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트 브랙에서 친구들과 어울려 놀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그동안 서둘러 남쪽으로 내려오느라 미뤄두었던 일들을 하며 배를 차근차근 준비했다.
재료만 사놓고 미루고 있던 레이지 잭도 설치했다. 마스트의 중간 지점까지 올라가 작업을 해야 했는데, 좀 특이한 방법이었기 때문에 올라가서 손으로 매듭을 맬 수밖에 없었다. 안전줄을 매고 마스트에 올라가는 게 난생 처음이었다. 처음엔 아무 생각이 없다가, 작업 중 손에 든 부품 하나를 놓치니 그제야 갑자기 겁이 확 났다. 오밤중에 배추 떠내려가던 순간이 번개처럼 뇌리를 스쳤다. 아슬아슬하게 손에서 놓치면 영영 다른 세계로 떠나가는 걸 눈으로 좇는 안타까움... 어쩌면 배 타는 동안 잔잔하게, 그리고 무의식적으로 늘 가지고 있는 불안함인 것 같기도 하다. 마스트 올라가는 건 무서웠지만, 레이지 잭이 있으니 이제 세일 내리는 작업이 더 안전하고 쉬워질 것이었다.
존의 진단에 의하면, 우리 배에서 엔진 벨트가 자꾸 얇아지고, 심지어 끊어지는 사건까지 벌어진 이유는 벨트가 걸리는 풀리가 녹슬었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래서 하루는 팔 걷고 풀리의 녹을 사포로 갈아내고 깨끗이 청소했다. 지렛대까지 이용해 벨트에 과한 텐션을 준 것도 잘못이라고 했다. 트랜스미션 오일이 새는 고질적인 문제에 대해서는, 우리가 쓰는 오일이 너무 묽기 때문일 거라는 의견도 주었다.
출항 때부터 불안불안 안고 온 조타 시스템 문제에도 도움을 요청했다. 그동안 적극적인 조치를 취하지 않은 데에는 포트 앤젤레스에서의 부정적인 수리 경험과 무사안일주의의 콜라보가 있었다. 그런데 멘도시노에서 그 난리를 겪는 내내 '지금 조타대가 어떻게 된다면?'이라는 무서운 상상에 시달린 다음, 무조건 처음 입항하는 곳에서 조타 시스템은 점검하고 떠나기로 마음먹었다.
존은 와이어가 느슨한 것 외에는 특별한 문제가 보이지 않는다며 손수 와이어를 교정해 주었다. 배도 나온 노인이 머리를 아래로 향하고 엎드린 자세로, 그 와중에 선주에게 방법을 가르친다고 중간중간 멈추고 설명도 하면서. 너무나 불안했다.
"존, 나이도 있고 배도 나온 사람이 그런 자세로 오래 있으면 우리가 너무 불안해..."
괜히 한 마디 던졌다가 엎드린 채 웃음이 터진 존의 혈압이 더 오를 위험만 키웠다. 존은 오디세이 호의 연료통을 빌려주고 근처 주유소까지 차로 데려다주며 주유를 도와주기도 하고, 리깅에 대한 조언도 해 주었다. 배에 대해 잘 아는 존이 호라이즌스 호의 이런저런 문제들을 살펴봐 주니 이렇게 안심일 수가!
가장 중요한 준비는 기상 정보와 항해 계획이었다. 포트 브랙에서의 체류가 길어질수록, 여기서 머무느라 지체된 시간을 만회하기 위해 이제 야간 항해를 시작해야 한다는 사명감이 커져만 갔다. 안전한 밤 항해를 위해 해안에서 충분히 떨어져야 하는 거리가 있는데, 1박 2일 항로는 아무래도 효율이 떨어지는 것만 같았다. 2박 3일도 좀 아깝고, 컨디션만 괜찮으면 3박 4일 연속 항해가 가장 나은 가성비 같아 보다. 그래서 400해리 떨어진 샌 루이스 오비스포San Luis Obispo까지 한 타에 주파하는 항로를 이리저리 시뮬레이션해보기 시작했다.
우리의 급발진하는 의욕에 제동을 걸어준 건 장피에였다. 샌 루이스 오비스포까지 한 번에 가겠다는 야심(만) 찬 계획을 듣더니, 정색을 하고 진심 어린 조언을 해 주었다.
"그래도 첫 번째 나이트 세일링이면 하룻밤만 하도록 해. 밤에 항해하면 사람의 멘탈이 흔들릴 수 있어. 한 번은 내 딸이랑 둘이 항해하는데, 내가 두 시간은 자 둬야 해서 딸이 딱 두 시간 교대를 섰거든. 그런데 얘가..."
특유의 진지한 눈빛을 유지한 채, 귀 옆에 손가락으로 천천히 원을 돌리며 '미쳤다'는 제스처를 잠시 취하더니,
"두 시간 뒤에 콕핏에 올라왔더니, 안고 있던 인형을 바다에 던졌다는 거야. 왜 그랬냐고 물어보니까, 바다가 너무 아름다운 곳이라 인형이 좋은 곳을 떠나지 않고 영원히 있을 수 있게 던져줬다고 하더라고..."
