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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년 상반기 회고 with 월별키워드

바람 잘 날이 없는 달들

by 버블리

지금까지 살아온 모양을 보면 안정이라는 키워드는 내 삶과 거리가 멀다. 오히려 그 반대에 더 가깝다. 본투비 하고 싶은 건 하고 살아야 하는 성격과 꾸준한 독서와 글쓰기로 쌓은 자기 주관, 그리고 남들이 가라는 대로는 죽어도 가기 싫어하는 청개구리 성향이 골고루 합쳐진 탓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30대가 되면, 그래도 지금보다는, 조금 더 안정적으로 살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던 때가 있었다.


그리고 (조금 더 안정적으로 살 수 있을 거라고 기대했던) 30대에 접어들자마자, 나는 약 4년을 함께한 사람과 완전히 헤어졌다.




1월 : 이별

1월 키워드는 이별이다. 두 번의 헤어짐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결국에는 함께이길 선택했던 그 질긴 인연을, 올 초에 진짜로 끝냈다. 아무도 없는 캐나다 밴쿠버에서 혼자 유학을 시작할 때부터 내내 옆을 지켜준 사람이었다.


외국에서 하는 연애는 여러 가지로 특별했다. 기쁠 때나 슬플 때나 싸울 때나 심심할 때나 우리는 늘 함께였다. 해외에 사는 커플들에게는 흔한 일인 동거까지는 해보지 못하고 헤어졌지만, 떨어져 있을 때조차 서로 늘 연결되어 있다고 느꼈다. 깊었고 편안했고 안정적이었다. 함께 한 기간 동안 ‘나에 대한 마음이 변하면 어쩌지?’ 같은 불안한 마음이 든 적이 단 한 번도 없었으니까.


가족도 친구도 없는 밴쿠버에서 나는 혼자였고,

상대방 역시 나와 같은 상황.


우리는 여기서 말 그대로 서로밖에 없었다.



아무도 없던 서울에서
그는 내 연인이었고
가족이었고
베스트 프렌드였다.

그렇게 가장 가까웠던 단짝과
하루아침에 남이 되는 건

둘만 있던
작은 별에서
어린 왕자가
떠나는 일이었다.

- 폭싹 속았수다 / Ep.11




가장 가까웠던 단짝을 잃은 당시의 나는 어떤 마음이었을까? 궁금해져서 1월 일기를 정독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아무리 페이지를 뒤로 넘겨봐도 회사 일과 브런치 연재에 대한 내용만 빼곡했다.


이별에 대한 언급이 단 한 글자도 없었다.


... 뭐지?


이해가 잘 되지 않았다. 일기장을 덮고 침대에 누워 곰곰이 생각해 봤다. 이 연애의 끝은 분명 내 인생에서 손에 꼽을 사건이 맞는데, 그때의 나는 무슨 생각으로 일과 연재 계획만 잔뜩 써놓은 걸까?






일반적인 장기연애의 끝이 그렇듯, 서로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했기 때문에 이 이별에 대한 슬픔이나 아쉬움 같은 감정은 크지 않았다. 그러나 이와는 별개로, 당시의 나는 없이도 내가 밴쿠버에 남아있어야 하는 이유가 필요했고, 있어야만 한다고 생각했고, 분명 있을 거라고 믿었다. 그렇게 그 이유를 그 사람 말고도 내가 여기에서 좋아했던 것들 -일과 글- 에서 찾으려고 했던 거였고.



2월 : 일과 글

나는 미친 듯이 브런치 연재에 몰두하기 시작했다. 지금은 연재를 멈춘 [밴쿠버 어학연수 가이드북] 도 바로 그 시기에 시작했다. 사람은 다른 사람으로 잊는 거라지만, 나는 사람이 아닌 다른 돌파구를 원했고, 그 사람 아닌 다른 사람에게는 내 진심을 주고 싶은 마음이 도무지 들지 않았다. 다른 남자 옆에 여자친구로 서있는 내가 상상조차 되지 않았고 그러고 싶지도 않았다. (5월 키워드가 새로운 연애이긴 하지만, 당시에는 진짜 그랬다.)


2월에 썼던 일기를 훑어보니, 평일에는 일 얘기가 대부분을 차지할 정도로 일에 진심이었던 내가 그대로 보인다. 유학 상담일이 힘들어도 힘들지 않은 이유, 유독 재미있게 느껴지는 일, 반대로 재미없고 하기 싫은 일, 고객들이 경쟁사가 아닌 우리에게 오게 하는 방법 등.


