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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Ronald Feb 08. 2019

엄마랑 규슈

규슈에서 내가 몰랐던 엄마를 만났다

누구와 가느냐에 따라 여행의 결은 천차만별로 달라진다. 여행지를 도시, 근교의 작은 마을, 그리고 휴양지로 정하느냐에 따라 여행의 전체적인 컬러가 결정된다면 동행인에 따라 명도와 채도, 혹은 따스함의 정도가 더해져 같은 여행지라도, 여행은 그 빛깔을 달리했다. 게다가 함께 하는 여행은 느린 속도를 자랑했다. 혼자 하는 여행이 시속 70km로 달리는 경차라면 함께 하는 여행은 시속 40km로 천천히 서행하는 SUV와 같았다. 그룹의 몸집이 커질수록 여행의 속도는 더뎌졌지만 여러 명의 관점이 더해져 무엇 하나를 하더라도 그것들은 훨씬 입체적인 경험으로 다가왔다. 분명 내가 하는 여행이었지만 함께하는 이의 이름으로 된 필터가 씌워지는 기분이었다. 그리고 3년 전, 한국 가는 길에 들른 규슈에서 나의 여행 동무는 최고령의 나이를 자랑했다. 바로 우리 엄마. 규슈는 55년생 엄마 필터가 장착된 여행이었다.


엄마와 단둘이 하는 두 번째 여행이었다. 첫 번째 제주행과 다른 점이라면 가깝지만 어쨌든 이번에는 해외여행이었기 때문에 마음가짐이 조금 달랐다. 곧 환갑을 맞으시는 엄마와 효도 여행이란 것을 해보고 싶었다. 그게 겨울의 규슈라면, 유후인의 료칸 콤보가 더해지면 더없이 느긋한 여행이 될 것 같았다. 엄마에게 의사를 물으니 당연히 뛸 듯이 기뻐하셨다. 후쿠오카에서 유후인까지, 이동하기에는 번거로움이 있어 자동차를 렌트하기로 했다. 다행히 일본은 호주와 운전 방향이 같아 베테랑 운전자인 엄마에게 그간 갈고닦은 운전실력을 뽐낼 수 있다는 생각에 벌써부터 어깨에 힘이 들어갔다. 출국 전 날, 엄마는 일찌감치 짐 꾸리기를 마치셨는데 여행 당일에 보안 검색대에서 (내게 말도 없이 챙겨 오신) 고추장이 발견된 에피소드를 제외하면 여행의 시작은 순조로웠다.



장어덮밥을 먹고 도서 특화매장인 무인양품, 캐널시티 하카타 점을 구경했다.



산책하는 마음으로 다자이후를 찾았다가 산책 나온 시바견을 만났다. 스타벅스 다자이후 점은 여전히 어여뻤고.



태어나면서부터 함께 한 엄마지만 새로운 여행지에선 그동안 내가 알지 못했던, 엄마의 또 다른 모습을 발견할 수 있었다. 미즈타키(일본의 닭백숙 요리)로 유명한 토리젠에서 코스 요리를 시키니 중간에 닭 사시미가 나왔는데 엄마는 한참을 빤히 응시하시다가 겨우 한 점을 드시곤 별다른 이야기 없이 테이블에 있는 닭날개 요리를 열심히 공략하셨다. 닭 사시미는 나에게도 난이도가 높은 음식이었다. 후쿠오카의 명동교자쯤으로 생각되는 이치란 라멘을 찾은 날은 라면과 라멘의 차이점을 설명하며 자신 있게 돈코츠 라멘 두 개를 주문했지만 엄마는 국물이 너무 느끼하시다며 일찍 젓가락을 내려놓으셨다. 엄마는 닭 사시미 요리와 돈코츠 라멘을 좋아하지 않으셨다. 후쿠오카-유후인에서 보낸 3박 4일은 엄마를 재발견하는 시간이기도 했다.



긴린코 호수와 가이세키

저녁으로 잘 차려진 가이세키 요리를 한상 받고 단정한 이부자리에 나란히 누웠다.



