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 02. 19
제목이 너무 마음에 들어서 바로 구매를 눌렀다. 예약구매로 들어가서 다른 책들보다 하루 더 늦게 도착했다. 미대는 아니지만 미대랑 가까운 과를 나왔고, 미대 입시를 했던 사람으로 예술은 항상 궁금한 영역이었다. 하지만 시험을 위해 외운 르네상스와 초현실주의, 인상주의 같은 것들은 잊어버린지 오래였고, 그저 거장의 이름 몇몇만 기억하고 있었다. 그 사람들이 뭐때문에 유명한지는 모르고, 사람들이 명작이라고 말하는 대표작들만 줄줄이 외울 뿐이었다.
그런 거장의 작품을 보다가 갑자기 사탕을 쌓는다던지, 누군가와 마주하고 가만히 있는다던지 하는 현대예술은 이해하기 어려웠다. 정확하게 말하면 배운적 없기 때문에 더 받아들이기 힘들었던 것 같다. 그러다 어느 날 온전하진 않지만 대충이나마 받아들이게 된 문장이 있는데, 바로 '현대 예술은 작품 자체를 보는게 아니라 작가의 인생관을 보는 것이다' 라고 누군가가 인터넷에 작성한 걸 본 이후였다. 이 문장을 보게 된 이후로는 도대체 왜 저걸 몇억 주고 사는거야? 같은 말은 하지 않게 되었다. (이 경험은 전에 마우리치오 카텔란 전시회를 보러 갔을 때도 스스로의 불평불만을 잠재우는데 큰 역할을 했다.)
그렇게 어중이떠중이 예술비평가가 되어있던 상황에 이 책을 접하게 되었다. 이 책은 아주 친절하게 예술을 우리의 삶으로 가져오는 방법을 알려준다. 근데 그걸 10년 이상 누구보다 예술을 가까이에서 접한 사람이 설명해주니 신뢰가 간다.
"탁 트인 이쪽 바깥에서 걸작들과 온종일 시간을 보내는 사람들은 오히려 우리 같은 싸구려 근무복을 입은 사람들이었다."
그리고 형의 죽음으로 누구보다 삶의 의미를 잃은 사람이 예술을 통해 치유받고, 권태로워하고, 결국엔 다시 예술인 과정을 보다보면 저 직업에 대한 동경이 절로 생긴다. 내가 저 상황이라면 저 직업을 택할 수 있었을 까 부터 시작되는 '만약에~' 상황이 펼쳐지면 나는 절대 선택하지 못할거라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유난히 소란스러웠던 2월을 생각하면... 그런 조용함과 홀로 있는 시간이 더더욱 부럽기는 하다.
누군가를 잃었다는 건, 슬픔은 남겨진 사람의 몫이라는 걸 십여년 전에 배웠다. 그래서 그런가 저자의 입장에 이입이 너무 많이 되었다.
"누군가에게 하늘이 무너지는 듯한 일이 벌어졌다고 한들 세상이 멈추는 일은 없으리라는 증거들로 넘쳐났다."
"말로 표현하기에는 너무 냉혹하고 직접적이며 가슴을 저미는 바위 같은 현실 말이다."
"세상 속에서 앞으로 나아가기 위해 애를 쓰고, 꾸역꾸역 긁고, 밀치고, 매달려야 하는 종류의 일은 할 수가 없었다. 나는 누군가를 잃었다. 거기서 더 앞으로 움직이고 싶지 않았다."
"온종일 오로지 아름답기만 한 세상에서 시간을 보낸다는 속임수가 과연 가능한 것일까?"
십여년전의 나도 메트로폴리탄에서 경비로 일했다면, 좀 더 성숙하게 이겨낼 수 있었을까? 아마 노동법에 걸려서 안됐을거다. 고작 고등학생이었으니까.
"그 모든 소통에는 내가 세상의 흐름에 다시 발맞출 수 있도록 돕는 격려의 리듬이 깃들어 있다. 비탄은 다른 무엇보다도 그 리듬을 상실하는 것이다. 누군가를 잃고 나면 삶에 커다란 구멍이 뚫리고, 한동안 그 구멍 안에 몸을 움츠리고 들어가 있게 된다."