하루 24시간 중 8시간을 내가 좋아하고 잘하는 일에 할애할 수 있음에 만족하고 감사해하면서도, 더 잘할 수 있는 방법에 대해 끊임없이 고민했다. 그렇게 올해 2월은 내 삶에서 오랫동안 일정 부분을 차지하고 있던 한 사람의 존재가 빠진 만큼, 그 부분을 일과 글로 채웠던 시기였다.




3월 : 도파민

장기연애가 처음은 아니었다. 그전에 만났던 사람과도 마찬가지로 4년을 만나고 헤어졌다. 그때 했던 다짐이 있다. '어차피 이렇게 될 거라면, 굳이 한 사람을 오래 만날 필요가 없겠다. 앞으로는 적당히 1-2년 정도만 만나고 헤어져야지.' 막상 좋은 사람을 만나니 물거품처럼 사라진 생각이지만.


한 사람과의 안정적인 긴 연애가 끝이 나고 일정 기간의 회복기가 지나면, 내게는 어김없이 '그 시기'가 찾아왔다. 바로 도파민 중독기. 가장 친한 친구는 이 시기의 나를 보고 '고삐가 풀렸다' 라는 표현을 썼다.

연애의 세계로 다시 들어갈 생각은 없고, 가벼운 만남들만 즐기는 시기. 깊은 관계가 아닌 아주 얕은 관계만 추구하는 상태. 연애도 아니고, 썸조차도 아닌, 단발성 데이트만 해대는 때라고 할 수 있겠다. 그게 무슨 의미가 있냐고 묻는 사람도 있겠지만, 내가 생각하는 도파민 중독 시즌의 포인트 자체가 '의미 없는 재미 추구' 이다. 싱글인데 뭐 어때?



4월 : Situationship

Situationship

> Situation + Relationship의 합성어. 연애 관계처럼 보이지만 명확히 규정되지 않은 애매한 관계를 뜻한다. 연인이라고 부르기에는 부족하고, 단순한 친구라고 하기에는 얽혀 있는 상태. 즉, 관계의 방향이나 약속이 불분명한 “썸 이상, 연애 이하”의 회색지대를 가리킨다.


4월의 키워드는 Situationship. 3월의 그 시즌에 알게 된 남자였다. 한동안은 연애 생각이 없음을 상대에게 초반부터 분명하게 이야기해서였을까, 우리는 한 달 내내 일반 연인들과 다름없는 즐거운 시간을 보냈지만 딱 거기까지였다. 이 사이에 명확한 관계정의 같은 건 없었다.


그렇다고 해서 그 어떤 문제도, 불만도 없었다.

나도 즐겁고 너도 즐겁고, 그럼 된 거 아닌가?


처음에는 그 사람의 다정하고 유쾌한 면이 좋아 만나기 시작했지만, 어느 순간부터 마음이 식었다. (나는 집착이나 통제 같은 것들을 도저히 견디지 못한다.) 그렇게 그 회색 관계를 단칼에 끊어냈다.


만난 기간이 그리 길지 않아서였을까, 공식적인 연인 관계가 아니여서였을까. 별 타격이 없었다. 올해 초 4년의 장기연애를 끝낸 내게 한 달의 situationship 종료는 정말 말 그대로 아무것도 아니었다.



5월 : 새로운 연애

연애를 한번 시작하면 오래 지속하는 편이다. 그래서 내 전체 연애 횟수-3회-를 들은 사람들은 다들 비슷한 반응을 보인다. 우와, 서른 살인데 연애를 그것밖에 안 해봤어요? 각각의 연애기간을 듣고 나면 그제야 이해한다는 표정을 짓는다.


짧게 만나고 헤어질 거면 처음부터 시작을 안 하는 게 낫지. 나는 오래 만날 수 있을 것 같다는 확신이 들어야 비로소 연애로 넘어간다. 그래서 연애를 시작하는 데에 있어 굉장히 신중하다. (바로 이전 달에 애매한 관계가 더 편하게 느껴진 이유이기도 하다. 깊게 생각하고 이것저것 따질 필요 없이 적당히 타협하면 되니까.)


