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대학교 친구 아버지의 부고 소식을 전해 들었다. 친한 친구 둘이 부부이고 그중 장인이 소천하셨다는 내용이었다. 먹먹하게 문상을 갔고, 발인날 운구를 부탁받았다. 참 오랜만에 운구를 하게 되었다.
대학생 시절에 운구를 해봤으니, 벌써 20여 년 전 이야기가 된다. 그때는 관을 들고 장지의 완만한 오르막을 500여 미터 걸어갔던 듯하다. 그 당시 팔이 너무 아팠고, 관을 놓치기라도 할까 봐 노심초사했었다.
정말 오랜만에 운구를 부탁받았는데, 당일 아침에 늦잠을 자버렸다.
7시 반까지 와달라고 했고, 발인이 8시라고 했다. 그런데 눈을 뜨니 7시 23분 정도!!!!
차로 밟으면 40분가량 걸린다고 치면, 8시 10분 도착이었다. 일단 옷을 입고 달렸다.
다행히도 8시 8분 정도에 도착했는데, 막 운구용 흰색 장갑을 나눠주고 있었다. Safe!
장례식장에서 화장장까지 가는데, 대부분 차량으로 이동하기 때문에 운구로 이동할 거리는 길지 않았다.
장례식장에서 운구차량까지 한 번. 운구차량에서 화장장까지 한 번.
짧은 거리 2번을 이동하는 것이 전부였다.
각각 이동할 때, 나는 관의 무게를 느끼기도 전에 내려놓았다. 그 과정에서 가족들이 관이라도 쓰다듬어볼 만한 여유가 없었다.
운구 차량에 싷자마자 화장장으로 출발해야 했고, 화장장에 도착해서는 자기 순번이 될 때까지 기다려야 했다. 앞 뒤로도 대기 인원이 많아서 한 가족, 한 가족의 이별에는 크게 신경써 줄 수 없는 듯한 시스템이었다.
운구 차량에서 화장장 운반구(바퀴가 달린 침대 같은 형태)에 관을 올리고 이동했다. 그리고 화장장 안으로 인계를 했다. 그 과정에서도 아무도 관을 쓰다듬어 주거나 할 분위기가 없었다. 화장장의 로에 관이 들어가고 문이 닫힌 후로는 대기실로 이동해서 기다렸다.
물론 내가 이 가족들의 장례 절차 일체를 지켜보지 않았다. 내가 경험하는 이 시간 외에 많은 시간을 애도하고 서로 위로했을 수 있다. 하지만 화장을 하는 일련의 과정은 마치 공장에서의 공정을 따르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아래의 과정이 빈틈없이 설계되어서, 들어온 사람들은 잠시 슬픔을 묻어두고, 다른 사람들에게 피해가 안 가도록 빠릿빠릿하게 움직여야만 할 것 같았다.
수도권에는 화장장이 부족하여 몹시 혼잡한 점은 이해한다. 그럼에도 고인이 가는 길이 좀 더 친근하고 애틋하면 어떨까 하는 아쉬움을 느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 하늘이 너무 예뻐서 달리는 차에서 창문을 열고 찍었다. 하늘나라에서도 제 친구들 잘 지켜봐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