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문학상 70회 수상작
김지연의 <좋아하는 마음 없이>는 <제70회 현대문학상>의 후보작 중 6명의 심사위원이 별 이견 없이 수상작으로 선정했다고 한다. 처음엔 '그 정도인가?' 갸웃거렸다.
'대상'이라는 후광을 깔고 '첫 번째'로 읽은 소설로선 소재도 문체도 평범한데?라는 인상이었다. '이혼'이라는 일상적 소재에 장르성이나 문체가 부각되거나, 극적인 서사가 있는 전개도 아니었다.
그런데, 서사와 문체가 더 밀도 높은 다른 수록작들을 다 읽어 갈 때쯤 슴슴한 이 글이 다시 생각났다. 마치 눈을 뗄 수 없이 몰입해 본 스릴감 있는 영화보다, 살짝살짝 한눈팔면서 본 영화가 극장을 나오면서 새로, 계속 생각나는 것처럼. 내가 본 것을 같이 떠드는 것보다 놓친 부분을 혼자 다시 보고 싶게 하는 여운 있는 글이었다.
표지 뒤에 실린 심사평 중 백지은의 말이 기억에 남는다.
문학상은 그해 다른 모든 작가 또는 작품을 제치고 1위에 오른 것이 아니라 이제까지 자신이 해온 문학이 오래 다다른 그 경지에 대해 '절대평가'로 좋은 점수를 받은 것이라 할 수 있다... 이때 경쟁은 자신과 다퉈야 하는 게 아니라 자신을 밀고 나가야 이길 수 있다. 남들처럼 읽고 확신하는 것보다 지난번과 다르게 읽혀 의심이 끼어들 때 안목이 늘어나는 것이리라
인용한 심사평 중 '남들처럼 읽고 확신하는 것보다 지난번과 다르게 읽혀 의심이 끼어들 때 안목이 늘어나는 것'이라다는 말은, 작가가 자신의 '의심'을 독자에게 보여주고 싶은 것으로 이 작품의 주제이기도 하다.
어릴 때 안지는 전형적인 사람이 되고 싶었다. 좋아하지 않는데 좋아한다고 말하기는 가능했다. 싫어하지 않는데 싫어한다고 말하는 것도. 호불호는 안지에게 절대적인 게 아니어서 아예 마음을 바꿔 먹는 것도 가능했다
주인공 안지는 어렸을 때부터 자기 취향이나 생각을 표현하기보다 '남들처럼' 생각하고 살기 위해 애썼다. 학창 시절 어떤 안건의 투표를 할 때는 눈치를 보다가 다수결에 따른 결정을 했다. 친구가 좋아하는 브랜드 신발을 따라 사고, 그들이 좋아하는 가수를 좋아했다. 보기 드물게 존경할 만한 면이 많은 수학 선생을 좋아했지만 친구들이 싫어하니, 그의 싫은 점을 찾기 위해 노력하고 그의 욕에 동참했다.
'평균적 삶의 진입'에 대한 조바심으로 결혼도 남보다 일찍 했다. 좋아 죽겠는 사람이 아니라 그냥 사람이 좋은 대학 선배와 남들 하는 연애의 루틴을 거치다 혼전임신으로 하게 된 결혼은 6개월 만에 끝난다. 남편의 바람으로.
10년 뒤, 상간녀이자 전남편의 재혼녀였던 그 여자로부터 전화가 온다. 남편이 죽었고, 보험 수령자가 당신 이름으로 돼 있으니 만나자고.
막장, 자극적, 신파가 되기 쉬운 불륜과 이혼 소재를 담백하게 전개한다. 사건보다 개인의 내면 중심으로 이혼 전후 안지의 심리적 변화를 일반적 공감대와는 다르지만 설득력 있게 묘사한다.
소설 앞부분에는 '평균적인 사람'이 되기 위해 자기 취향, 생각 없이 산 주인공의 성격을 꽤 자세하게 묘사한다. 어릴 때부터 내 취향이 분명했고 그 호오의 표현과 시시비비 가리는 것에 남의 눈치를 별로 보지 않았던 나로선 소설 속 은지의 성격과 선택이 답답할 때가 많았다. 그런 나도 살면서 싫은 것에 대해선 굳이 말하지 않게 되는 순간이 많아졌다.
나의 선택은 오롯이, 순전한 나만의 선택인가. 관습, 가족과 친구, 사회적 관계에서 맺은 주변인들의 영향력이 내 결정에 작용한 것은 아닌가.
