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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일을 맞아

세상에서 제일 귀하고 예쁜 내 딸 서연이에게

by 물지우개

엄마가 그토록 연이진이에게 편지 받기를 원하면서 너희들에게 제대로 편지를 쓴 적이 없다는 사실을 오늘에서야 깨달았다. 나이를 이렇게 먹어도 부족하기는 변함이 없구나. 너에게 편지를 받고 싶어 이렇게 편지 쓰는 것은 아니라는 점! 알아주길 바라!! 어쩌면 이 편지는 반성문에 가까울지도 모르겠다는 슬픈 예감이.


내 인생을 통틀어 가장 행복한 때가 언제였냐고 묻는다면 나는 1초의 고민 없이 너를 임신했던 동안이라고 말한다. 나는 정말이지 그때 세상을 다 가진 듯 너무 충만한 행복감을 느꼈어. 내 몸속에 생명이 자란다는 놀라운 사실부터 그 생명이 꿈틀대던 그 존재감까지 나는 어쩌면 이 생명을 위해 이 세상에 태어났다는 숭고한 사명감마저 들었다. 마음만 먹으면 대부분 이뤘던 나에게 임신은 참 마음대로 되지 않는 인생의 과업이었거든. 정말이지 저에게 아기만 주신다면 영혼을 갈아 최선을 다하겠다고, 쉽사리 믿을 수 없던 신께 얼마나 간절히 기도했는지 모른다. 오만한 나에게 신은 정말로 아기를 주셨고 네가 태어나자마자 바로 깨달았다. 신은 내가 정말 영혼을 갈아 넣는지, 내가 말한 그 최선은 어느 정도인지 확인하고 싶었구나라고.


돌이켜보면 어느 하나 쉬운 게 없었다. 한 번에 되는 일이 없더라. 나는 아기가 수만 번 부르는 그 엄마라는 호칭이 그리 쉽게 나오는 게 아니라는 걸 그제야 깨달았다. 엄마라는 글자의 무게를 비로소 알았다. 아기가 젖을 먹고, 몸을 뒤집고, 음식을 씹고, 걷고, 울고, 아프고, 다시 웃는 그 시간을 보내고 나서야 엄마라고 부를 수 있다는 사실을 말이다. 네가 엄마라고 부르면서 내게 달려오면 아, 오늘도 열심히 잘 살았다, 수고했다고 나를 칭찬했다.


그러나 너는 나와는 다른 독립된 생명이잖아. 나와 다른 사고체계, 나와 다른 신체, 그리고 너무 다른 마음가짐, 그리하여 언젠가는 나에게 완전히 떨어져 너는 너만의 인생을 살아가야 한다는 사실을 서서히 느껴. 나의 도움 지분이 서서히 낮아지다가 언젠가 사라지고, 결국 오롯이 네 의지로 묵묵히 그리고 당당히 걸어가야 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엄마의 도움지분이 되려 걸림돌이었을 때 엄마는 견딜 수 없었다. 너의 척추측만증을 알게 되었을 때가 바로 그때였어. 너의 고통을 전부 내 탓으로 느꼈어. 엄마는 심한 우울감으로 자책했어. 그럼에도 연이는 엄마 보란 듯 보조기를 견디고, 수술도 참아내더라. 그런 너 앞에서 내가 뭐라고 감히 우울할 수 있겠니. 수술자국을 잘 좀 찍어달라던 너 앞에서 나는 나를 혐오했던 그 긴 시간들을 부끄러워했다.


결국, 너를 키운 시간은 나를 키운 시간이었다. 내가 너를 키운 것이 아니라 네가 나를 키운 셈이다. 너는 모자라고 건방지고 모난 나를 다듬어 주었다. 이제 곧 성인이 되어 떠나버리면 엄마는 뿌듯하겠지만 나를 키울 자가 없어진다는 사실에 조금 서운해져. 그러나 서운함에 매몰되어 너를 붙잡을 만큼 어리석지는 않다. 네게서 내 도움지분을 늘리는 그 무지한 선택은 하지 않을 것이다. 모두 네가 나를 이만큼 키웠으니 가능한 일이다.


제주 올레길을 힘들게 걷다가 그런 생각이 들었어. 나는 왜 이 길을 걷고 있지? 이 더운 날에 왜 더위를 견디고 있지? 아파서 걸을 수 없을 때까지 도대체 왜? 그러나 군산오름에 올라 해안을 볼 때, 화순금모래해변에서 모래를 밟을 때, 주상절리의 육각기둥에 부딪히는 파도 소리를 들을 때 그러다 편의점에 들러 시원한 커피 한잔을 마실 때 아, 이거구나. 집에 있었다면, 힘들지 않았다면 결코 느낄 수 없는 행복이구나. 지금 이 순간이 얼마나 행복한지 걷는 이 시간이 얼마나 귀한지 알았다. 얼마 남지 않은 ‘정서연아기육아’도 올레길과 마찬가지가 아닐까. 여전히 너에게 돈 많이 쓴다고 잔소리하고 내 마음과 같지 않다고 싫은 소리 하겠지만 잠에서 깬 네 볼을 누르고, 목욕탕에서 네 등을 밀고, 하교한 너를 껴안으며 나는 또 이 맛에 연이를 키우지라고 행복해할 테다.


연이 인생의 초반부가 끝나가고 있다. 이제 더 재밌게 펼쳐질 중반부와 후반부에는 엄마지분은 이제 거의 사라지겠지만 엄마는 지금부터 영혼을 끌어모아 널 응원(만) 할 테다. 살다가 힘들면 엄마에게 슬쩍 다리를 걸쳐도 된다. 엄마는 변함없이 잔소리를 하고 신경질을 낼 테지만 결국 즐거워하며 네 다리를 주물러 줄 거다. 그렇게 도움이 되면 좋겠다. 혹여 내가 짜증을 내더라고 너는 아... 엄마가 아직 덜 컸네. 내가 또 엄마를 키우고 있구나 생각하면 돼. 알겠지?


세상에서 제일 귀하고 예쁜 내 딸 서연아,

사랑한다.

사실은 사랑한다는 말이 무슨 말인지 너를 통해 서서히 알아가고 있다.

사랑한다. 서연아!


엄마 생일을 앞두고

25년 8월 11일 11시 4분 학교에서 엄마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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