유후인의 아침

대신 엄마는 유후인을 좋아하셨다. 도착하자마자 온천 마을 전체를 둘러싸고 모락모락 올라오던 하얀 김과 새벽녘의 긴린코 호수를 더욱 신비롭게 만들어주던 물안개를 보며 참 여러 장의 사진을 찍으셨다. 료칸의 꽃이라 불리는 가이세키 요리와 식사를 마치고 돌아왔을 때 다다미 위로 준비된 이부자리를, 그리고 무엇보다 노천탕을 정말 좋아하셨다. 잠자기 전에 노천탕의 뜨끈한 물에 몸을 담그고 오니 잠이 솔솔 왔는데 다음날 새벽에 긴린코 호수를 다녀오신 엄마는 결연한 목소리로 노천탕에 한 번 더 다녀오시겠다고 하셨다. 그렇게 홀로 아침 온천욕을 마치고 조식을 드시던 엄마는 금방 콧노래라도 부르며 날아가실 것만 같았다. 엄마는 아직까지도 규슈 여행에서 가장 잘 한 일로 아침에 다녀온 노천탕을 자랑스럽게 이야기하신다. 내공 가득한 당신의 선택이 틀리지 않았음을 흡족해하신다.


이후에 중국, 베트남과 같은 아시아 여행을 몇 차례 다녀오시고 외국여행 가도 별 거 없다, 음식도 입에 잘 안 맞고..라고 말끝을 흐리는 엄마에게 그러면 여행 가는 게 왜 좋으시냐고 물으니 엄마는 생각지도 못한 답안을 내놓으셨다. 아침, 점심, 저녁, 삼시세끼 밥상을 안 차려도 돼서 좋다고, 그냥 구경하다가 밥때가 되면 다른 사람이 차려주는 밥 먹는 게 좋았다고 이야기하셨다. 호주에 사는 5년 동안 도시락 싸기는 나에게 매주 과제와도 같았다. 처음에는 미지의 영역을 시도해보는 즐거움이 있었지만 점점 퇴근하고 돌아가 저녁을 해 먹는 것조차 귀찮아져 일주일에 4번을 싸던 도시락이 막판에는 주 1회로 급격하게 줄었다. 도시락은커녕 저녁마저 외식하는 횟수가 늘어만 갔다. 그동안 힘들다는 내색 한번 하신 적 없지만, 엄마라고 그 모든 게 안 힘들고 안 귀찮을 리 없었다. 남이 해주는 밥이 엄마에게도 가장 편하고 맛있는 식사였을 것이다.



그런데 세상의 엄마들은 또 왜 그리도 씩씩한 건지. 유후인에서 돌아오는 길에 꿈의 다리와 쿠로가와에 가기로 했다. 풍문으로만 듣던 꿈의 다리는 어마어마한 다리 길이를 자랑했고 고소공포증이 있는 나는 저 멀리 오른쪽에 있는 폭포에 시선을 고정한 채 정신을 교란시키며 한걸음 한걸음 앞으로 나아갔지만 세찬 바람에 다리가 흔들리자 결국 걸음이 멈추고 말았다. 꿈의 다리는 장관이었으나 1/10 지점에서 도통 발걸음이 나아가질 못했다. 안 되겠다 싶어 앞장서 가시던 엄마에게 먼저 가시라고 손짓을 하자 엄마는 성큼성큼 빠른 속도로 전진하셨다. 20분 정도 시간이 지났을까 저 멀리서 환하게 웃으며 돌아오는 엄마가 보였다. 세상의 엄마들은 대부분 씩씩하지만 우리 엄마는 둘째가라면 서러웠다.





얼마 전에는 겨울을 맞아 김장을 담갔다. 엄마의 주도하에 오빠네와 나, 그리고 아빠가 함께 20포기의 김치를 만들었다. 오랜만에 집에서 먹는 보쌈과 겉절이의 조합이 환상적이었다. 겉절이보다 살짝 익은 김치를 좋아하는 나는 "엄마, 나는 구워 먹을 때는 줄기 부분이 좋고 김치찌개로 먹을 때는 이파리 부분이 좋은데 엄마는 김치 어느 부분을 제일 좋아해?"라고 물었다. 엄마는 양념이 덜 밴, 덜 짠 줄기 부분이 좋다고 하셨다. 엄마는 줄기를 좋아하시는구나, 그동안 무심히도 몰랐던 엄마의 김치 취향을 알아간다. 서울에서도 새로운 엄마를 발견한다. 최근에는 특별히 가고 싶은 여행지도 없으니 오랜만에 엄마랑 함께하는 다음 여행을 그려본다. 엄마의 재발견은 앞으로도 계속될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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