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사랑한 파리
필름이 돌아가는 소리가 어렴풋이 들리던 파리의 오래된 영화관이었다. 그 날의 날씨가, 그곳의 공기는 어떠하였는지 기억 저 편에서 조차 흐릿해진 날이었다. 영사막 속에는 파리 오데옹 부근의 어느 골목. 어둠 속 빛나는 가로등 아래 한 남녀가 서있다. 영화 속 주인공들은 짧지 않은 대화를 나눈 후 파리의 밤거리를 걷기 시작하였다. 자그마한 와인 한 병을 손에 든 채로.
“낭만에 와인이 없다니! 그것도 파리에서! 이게 말이 돼?”
와인 한 병을 두고 밤새도록 이야기를 나눈다는 것은 프랑스에 오기 전부터 생각했던 꽤나 낭만적인 것 중 하나에 속했다. 다소 유치하게 보일지라도 반짝이는 에펠탑이 잘 보이는 센 강변에 앉아 와인을 나눠 마시는 일을 자주 상상하였다. 주머니가 가볍던 스무살 초반의 나에게는 와인이란 꽤 비싼 가격의 수수께끼 같은 술 쯤으로 여겨졌지만 그럼에도 꿈꾸던 파리라는 영화 속에는 항상 와인이 있었다.
파리에 온 후 좋은 것 중 하나는 센 강에서 노을로 물드는 파리의 풍경을 맘껏 보는 순간이다. 차가운 바람이 불 때는 힘들지만 (겨울이 우기인 파리에서 노을을 볼 수 있는 날은 드물다) 날이 따뜻해지기 시작하는 사월 중순 무렵부턴 센 강에 가기 위해 일기예보를 챙겨볼 정도이니.
날이 좋다는 예보가 있다. 그러면 주저하지 않고 파리의 지도를 펼친다. 이곳에서 저곳으로 걷다 마음이 가는 곳에 잠시 머물다 돌아오겠다 생각하며 문을 나선다. 무심히 내 손을 잡아주는 이라도 길 위에서 우연히 만나게 된다면 밤새 이 거리를 걷겠다 실없는 생각도 해본다. 주변인들의 말을 빌리자면 나는 센 강을 자주 가는 편이라 한다.
혼자 갈 땐 한 권의 책을 챙긴다. 집에서 먹다 남은 와인을 챙겨와 마시며 가져온 문장들을 읽는다. 마음이 가는 구절은 필사 한다. 그 옆에 나의 문장을 나란히 두어 본다. 그러다 파리를 여행하는 이들의 표정을 구경한다. 해가 저물어가는 파리의 풍경을 멍하니 바라보며 누군가를 어렴풋이 떠올리다 이내 그만둔다.
하루는 친한 이들과 센 강을 바라보고 나란히 앉아 와인을 마시며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지나가는 바또무슈(Bateaux-mouches)의 지나치게 밝은 조명 탓에 우리는 ‘오징어잡이 배’ 라 부른다. 지나가는 배를 바라보며 같이 있던 L이 저 배를 타고 싶다 하였다. 그녀의 가족이 지난주 파리 여행을 왔고, 바쁜 일정 탓에 미쳐 사용하지 못한 크루즈 티켓이 있다고 했다. 프랑스에서 살기 시작한 지 벌써 햇수로 칠 년차 였던 나는 아직도 파리의 크루즈 한 번 타보지 못하였다. 남은 와인이 다 비워질 때 즈음 우리는 배를 타기로 하였다. 있던 곳에서 선착장까지는 도보로 삼십 분 정도. 다음 탑승 시간까지 여유 있어 천천히 걸어가기로 했다.
이 날의 노을은 평소와 달랐다. 유명한 ‘라라랜드’ 영화 포스터처럼 하늘은 파랑에서 빨강, 다시 파랑으로 나아가는 중 어쩌다 만난 보라와 분홍 빛의 사이를 띠고 있었다. 센 강 곁으로 나란히 놓인 가로등을 따라 걷다 보니 영화 속에 들어온 착각마저 들었다.
퐁네프에서 멀리 반짝이는 에펠탑 방향으로 걷기 시작했다. 정확히 말하자면 춤추다, 걷다 다시 춤추기를 반복했다. 마신 와인의 취기를 핑계 삼아 영화 속의 주인공이 되어 보기도 했다. 책에서 필사 해둔 다소 낯간지러운 문장들도 용기 내어 읽어본다.
사랑을 시작하는 이들처럼.
곧 이별을 앞둔 비련의 주인공들처럼.
우리는 그 대사들에 웃고 또 웃었다.
거리의 음악, 도시의 소음에 맞춰 한 걸음씩 나아갔다. 루브르 궁전을 지나니 오르세 미술관의 큰 시계탑이 시야에 들어온다. 화려한 알렉상드르 3세 다리 밑을 지나간다. 그리고 멀리서 보이던 에펠탑이 조금씩 가까워진다. 출렁이는 강물 위 흔들리는 파리의 야경은 꼭 고흐가 그린 그림 한 폭을 떠올리게 하였다. 수많은 예술가들이 사랑한 도시. 우리도 어쩌면 이 시대의 예술가 중 한 명 이기에 ‘우리가 사랑한 파리’라며 그날의 밤을 형용하였다.
어느새 선착장에 도착했다. 배에 올라 바라보니 늘 보던 파리의 풍경과는 사뭇 달랐다. 치열하게 살아온 지난 몇 년의 시간들이 무색할 만큼 배 위에서 바라보는 파리는 한 없이 여유롭고 평화로워 보였다. 관광 포인트를 지날 때마다 눈치 없이 나오는 여러 언어의 안내 방송은 다소 시끄러웠지만 개의치 않았다. 꽤 요란스레 출발했지만 지나가는 풍경들에 묶어둔 각자의 기억 탓인지 우리는 금세 차분해졌다.
주인 잃고 떠도는 감정들을 빈 와인 병에 넣은 뒤 출렁이는 강물에 띄우는 상상을 한다. 낭만 타령하며 담아낸 그것들은 배가 지나가며 스러지는 물결 아래 깊고 무겁게 가라앉아 그 자리에서 싹이 트길 바란다. 그렇게 맺어진 열매가 수면 위로 떠오르게 된다면 하나씩 모아 와인을 빚겠다 하였다. 그 와인의 빛깔은 오늘 마주한 파리의 밤하늘 빛을 닮았을 것이라 단언하며 멀리서 반짝이는 에펠탑으로 조금씩 나아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