그리고는 다시 한번 귀 옆에 손가락으로 원을 돌렸다. 어린 딸을 데리고 대양을 건너며 배를 배달하는 프로 스키퍼 장피에가 하룻밤만 항해하라고 조언을 하니, 우리의 불꽃 튀던 2박 3일 연속 밤샘 항해에의 욕구는 그 자리에서 쉽게 사그라들었다.
장피에는 이 지역에서 항해하는 데에 필요한 일반적인 정보부터 멕시코 국경을 건널 때 서류 처리하는 구체적인 노하우까지 그 자리에 한참을 선 채로 알려주었다. 항해 정보를 주는 데에 이만큼 열성적인 사람은 드물 것이다.
사람과 사람
항해하기 좋은 바람과 바다가 일정 시간 이상 이어지는 웨더 윈도우weather window 예보가 명확해질수록 포트브랙에서 기다리고 있던 우리 배, 장피에의 배와 조반니&희진의 배는 출항 준비를 착착 해 나갔다. 그리고 내일은 드디어 디데이.
해가 뜨는 대로 출항해서, 1박 2일 항해로 포인트 아레나Point Arena와 같은 위험한 구간을 먼바다에서 지나친 뒤, 장피에와 조반니&희진은 샌프란시스코로 들어가고, 우리는 복잡하고 교통량 많은 샌프란시스코 베이를 지나쳐 그 바로 아래의 하프문 베이Half Moon Bay에 가 닻을 내리는 것이 계획이었다.
지도 북쪽, 긴 호수처럼 쑥 들어간 곳이 샌프란시스코 베이. https://www.thehableway.com/fascinating-day-trips-around-the-sf-ba
마지막 날.
낮게 발사되는 늦은 오후의 햇볕에 눈부셔하며 데크 위에서 일을 하고 있는데 등 뒤에서 존의 목소리가 들렸다.
존은 한 손엔 블록, 다른 한 손엔 오일통을 들고 배 앞에 서 있었다. 호라이즌스호에 대한 조언을 주고 배를 점검해 주는 요 며칠간, 존은 올 때마다 양손에 뭔가를 들고 있다. 이번엔 메인세일 리깅 문제에 도움이 될 만한 블록과, 너무 묽다는 트랜스미션 오일을 대체할 오일이 각각 오른손과 왼손에 당첨된 모양이었다.
주유 선착장이 없어 걱정하던 선주가 존의 친절한 제안으로 연료통을 가지고 근처 주유소로 출동한 사이, 나는 데크에 남아 이런저런 정리를 하고 있었다. 등 뒤에서 다이애나 목소리가 들렸다. 이번엔 다이애나도 양손에 뭔가를 들고 서 있었다.
다이애나가 가져온 꾸러미를 풀어 보니, 존과 다이애나 둘 다 좋아한다는 쿠키 한 꾸러미, 우리가 오디세이 호에서 보고 신기해했던 조명, 그리고 내 책이 들어있었다. 이 여행이 끝날 때까지 내가 책을 받아보지 못할 거라는 생각에, 아직 다 읽지도 못한 책을 선물한 것이었다. 우리와 짧다면 짧은 시간 동안 함께 시간을 보내던 사이사이, 우리가 좋아하던 것들을 눈여겨보고 기억하고 있었다고 생각하니 가슴이 먹먹해졌다. 호의와 깊은 관심, 내가 선물을 꺼낼 때마다 내 표정을 읽으려는 애정 어린 눈빛, 이 커다란 마음을 담을 만한 그릇이 나에게 있는지 알 수 없었다.
책을 다 읽은 뒤 저자 사인과 메시지를 받겠다는 선언에, 그간 무슨 메시지를 쓰고 사인을 할까, 고민이 많았는데, 이 책의 첫 장은 내 메시지 대신, 다이애나의 메시지를 담게 되었다.
알레씨아, 네 경험과 배움, 성장하는 자신감과 즐거움에 감탄을 금치 못하겠다. 그리고 네가 손에 쥐게 된 너의 첫 번째 책을, 그것도 중고로 선물하게 되어 영광이야. 멕시코, 그리고 그다음 어딘가까지 항해하는 데에 좋은 바람과 '쿨 헤드'가 함께 하길 바래. 다이애나 & 존, 세일요트 오디세이, 노요 하버, 2023년 8월 8일
나한테 줄 책은 사인해서 여기로 보내줘: XXXXXX, 솔트레이크, 유타 아참 그리고 스키 타러도 놀러 와!
내가 쓰려고 다듬어 놓은 문장은 다음과 같았다. 다이애나에게 선물할 책 첫 장에 쓸 계획이었다.
시간이 흐른 후, 딱 다이애나 같은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다: 용기롭고 진취적이지만, 따뜻한 사람.