이 부분을 읽으면서 고등학교 친구 생각이 많이 났다. 시간이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때, 나는 무조건 괜찮아야 했다. 조금이라도 흐트러진 모습을 보이면 받는 무조건적인 동정이 너무 싫었고, 나의 슬픔으로 '내가 너를 이만큼이나 배려해'같은 타인의 선민의식은 더더욱 싫었다. 내가 없으면 빨래도 안하는 가족(이 맞나)을 돌보며 나를 지웠고, 주변 어른들이 이제 너가 가족을 잘 챙겨야해 라는 말에 네 알겠습니다 라고 감정없이 대답하는 나날들이었다. 그래서 나를 돌볼 시간이 없어 내가 무슨 상태인지도 잘 몰랐다. 그러던 어느날, 친구가 나를 조용히 복도 끝으로 부르더니 너 요즘 좀 이상해. 라고 말했고, 나는 그 말에 엉엉 울며 나 사실 안괜찮아. 근데 괜찮아야 해서 그런가봐. 라고 거의 울부짖었다.
사실 고3때의 기억은 잘 없다. 이 이후로 내가 괜찮아졌는지 더더욱 안괜찮아졌는지도 기억이 안난다. 누군가 매직으로 칠한 것 처럼 그 부분만 기억이 없다. 아마 그 이후로 나는 안괜찮아서 친구랑 서서히 멀어졌던 것 같기도 하다.
(나이가) 어른이 된 지금도 나는 괜찮아야만 한다. 이건 습관이자 버릇이 됐다. 그리고 나의 슬픔은 나만의 슬픔이란걸 계속해서 상기시킨다. 남들은 나에게 그렇게까지 관심이 잘 없다.
"그래서 페트릭." 형이 속삭였다. "잘 지냈어?" 우리는 둘 다 웃음을 터뜨렸다.
하지만 삶이 팍팍할 수록 쓸데없는 말을 하고 헛헛한 농담들을 한다. 매일 되뇌이는 말 중에 하나는 '울면 다큐, 웃으면 예능'이다. 다큐가 되기 싫으니까 예능을 자처한다. 슬플때 웃는 자가 일류라고도 하니, 일류가 되려는 마지막 발악인 셈이다.
"광활하게 펼쳐진 세상의 맨 앞자리를 이 성스러운 오합지졸들에게 내주었다. 가끔 나는 어느 쪽이 더 눈부시고 놀라운 것인지 잘 모르겠다는 생각을 한다. 위대한 그림을 닮은 삶일까, 아니면 삶을 닮은 위대한 그림일까."
이제는 삶이 팍팍할 때 눈 돌릴 곳이 하나 더 생긴 것 같다.
"예술이 우리에게 힘을 발휘하기까지는 시간이 필요하다."
이제서야 나에게 예술이 힘을 발휘하나보다. 개인적으로 제일 좋아하는 작품은
이것이다. 높은 파도지만, 견딜 수 있을 것 같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답답함이 해소되는 것 같은 느낌이다.
"많은 경우 예술은 우리가 세상이 그대로 멈춰 섰으면 하는 순간에서 비롯한다. (중략) 예술가들은 그 덧없는 순간들을 기록해서 시간이 멈춘 것처럼 보이도록 한다. (중략) 세상이 이토록 형형색색으로 화려하고 충만하며, 그런 세상이 존재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존재하며, 사람들이 아름다운 것들을 정성을 다해 만들려는 본성을 가지고 태어났다는 사실이 신비롭다."
아마도 나에게는 화려한 세계가 존재하는 게 필요한가보다. 전에 읽은 동물동장이 생각나는 대목이다.
좋은 책이다. 경비원으로 처음 일할 때 스스로에게 건네는 위로도 좋았지만, 권태를 느끼고 삶이 변화했을 때 보는 시각에서 더더욱 매력을 느꼈다(뒤로 갈수록 재밌었다는 뜻). 책에서 말했던 것 처럼 나도 일상생활에 예술을 끌어오는 연습을 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