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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심심 Feb 14. 2019

#10. 잡채가 너무 많다

 설날 아침. 간장을 머금어 반짝이는 당면 위로 두툼하게 잘린 고기와 시금치, 당근 등이 올려져 있다. 막 볶아내 따뜻한 김이 올라온다. 잡채 곁에는 바삭하게 튀겨 노릇노릇한 조기 세 마리가 과거를 회상하듯 입을 벌린 채 더 이상 눈을 껌뻑이지 않고 누워있다. 사이다가 들어가 톡 쏘는 단맛이 나는 물김치와 시장에서 파는 각종 전들. 마지막으로 사골 국물에 한 입 베어 물면 육즙이 터져 나오는 뚱뚱한 고기만두를 넣고 끓인, 노랗고 하얀 지단이 올라간 떡국까지. 그리고 고춧가루가 듬성듬성 보이는 겉절이가 함께 놓여 있다.


 몇 년 전부터 우리는 제사를 지내지 않기로 했다. 기일에만 간단히 제사를 지내고 각종 명절에는 우리 먹을 것만 준비했다. 그런데 설날 아침 밥상을 차리면서 어머니가 다시 제사를 지내고 싶은 게 아닌가 생각했다. 둘이 먹기에는 많은 종류와 양의 음식이 올라오는 게 아닌가. 옆집 할머니라도 초대하려는 걸까. 옆집 할머니가 봤다면 아이고 팔순 잔치를 여기서 하네 하며 너스레를 떨었을 것이다.


 작은 삼성 텔레비전에서 나오는 설특집 방송을 배경으로 어머니와 둘이 밥을 먹었다. 명절이라고 특별하지 않아 오히려 좋다. 오랫동안 이렇게 지냈기에 익숙하기도 하고.

 골라먹는 재미가 있는 아이스크림 가게도 아닌데 떡국 한 숟갈 입에 넣고 반찬을 골라먹는 재미가 있다. 모든 찬이 떡국과 어울린다. 이것저것 집어먹어도 줄지 않는 게 하나 있다. 잡채. 잡채는 아무리 집어 먹어도 줄지가 않는다. 내가 잡채를 집어 접시에 옮긴 뒤 입에 넣으려 고개를 숙일 때마다 누군가 몰래 내가 집어간 양만큼 슬쩍 가져다 놓는 게 아닌가 의심할 정도로 말이다. 아무리 생각해도 다른 반찬에 비해 잡채 양이 너무 많다. 관리사무소에 내려가 동네방네 방송을 해서 어르신들을 모아놓고 한 접시씩 드려도 우리 집 접시가 모자라지 잡채가 모자랄 것 같지는 않다.

 잡채만 왜 이렇게 많냐고 물어보면 될 것을 이상하게 묻고 싶지 않았다. 어머니께 잡채 맛이 좋다고 여러 번 말했을 뿐이다.


 밥을 다 먹고 상을 치우는데 현관에 놓인 신발이 눈에 들어왔다. 외출할 때 신는 신발들은 신발장 안에 들어가 있지만, 상시 신는 슬리퍼 등은 현관에 놓여 있기 마련이다. 예전에는 현관에 세 개에서 네 개까지 있던 슬리퍼가 이제는 하나뿐이다. 어머니가 신는 검은색 삼선 슬리퍼 하나가 곁에 아무도 없음에도 줄 맞춰 가지런히 놓여있다. 나머지 신발들은 보이지 않지만 곁에 있다는 듯 정확히 그 사이에. 가지런히.


 어머니가 됐다 하시지만, 빠르게 수세미에 주방 세제를 눌러 짜서 설거지를 한다. 온수를 틀어 접시에 묻은 양념들을 닦아 따로 모아 두고 다시 하나씩 꺼내 수세미로 문지른다. 어머니는 못 이기는 척 방에 들어가 누구누구는 전화도 없네 하며 오지 않는 전화를 기다린다.

 나는 설거지를 하느라 굽힌 등을 펴고 고개를 뒤로 젖힌 채 큰 목소리로 저녁에는 밥에다가 고추장하고 참기름 하고 잡채를 넣어 잡채밥을 만들면 맛있지 않겠냐고 어머니께 묻는다.


 어머니가 어딘가 힘 빠진 목소리로 "좋지"하고 말한다. 나도 따라서 "좋지" 한다. 사람 대신 잡채가 북적거리는 설날 아침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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