은지는 불행하고 화나는 상황에서도 감정 표현이 거의 없어서 정서적으로 무감각하고, 수동적이고 무기력해 보인다. 바람난 남편이 혼인 신고하기도 전에 이혼을 요구해도, 시어머니가 자식을 두고 헤어져라고 해도 큰 분노나 저항 없이 수용한다. 전남편의 현부인이 찾아와 당신 아이는 이제 내 자식이고, 계속 내가 키울 테니 그 양육비를 매달 내게 지급하라고 해도 양육권과 보험금의 법적 주장을 내세우지도 않는다. 아이에 대한 그리움이나 미안함의 표현도 없다.
'전형적인 사람, 평균치 삶'에 전전긍긍 살던 안지가 정서적으로는 오히려 '비전형적, 평균적 공감력'이 부족한 인물처럼 보인다.
아이를 떼어놓고 나오는 게 그다지 힘들지 않았다. 육아에서 벗어난다는 해방감마저 들었다. 임신했을 때부터 딱히 아이에게 정이 들지 않았는데... 아이를 데려오고 싶지 않다, 새로 같이 살 자신이 없다.
그러면서도 상간녀가 흘리고 간 지갑에서 그들의 가족사진만 빼 온다. 재혼한 현 남편에게는 아이를 우리가 키워볼까를 지나가는 말처럼 성의 없이 하다 만다. '해괴한 에피소드 대회'에서 지갑 속에 죽은 전남편의 가족사진을 넣어 다니는 이야기로 '명예의 전당'에 오른다는 것으로 얘기는 끝난다.
죽은 전남편에 대한 미련, 아이에 대한 그리움, 전형적 가족에 대한 욕망의 무의식으로 사진을 훔쳤을 것이라고 해석하고 싶은 독자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안지는 그런 행동이 '좋아하는 마음 없이' 한 것이라고 한다. '해괴한 에피소드 대회'에 얘기할 만큼 중요한 의미도 없고 상처도 아니다. 우스개로 얘기할 수 있으면 더 이상 숨기고 싶은 상처는 아닐 것이므로.
안지의 선택이나 반응을 구경꾼, 활자 위 제삼자인 독자로서만 읽다가 당사자인 은지가 돼서 쓰는 행위로 보면 그 정서가 달라진다. 불행한 상태에서 일반적 감정 표출과 다른 은지의 반응은 어쩌면 살면서 자기를 제대로 표현하거나 이해받고 공감받지 못한 데서 온 결핍, 자기 방어와 보호의 결과는 아닐까.
사람은 애초에 있었던 것을 잃게 되면 상실로 느끼지만 한 번도 가져보지 못했거나, 애착이 형성되기 전에 잃어버린 것은 상실로 체감하기 힘들다. 원래 없던 것으로, 내 것이 아닌 것으로 수용하는 상태가 되기도 한다. 내가 두 살 때 돌아가신 아버지의 부재를 '상실'로 체감하지 못한 것처럼.
은지가 태생적으로 공감력이 부족한 인물이라면 '집'이나 '우아함'에 대한 이런 생각은 안 했을 것이다.
그렇게 집을 얻은 다음에도 늘 집 없는 사람에게 마음이 더 이입되었다.
끝끝내 우아할 수 있는 사람이라는 것도 생각해 보면.... 그런 사람들이었다. 자신의 감정이 무엇인지 잘 알고 솔직한 사람, 숨기느니 차라리 정면 돌파를 선택하는 사람, 그래서 뻔뻔할 수 있는 사람.
은지는 뻔뻔하기 힘들어 솔직해지지 못했고 정면 돌파 대신 회피하다가 취향과 감정을 잃어버린 것은 아닐까? 전남편의 현부인은 은지가 일반적 반응과 다르다며 왜 화를 내지 않냐고 하자 은지는 화내는 방식이 모두 같은 건 아니며, 현실은 감정보다 앞서고 위에 있다고 한다. 금융치료는 불륜도 용서한다면서.
때려 부수고 소리치는 것만이 화내는 방식은 아니잖아요. 일기를 써요. 그리고 위자료도 화를 삭이는데 도움이 됐어요.
나는 우아함과는 거리가 멀고, 뻔뻔한 유형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은지의 말로 나를 돌아보면 상처가 생기더라도 솔직해지고 싶다. 나쁜 역할 하기 싫어 미봉된 감정으로 끝나가는 감정을 끌고 가기보다는 불편하더라도 정면돌파로 마침표를 찍는 게 편한 쪽에 가깝다.
