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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씨방 Jan 10. 2019

내 가족의 나이 듦에 대해

주머니탐구생활#08. 손가락 접기

"동생은 다섯 살, 형아는 여덟 살이 됐네."

2018년의 마지막 날을 조카들과 보냈다. 새해를 어떻게 설명해주면 좋을까 고민하다가 나이를 한 살씩 더 먹는 거라고 말했다. 조카들에게 엄마와 아빠, 이모들, 할머니와 할아버지의 나이도 차례차례 이야기해주려고 했다. 그런데 할머니와 할아버지, 다시 말해 우리 엄마와 아빠의 나이가 한 번에 떠오르지 않았다. 주머니에서 손가락을 접었다가 폈다.    


몇 해가 지나도록 우리 할머니는 나이를 먹지 않았다.

누군가 내게 할머니의 나이를 물어보면 “여든셋”이라고 답했다. 언젠가 엄마가 얘기해준 나이였다. 같이 산 지 20년이 되도록 할머니는 그냥 할머니였다. 그래서인지 누군가 할머니의 나이를 묻는 것이 이상하게 느껴졌다. 내가 대학에 가고 그로부터 몇 년이 지난 후 할머니가 돌아가셨다. 그때부터 지금까지 할머니의 나이는 여든셋에 멈춰 있다.  

   

그리고 2018년 마지막 날에 내가 엄마를 엄마로, 아빠를 아빠로만 생각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아마 엄마, 아빠가 예순을 넘기면서부터였던 것 같다. 환갑이라는 나름의 큰 가족 행사를 넘긴 이후 내 부모의 나이를 굳이 세지 않아도 괜찮다고 느껴서일까.     


사람의 나이를 잊었다는 건 그 사람이 지내온 과정에 무심하다는 말일까.

잘 모르는 사람과 대화를 나눌 때는 그 사람의 나이가 크게 중요하지 않다. 오히려 나이를 잊었다는 말이 칭찬이 될 수 있다. 하지만 그 대상이 가족이라면 어떨까. 나는 언니의 대학교 시절부터 두 아이의 엄마가 된 지금까지의 과정을 모두 기억하고 있다. 그러나 엄마, 아빠를 떠올리면 피부에 와닿는 사건이 없다. 일하는 엄마와 일하는 아빠. 고기를 먹지 않는 엄마와 입이 거친 아빠. 내게는 그런 엄마와 그런 아빠.    


젊은 엄마와 아빠의 모습, 그러니까 ‘박 씨와 김 씨가 엄마, 아빠가  과정’을 잘 모른다. 언니의 말을 빌리자면 “막내라서 그만큼 젊은 시절의 엄마, 아빠를 오래 보지 못했기 때문”이며, 내 생각을 말하자면 내게 일어나는 일들에만 민감했기 때문이다. 방문을 닫고 혼자 골몰하는 동안 엄마, 아빠에게 일어나는 크고 작은 사건에 무심해지고 만다.     


얼마 전 위경련으로 응급실에 갔다. 집에 돌아오자, 엄마는 “나도 그때 그랬잖아”라며 내게 이불을 덮어줬다. 나도 모르게 “그때 엄마가 그랬어?”라는 말이 나왔는데, 그 순간 이불을 머리끝까지 뒤집어쓰고 싶었다.    


내가 나이를 먹으면서 무심해지는 것 중에 엄마, 아빠도 있다는 걸 알았다.     


나에게는 나 자신만 있는 게 아니구나.

엄마의 얼굴을 봤는데 조명 때문인지 주름이 깊어 보였다. 언젠가 봤던 엄마의 젊은 시절 사진이 생각나 오래 그 낯선 얼굴을 봤다.    


한 살 두 살 나이를 먹으면 성숙해질 거라 생각했다. 성숙해진다는 것의 기준은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적어도 혼자 골몰하는 것만은 아니겠구나 싶다. 자신이 아플 때 무관심했던 딸에게 이불을 덮어주는 사람이야말로 성숙한 사람이겠구나 싶다.    


엄마, 아빠의 나이 듦을 바라볼 때 나도 성숙해질까.

닫힌 방문을 열고 묻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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