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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명선 Mar 15. 2023

딸의 방에서 디올을 줍다

정리의 순기능

 갑작스러운 꽃샘추위가 찾아와 발이 묶인 날, 작은딸의 방을 정리하기로 했다.   


 딸은 모 기업의 인턴을 하느라 지난 학기를 휴학하고 집에서 살았는데 재택근무가 반이상이었다.

 새 학기가 되자 복학해서 학교 기숙사로 돌아갔기 때문에 내 맘대로 할 기회다.


 그 방에는 덩치가 제법 큰 철제 수납장이 있었는데 당장 안 쓰지만 버리기 아까운 이것저것을 다 쑤셔 넣고 잊어버리기에 딱 제격인 문제아였다. 그 빌런을 빼 버리니 숨통이 트이는 것 같았다.


 굳은 의지로 서서 공부하겠다며 딸이 사 들인 키높이책상도 눈엣가시다. 지금은 원래의 기능으로 안 쓰는 것 같아 확 버릴까 하다가 그래도 방주인에게 물어보고 처리하려고 일단 목숨만은 살려두었다.

  

미니 창고였던 이케아 수납장 축출


  

 딸은 옷장 대신 방에 딸린 작은 베란다에 스탠드 행거와 서랍장을 놓고 옷을 수납한다.

 환절기에 주부들의 가장 큰 일거리는 옷정리다. 덩치 큰 겨울 옷을 세탁해서 수납해야 하고 봄여름 옷들은 꺼내서 선별하고 묵은 흔적을 정리해야 한다.

 

 딸의 옷박스에서 앞으로 입을 만한 것들을 꺼내 스타일러에서 손질한 후 걸어두었다.   

 만약 매일 쓰는 방이라면 봄을 맞아 책상도 바꿔주고 좀 더 적극적으로 뒤집고 싶었지만 거의 비어있는 방이니 공간을 환기하는 정도로 일을 마쳤다.


 

     

가벼운 옷들로 바꾼 베란다 옷장






 자주 쓰는 화장품들을 기숙사로 다 가져가고 거의 빈 서랍들을 뒤지다가 립글로스를 발견했다.

 얼마 전 모임에서 멋쟁이 언니가 꺼내 바르던 그 여리한 분홍 케이스의 디올 립글로스다. 케이스가 예뻐서 나 같은 화장품알못 바로 알아볼 수 있었다.


 색깔도 무난하고 아직 반이상이나 남았다.

 고것이 이걸 기숙사에 가져가지 않았다는 건,


 1. 이것의 존재를 까먹었거나 모른다.

 2. 설령 이것을 보았더라도 이제 별 필요 없다.


 는 뜻일 것이다.


 평상시에 나는 화장을 거의 하지 않기 때문에 (선크림 혹은 비비크림을 바르고 립글로스를 바르면 끝) 일 년에 몇 번 안 쓰는 포인트메이크업 제품은 다 작은딸이 잘못 샀다고 넘겨주거나 싫증이 나서 안 쓰는 것들을 얻어서 쓰고 있다.


 멋쟁이 언니 쓰는 디올 립글로스는 이제 내 것이다.  

 이것이 바로 정리정돈의 순기능이 아닐까 싶다.

 

 문득, 옛날에 엄마가 아빠 주머니에서 지폐를 발견하고 엄청 좋아하던 기억이 난다.

 다들 카드를 쓰는 요즘은 그런 재미가 없어서 좀 아쉽다.  


  

찾아보니 컬러 이름이 '서울 뭐뭐'다.  한국 특판용 색상인가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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