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심과 불안은 한 세트다. 의심이 생기면 불안이 자란다. 불안 속에는 늘 의심이 먼저 있다. 그러나 부정만의 관계는 아니다. 의심과 불안은 사람을 멈추게도 하지만, 아주 가끔 앞으로 밀어붙이기도 한다. 한 발 더 나아간 사람이 새로운 기록을 만드는 건, 이 둘을 연료로 쓰는 순간이다. 인간은 완벽하게 안정된 환경이 아니라, 약간 흔들리는 환경에서 더 깊이 반응한다. 심리학에서는 이를 '최적 각성'이라고 부른다. 너무 편안하면 무감각해진다. 약간 불안하면 집중이 선명해진다.
인류 역사도 같은 구조를 가진다. 원시인은 맹수를 의심하고 불안해했기에 밤에도 불을 피웠다. 현대 직장인은 관계, 성과, 자리, 속도 때문에 불안해한다. 맹수는 사라졌지만, 스트레스라는 이름으로 위협은 살아있다. 그래서 비교가 시작된다. 비교는 진화의 부산물이다. 레온 페스팅거의 사회비교이론에 따르면, 인간은 자신을 타인을 통해 측정하려는 경향을 갖고 있다. 문제는 결과가 아니라 결론이다. 나를 깎아내리는 결론은 불안을 키운다. 동료의 승진을 내 실패의 증거로 삼으면, 나는 이미 싸움에서 진다. 대신 과정에 초점을 맞추면, 비교는 성장의 정보로 바뀐다. “그는 어떤 반복으로 거기까지 갔는가?”라고 묻는 순간, 비교는 더는 칼이 아니라 데이터가 된다.
두 번째는 통제감이다. 불안이 커지는 이유는 상황이 통제 밖이라고 느끼기 때문이다. 그러나 조직은 원래 통제 밖이 기본값이다. 스스로 입장을 정하지 못하면, 통제감도 잃는다. 스티븐 코비는 영향력의 원을 말했고, 뇌과학에서는 통제감이 결핍될 때 스트레스가 급증한다는 걸 보여준다. 남의 영향력 원에서 사는 건 도피가 아니라 표류다. 내 영향력 원에 머물면, 불안의 크기는 작아진다. “내가 바꿀 수 있는 건 여기까지다”라고 말하는 단순한 문장이 삶의 방패가 된다.
세 번째는 정체성이다. 30대는 친밀과 성취, 생산과 침체가 교차하는 시기다. 에릭 에릭슨의 발달과업 중 친밀감 vs 고립감, 생산성 vs 침체가 30대에 동시에 작동한다. 이때 일이 나와 맞는지 의심하는 건 당연한 단계다. 그러나 결과가 아닌 방향이 더 중요하다. 내가 원한 방향으로 하루를 반복했는지를 질문해야 한다. 10년이 지나 50이 되어도 대화를 나눌 친구도, 나를 설명할 문장도, 나의 경쟁력도 오늘의 선택에서 만들어진다.
나는 8년 전 책을 펴면서 자기 삶의 방향을 다시 물었다. 책으로 저자의 우주를 만났다. 그 우주를 통해 나의 결론을 재작성하기 시작했다. 그 끝에 작가라는 직업을 선택했다. 선택 후에도 불안은 남았다. 그러나 에너지는 달라졌다. 칼 로저스는 불안 속에서 자기 효능감이 자라고, 반복 행동이 이를 굳힌다고 본다. 불안을 회피하면 근육은 자라지 않는다. 불안을 견디면 근육은 생긴다. 하지만 근육을 키우는 것은 의지가 아니라 설계다. 이유, 상상, 미세보상의 루프를 넣으면, 뇌는 속도가 아닌 방향을 기억한다.
불안은 신호등과 같다. 신호등을 무서워해 부수지 않는다. 신호등이 켜지면 속도를 낮춘다. 주변과 충돌하지 않도록 방향을 살핀다. 불안도 같은 역할을 한다. 내가 원한 일을 하고 있는지, 내 반복이 나를 어디로 데려가는지, 지금의 내가 어떤 상태에 있는지 스스로 탐색하게 하는 신호다. 불안을 손에서 떼어내 분석하면, 불안은 적신호가 아니라 청신호의 정보가 된다. 지금의 불안이 삶을 괴롭히는가, 삶을 깨우는가의 차이는 하나다. 내가 반복할 이유를 스스로 가졌는 가다.
불안이 켜졌다고 인생을 멈추지 않는다. 불안이 켜지면, 오히려 길을 읽는다. 그때 무릎과 심장이, 더 단단한 내일로 나를 밀어붙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