전형성의 조급증에 걸려 자기감정, 취향 없이 살던 인물이 타의에 의해 일상이 깨지면서 관성적 삶의 전환을 맞는다. 그 심리적 변화를 다소 비현실적인 캐릭터와 반응으로 묘사해서 독자가 주인공의 감정에 바로 이입하는 것에 거리를 두게 하면서도 이해는 할 수 있게 그린다.
내용 자체는 우울한 상황이지만 장면을 연상하면 블랙코미디 같은 요소가 군데군데 있으면서도 위악적이지 않다. 불륜과 이혼 당사자들을 가해자, 피해자라는 대립적 구도에서 거리를 둔 것, 가족, 모성의 전형성을 탈피하면서도 부도덕하게 그리지 않는 것도 좋았다.
평범한데 새로운 인물상의 구현이다. 이 작품에서 계속 말하는 '전형성', '평범성'을 다시 생각해 본다.
전형성: 같은 부류의 것들 가운데 가장 일반적이고 본질적인 특성
평범하다: 뛰어나거나 색다른 점이 없이 보통이다.
적당한 시기의 결혼과 출산, 자가 소유의 집, 안정된 직장... 이 근과거의 전형성이었고, 은지의 꿈도 그런 '전형적인 삶'이었다. 실패했지만.
그런데 비혼, 이혼, 무자녀, 1인 가구, 무주택자, 비정규직이 전형, 평범성이 돼가고 있다. 평범하기도 힘들고, 전형성이라는 것도 시대성에 따라 달라지거나 역변하는 것이다.
은지를 통해 '남들처럼 사는, 전형적인' 삶과 함께 '좋아하는 마음 없이도' 같이 사는 마음과 관계를 다시 생각하게 된다.
우리 마음, 주변을 둘러보면 어느 순간부터는 '좋아하는 마음' 없이 관계의 명맥만 유지하는 경우 없나? 일, 출근도 좋아하는 마음 없이 꾸역꾸역 열심히 하고, 도의로 관계를 끌고 갈 때 없나? 상대를 보는 내 눈엔 웃음보다는 지루함과 불편함이 늘었는데도 특별히 나쁜 사람 아니잖아, 좋은 점 한 가지만 있음 됐지 뭐-라며 은폐하진 않나. 정리하는 과정의 불편함이 번거롭고, 내가 먼저 결정하는 나쁜 사람 되기는 힘든데 네가 먼저 결정해 주면 오히려 홀가분한 적 없나. 이리저리 연결된 관계 때문에 적당히 포장하고 묻어두는 감정의 회피는 아닌가. 이 소설은 그런 관계, 드러내고 싶지 않은 마음 한쪽을 들춘다.
이제는 거의 연락도 하지 않는 사람들을, 좋아하지 않는 마음 없이 함께 살아야만 했던 사람들을 생각했다.
안지는 자신의 마음, 취향보다 주위 사람들에게 잘 보이는 삶을 살아오다 뒤통수 맞았다. 좋은 사람이라서 좋아하고 다수가 좋아하는 것을 좋아하던 안지는 이혼 후 '좋아 죽겠는 사람'을 만나고, '내가 좋아하는 것'을 즐긴다. 남들에게는 좀 이상하게 보일지라도 자기감정에 충실하고, 그 감정 그대로 표현하게 된다.
좋아하는 것을 좋아한다 말하게 된 세계로 건너간 사람. 좋아하는 마음 없이도 가족으로 지낼 수 있지만 자기 자신으로는 지내기 힘든 법이다.
/편해영(심사평 중)
수상 소감을 말하는 작가의 말 중 한 부분이 특히 와닿았다. 내가 '그냥 좋아하자'가 잘 안 되는 사람이라서. 작가는 현대문학상 수상 직후 기쁨과는 별개로 이 상을 지금, 내가 받아도 되는지를 비롯한 여러 가지 생각을 한다. 그러다 이렇게 생각한다.
"그냥 좋아하자. 그렇다고 다른 마음들이 없는 것은 아니니까."
사람이 한 가지 마음만 있는 게 아니고 그게 꼭 위선적인 것만은 아니다. 모두가 자기가 좋아하는 것을 확실히 아는 건 아니고, 잘 모르고도 그냥 하는 것도 많다. 그게 나쁜 것도 아니고 '그냥 좋아하는' 순수한 기쁨과 애매한 마음을 긍정하면서도 다시 이런 반문도 든다.
'그 다른 마음들'이 그냥 좋아하는 마음보다 자주, 더 커지면 '좋아하는 마음 없이 사는' 거 아니냐고. 그게 더 슬프고 아픈 거 아니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