반점일 것이다.

자희가 여성적 이름이라면 그의 부인 이름은 중성적인 '우경'이다. 가장 가까운 동료자 동지였지만, 공장 농성이 장기화되면서 이혼을 요구한다. 반쪽이 된 가정과 아이를 지키기 위해 체제 안으로 이동하는 변화를 ‘우경(화)’이란 이름으로 비유한 것일까.

자희에겐 내가 살지 못할 삶을 살다 무너진 사람에 대한 불편한 죄책감과 안타까움으로 보게 한다. 무오에게선 나 같은 소시민적 외로움과 지질함의 연민, 나도 다르게 살아보기를 바라는 열망의 공감으로 보게 한다. 어느 누구도 쉽게 단죄하지 못하게 하면서.

최정화는‘어쩔 수 없(었)다’라는 양비론적 이해나 단순한 선악 구도로 끝내지 않는다. 한 사람은 완전히 무너지고 한 사람은 각성하지만, 결과는 다 가혹하다. 좋은 의도가 결과와 무관하고, 이해와 공감이 용서로 귀결되는 것은 아니라는 듯.


외로워서-IS 김 군과 광장에 나온 청년들

어디에서고 ‘없는 존재’처럼 지내던 무오가 용역 프락치가 된 과정을 보며 두 장면이 생각났다. 이라크 IS 용병 ‘외로운 늑대’로 가서 소식이 끊긴 17세 김 군과 윤석열 탄핵 때 거리로 쏟아져 나왔던 청(소)년들.

10년 전 이맘때 이라크 IS 용병 ‘외로운 늑대’로 가서 소식이 끊긴 ‘김 군’이라고 불린 17세 소년이 있었다. 신문엔 김 군을 가족과 학교 등 모든 관계와 단절한 채, 컴퓨터 앞에만 있던 은둔형 외톨이라고 했다. 그러나 자폐적으로 방안에만 있던 김 군이 사실은 방 안에서 혼자 있고 싶은 게 아니라 그 문을 열고 나가고 싶었던 건 아닐까? 방문을 열고 싶은 것처럼 닫은 입과 마음도 열고 싶던 거 아니었을까. 자신에게도 하고 싶은 일이란 게 있기를 간절히 바란 건 아니었을까.

그때 그와 마주한 대상이 인터넷뿐이었고, 그를 건드린 단어가 ‘외로운 늑대’여서 그렇게 된. 김 군이 아직 살아있다면 이 소설 속 무오의 나이쯤 됐을 것이다.


김 군의 외로움을 대체한 것이 ‘외로운 늑대’ 였다면 무오 외로움의 보상자가 ‘이부’였을 것이다. 또, 윤석열 탄핵 때 코로나 시국, 입시와 취업 경쟁 속에서 무력감과 외로움을 발산하지 못한 청년들. 그들은 ‘윤석열 탄핵’의 외침 속에서 혼자 외로운 내가 ‘동료시민’이 되는 존재적 가치와 기쁨을 느꼈던 건 아닐까. 응원봉과 음악 속에서 고독의 어깨를 부딪히며 공동체의 우정과 연대의 승화를 느낀 건 아닐까.

무오도 그랬을 것이다. 적어도 농성장, 공장에서만은 외롭지 않고 자신도 무언가 의미 있는 일을 ‘같이 한다’는 느낌. 나는 ‘어쩔 수가 없다’이지만, 시위대의 변절자에게 괜한 짜증을 내던 무오는 변절자가 자신에게 내뱉은 말 때문에 처음으로 어떤 일을 스스로 선택하게 된다.


정말 이러면 안 된다고 생각한다면 할 일이 왜 없겠습니까?

무오에겐 사찰 대상 자희가 ‘내가 망쳐야 할 나의 구원자’라는 갱신의 대상, 계기가 됐을 것이다.

그게 무오의 진심이었다……. 상황이 바뀔 거라고 믿고 싶은 것이 아니었다. 진짜가 되고 싶었다. 진짜로 이들 중 하나가 되는 것, 이들과 다르지 않은 농성대원이 되는 것. 여기에 속하는 것. 온전히 속하는 것. 이들과 다른 점 없이 섞이는 것. 그것을 원했다.



우리는 무오처럼 ‘없는 존재’가 되지 않기 위해, 있었지만 없는 존재가 돼 가던 자희처럼 안 되기 위해 어떻게 살고 어디를 봐야 할까. 정해진 답에 맞춰 수동적으로 따라가는 게 안전주의자의 법과 도덕이라면 그게 진짜 윤리인가, 정답이 맞는가 반문하게 하는 게 문학의 윤리일 것이다.

최정화의 <없는 사람>은 그런 질문의 여운이 짙은 글이다. 스스로 희망을 만들어 살아가는 ‘있는 사람’에 대해. 성공한 사람, 정답의 세상 보다 '망한 것의 비밀'에 대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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