그런 내가, 올해 5월, 나답지 않게 마음이 초고속으로 열리는 신기한 경험을 했다. 결론부터 말하면, 서로의 존재를 알게 된 지 10일 만에 나는 새로운 사람과 새로운 연애를 시작했다. 이 정도면 그냥 금사빠인 게 아니냐고 물어도 할 말 없는 일수이지만, 마음이 그렇게 급속도로 열린 데에는 내 나름의 이유가 있었다.


1. 어딘지 모르게 든든했다.

2. 성향이 비슷한 덕분에 내가 원하던 대화가 됐다.

3. 1번과 2번이 주는 느낌으로 인해 “이 사람이라면 언젠가 충분히 깊은 사이가 되면 내가 의지해볼 수도 있겠다” 라는 기대감이 들었다.


이전의 관계들에서는 쉽게 충족되지 못했던 부분들 이어서였을까. 낯설고 설렜다. 내 마음속 깊은 곳에 자리 잡고 있었던 욕구들이 하나하나 정확하게 건드려지는 느낌이었다.



6월 : 테트리스

그래도 10일은 너무 빨랐던 건가? 공식적인 연애로는 쉽게 들어왔지만, 내 뇌와 내 마음이 이 관계의 진전 속도를 따라가지 못했다. 내 안의 연애스위치 어디가 고장이라도 난 듯 한 번에 켜지질 않았다.


나는 평소 연애 같았다면 절대 하지 않았을 대형 실수를 이 연애의 초반에서부터 하게 됐다. 정황상으로만 보면 상대가 당장 헤어지자고 해도 할 말이 없는 상황이었지만, 그는 (화는 심하게 냈어도) 헤어지자는 말은 하지 않았다. 누구보다 자기만의 기준이 뚜렷한 사람이라는 걸 알고 있었기에, 이때의 용서는 내게 굉장히 크게 다가왔다.


‘그냥 술 먹고 실수한 여자로 남을 수도 있었는데, 내 가치를 더 크게 봐준 거네.’


‘절대 실망시키지 말아야겠다.’


언제쯤 켜지나 했던 연애 스위치에

제대로 불이 들어오는 순간이었다.




우리는 공통점이 꽤 많았는데, 그중 하나는 둘 다 ‘상대방이 맞춰주는 연애’에 익숙하다는 것이었다. 이렇게 받는 게 익숙한 사람들끼리 만났을 때 어떤 일이 벌어지냐면,


나를 좋아한다면서 왜 내가 원하는 걸 못해줘?
너야말로 나를 좋아하면 있는 그대로의 나를 봐줘야 하는 거 아니야?

와 같은 두 사람의 팽팽한 입장 차이가 발생한다.


이런 류의 갈등이 몇 번 있다 보니, 나는 이 사람이 원하는 걸 못해주는 부족한 여자친구라는 아주 속상한 결론을 스스로 내게 됐다.


나는 내 속마음을 차분하게 털어놓았고, 그는 처음부터 끝까지 귀 기울여 들어주었다. 어떻게든 내가 느낀 속상함을 '해결' 해주기 위해 (풀어주는게 아니라) 자기 나름대로 최선을 다해 ‘분석’하는게 (공감이 아니라) 전화를 뚫고 느껴졌다.


너 나한테 부족한 여자친구 아니야. 난 그냥 이 말 한마디면 됐는데. 정작 중요한 핀트는 다 놓친 노력에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났다. 얘는 진짜 로봇인가?


그날 밤의 속상함 고백을 기점으로, 그는 신기할 정도로 내게 다정해졌다. 또 한 번의 전환점이었다. 관계에서 속상하다고 이야기할 때 피하지 않고 진지하게 들어주고, 자기 방식대로 노력하는 모습. 차가운 사람인줄 알았는데 마음이 열리니 다정하게 말하고 행동하던 장면. 둘만 아는 이런 따뜻한 순간이 쌓일 때마다, 내 마음이 이제는 진짜로 열리기 시작했다.



실수하고, 용서하고, 용서받고

서운함을 꺼내고, 잘 들어주고

속상한 마음을 풀어주고, 다정해지고.


내게 6월은, 비슷한 듯 다른 둘이 만나 서로를 포기하지 않고 하나둘씩 맞춰가는 과정이었다.

마치 잘 맞물리는 테트리스 블록들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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