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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ED지은 Jun 12. 2019

산책의 섬, 제주

빛보다 빠른 오늘의 너에게

1. 제주 701번 버스

남흘동


"혼자 버스를 타면, 오른쪽 맨 앞자리에 앉고 싶어. 큰 창이 있고, 창 밖으로 계속 바뀌는 풍경들을 보고 있으면 마치 기사님이 이야기를 이끌어가는 소설 속 인물처럼 느껴져."


J는 글을 쓰는 사람이었다. 밤이 되면, 난 몰래 그의 서재에 들어가 훔칠 게 없나 기웃거렸다. 여전히 문장 속에 남아있는 그가 느낀 감정들을 난 자꾸 훔치고 싶었다.


그런데 기사 아저씨가 소설 속 인물 같다는 그 수사의, 의미는 알 수 없었다.



어이없게도 두 계절이나 지나서야, 서랍 깊숙이 넣어 논 그의 말을 제주를 빙빙 도는 701번 버스 안에서 이해했다. 창밖으론 검은 모래 해변, 남흘동 돌담, 월정리 주택가, 세화 바다가 지나쳐갔다.


각자의 목적지를 가진 승객들은 버스가 멈추면 조용히 오르고, 내렸다. 선천적 길치인 우리는 버스에서 내리자마자 그대로 길을 잃었다. 그때마다 새로운 공기를 마주했고, 새로운 등장인물들과 새로운 이야기를 만들어갔다.


701번 버스 기사님이 주인공인 소설에선 우린 어떤 등장인물이었을까.


2. 순간 속의 영원, 함덕 서우봉 해변

우린 장마철, 비수기에 장기여행을 왔다. 비 오는 소리에 아침 눈을 뜨고, 빗속에서 걷는 일이 익숙해졌다. 비도 나름대로 좋은 점이 있지만, 그래도 환한 하늘이 보고 싶은 날도 있었다.


장대비 탓에 함덕 서우봉 해변에 발이 묶였다. 가볍게 책이나 읽을 생각으로 카페로 자리를 옮겼다.

영원한 순간은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는 순간 속에서 영원을 경험한다.


최유수, <사랑의 몽타주>


J에게 좋은 문장을 찾았다며 소리 내어 읽어주자, 거짓말처럼 비가 그쳤다. 오후 네시, 모래사장에 가방을 놓고 천천히 물속으로 걸어 들어갔다.

투명한 물결에 내 발이 비쳤고, 곁에는 좋은 친구가 있었다. 하늘과 수평선은 맞닿았고, 그곳에서는 언어에 담기 어려운 빛이 났다. 뒤로 돌아도, 옆으로 고개를 돌려봐도 물결 속이었다. 바람과 파도의 노래는 그런 우리 곁에서, 우리와 함께 흘러갔다.


"지금 이 순간이 영원했으면 좋겠다."


그 말을 내뱉는 순간, 우린 영원을 경험했다.


3. 목요일의 시에스타

여행 중 가장 자주 했던 말은 "눈치 보면서, 쉬지 않아서 너무 좋다."


가뜩이나 취업 불모지 국문과에, 휴학생인 우리 셋은 조금 불편한 시기를 보내왔다. 아르바이트를 하고 와 침대에 누워 있을 때도, 토익 지문을 풀다 책상에 엎드려 있을 때도. 킬킬거리며 소설책을 읽을 때도 어쩐지 눈치가 보이고 불편했다.


그러나 이 곳엔 우릴 아는 사람이 없다.


우선 낮잠부터 잤다. 자고 일어나 허기가 지면 맛있는 음식을 만들어 먹고, 천천히 걸어 영화를 보러 갔다. 늦은 오후엔 해변 주변 카페에 자리를 잡고 앉아 책을 읽었다. 이따금씩 좋은 문장을 찾으면 서로에게 읽어주며.


비가 오면, 민박집에 누워 라디오를 들었다. 그러다 비가 그치면, 평상에 누워 별을 보며 노래를 불렀다. 술이 깨면 자전거를 타고, 우도를 돌다 바다가 보이면 발을 담갔다.


이 모든 게 우리가 바라던

제주의 시간, 여행의 방식이었다.


4. 밤이 흐를 때 우리는


밤이 되면, 일종의 고백 같은 게 시작되었다.


"난 사실 서적 도벽증이 있어. 쉽게 말에 책을 훔친다는 거야. 강릉에 갔을 때, 숙소에 기형도에 책이 있는 거야. 가방에 넣었지. 우도 카페서도 이걸 가져왔어. 걱정 마, 꼭 돌려줄 거야."


책을 돌려주기 위해, 여행하는 1인.


"아직도 꿈에 그 사람이 나와. 그는 신주쿠 쪽에서 대학을 다녔는데, 그가 한국으로 돌아와 좋은 사람 곁에 남으면 난 그곳으로 갈 거야. 그의 과거 속에서 그를 기억하며 사는 거지.라고 말하면서 내가 울고 있더라. 꿈속에서.(현재는 깔끔하게 잊은 상태)"


첫사랑을 잊으려고, 여행하는 1인.

"상투적인 고민이지만, 솔직히 뭐하고 살아야 할지 모르겠어. 정말로."


밤이 흐를 때, 우린 밖으로 나왔다. 해변을 따라 걷고, 자전거를 타고 우도를 돌았다. 그때마다 일종의 고백들을 털어놓았고, 답을 찾지 못해도 돌아와 이불을 덮으면 기분이 한결 나아졌다.


-

진로 고민, 잘 안 풀리는 사랑에 밤잠 설치던 스물셋의 그날들. 어느새 4년이란 시간이 흘러 나는 3년 차 직장인이 되었다. 여전히 어디를 향해 걸어야 할지 고민인 내게 꽤 위로가 되었던 빛바랜 일기장의 기록들.


빛보다 빠른 오늘의 너에게

제주 플레이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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