오늘은 다이애나의 초대로, 오디세이 호에서 마지막 저녁 식사를 함께하기로 했다. 다이애나가 정성을 다해 준비한 저녁을 먹고, 우리가 따 온 블랙베리를 얹은 아이스크림을 마지막으로 먹은 뒤, 호라이즌스 호로 돌아와 출항 준비를 마무리했다.
내일 이른 새벽 떠날 예정이라 인사를 하지 못할 것이므로, 마지막으로 오디세이 호에 작별 인사를 하러 갔다. 그러나 참새 방앗간이 따로 있을까, 어느새 우리는 또 배 안에 들어가서 수다를 떨고 있었다. 그러다 이야기가 통신 장비로 흘러갔다. 교통량이 많은 샌프란시스코 베이를 지나는 항로이므로 통신장비는 안전을 위해 어느 때보다 중요할 터. VHF 채널 하나를 골라서, 존이 우리에게 송신하고, 우리가 그에 응답하는 라디오 테스트를 해 보기로 했다.
호라이즌스 호로 돌아가 테스트를 해 보니, 메시지는 수신하지만 우리가 응답하려고 하면 자꾸 라디오가 꺼지는 문제가 반복되었다. 어쩌다 이야기가 나와서 확인을 해 봤기에 다행이긴 하지만, 오랫동안 기다리고 준비하던 출항이 당장 내일 새벽인데 큰일이었다. 이제 코스트 가드에 구조 신청도 못 하게 되는 것인가.
결국 그 오밤중에 존이 호라이즌스 호로 출동했다. 라디오 뒤의 복잡한 전선들을 다 테스트해 보고 설정을 이리저리 만져보더니, 라디오 발신 문제는 충분치 않은 배터리 때문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하지만 AIS(자동 식별 시스템) 신호가 나가지 않고 있다는 문제를 추가로 발견했다. 위치, 진행 방향과 속도 등 주변 다른 선박들의 움직임을 파악할 수도 있고, 다른 선박에 우리 배가 보이게도 해 주는 장치이었다. 우리 AIS로 다른 배 정보는 확인할 수 있으나, 우리 배 정보는 내보내지 못하고 있었다. 시야가 없는 야간 항해에서 상대 배가 우리 배를 보지 못하면, 충돌을 방지할 적절한 조처를 할 수 없어 위험했다. 특히 샌프란시스코 베이 앞을 밤중에 지나가려면.
존은 이런저런 시도를 해 보며 차트 테이블을 떠나지 않았으나 문제는 해결되지 않았다. 결국, 자정이 훌쩍 넘어서야 오디세이 호로 돌아갔다. 피곤했을 텐데 자기 일처럼 늦은 시간까지 노력해 준 것이었다.
출항
어제 취침 시간이 너무 늦었다. 원래 06:00 출항 예정이었으나, 피로가 쌓인 상태로 첫 나이트 세일링을 하는 것보다는 한두 시간이라도 더 눈을 붙이는 게 좋을 것 같았다.
조반니&희진 배와 장피에의 배가 출항하는 모습을 보며 기상해서 출항 준비를 서두르고 있는데 존이 배 앞에 나타났다. 평소 기상 시간이 이르지 않은 것으로 알고 있는데, 어제 해결하지 못한 AIS가 마음에 걸렸던 모양이다. 이번에도 양손에 뭔가를 들고 있었다.
"어제 너희 배 전기 테스터가 별로인 거 같아서, 우리 배에 남는 거 하나 가지고 왔어."
우리 배에도 다른 종류의 전기 테스터가 하나 더 있었지만, 선주는 감사하며 받았다.
"지금 다시 시도해 볼 시간이 없겠지?"
일찍 일어나 다시 AIS 수리를 시도해 보려고 온 것이었나 보다.
계류줄을 풀고 출항하려는데, 아니, 이게, 웬!! 배가 앞으로 나가지 않았다. RPM을 높이 올리니 엔진이 굉음을 내며 용을 쓰지만 1노트 속도가 겨우 나올 뿐이었다. 그 사이 트랜스미션 오일이 떨어진 것 같았다.
선주가 급히 아래로 내려가 오일을 채우는 동안 조마조마하게 1노트 추진력으로 다른 배 사이를 피해 마리나를 빠져나왔다. 마리나 입구 근처 높은 곳에 올라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던 존이 출항하는 우리 사진을 찍는 게 보였다.
아련한 어리버리 친구들의 뒷모습, 마지막 순간까지 문제가 있었음은 존도 몰랐음
다른 두 배보다 한 시간 반이나 늦게 출항하게 되었다. 서로 AIS로 위치를 확인하고 VHF로 통신하며 함께 내려가기로 했는데, 우리 AIS는 고장 나 신호 송신이 안 되고, 다른 두 배와 VHF 통신 가능한 거리 이상으로 벌어지지 않도록 빨리 가고 싶은데 배 속도는 3-4노트 밖에 나오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