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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짓말, 기꺼이, 마음껏.

김애란의 [이 중 하나는 거짓말]을 읽고

by 물지우개

옛날 옛날에

세상에 자비도 없고 희망도 없고 노래도 없던 때

신은 아무 일도 하지 않았습니다.

첫날 자신이 만든 밤이 너무 좋아서.

그 밤을 덮고 자느라

세상에 인간은 있되

구원도 없고 기적도 없고 선의도 없다는 걸 잊었습니다.

첫날 자신이 만든 밤이 너무 좋아서.

자신이 만든 밤이 너무 편해서.

p.12


자비, 희망, 노래, 구원, 기적, 선의 등 인간을 따뜻하게 만드는 이 모든 것들은 신이 만들어주셨어야 한다. 왜냐하면 신이 인간을 만들었으니까. 그런데 신은 인간 창조만 했을 뿐, 인간이 따뜻하게 살도록 노력하진 않았다. 캄캄한 밤이 너무 편하고 좋아서 그저 보고만 있었던 셈. 이 책을 읽으면 그간 내가 한 거짓말에 대해 자꾸 생각하게 된다. 내가 만들어 낸 숱한 거짓말이 얼마나 나를 지켜주었는지 셈하게 된다. 나를 살게 한 거짓말 말이다. 그래, 그 거짓말 덕분에 잘 넘어갔지. 자비, 희망, 구원이 되어준 소중한 거짓말. 어쩌면 진실이었을지도 모르는 명백한 거짓말. 신은 그저 편히 쉬고 있었을 그 캄캄한 밤, 내게 길을 내어준 따뜻했던 거짓말. 책을 읽는 동안 그간 미워했던 나의 거짓말들이 소설처럼 포근하게 나를 토닥거려 주어 나는 울지 않을 수 없었다.


채운은 건넛방에서 이모부부가 싸우는 소리가 들려올 때마다, 엄마의 면회를 앞두고 잠을 설칠 때마다, 선이가 별 뜻 없이 내쉰 한숨에 마음이 위축될 때마다 사방이 탁 트인 아프리카 초원이나 유럽의 돌길, 남아시아 해변의 야자나무를 떠올렸다...(중략)... 자신이 다른 이름으로 살 수 있는 곳, 검색이나 추적이 안 되는 곳이면 족했다. 거기가 어디든 지저분한 소문이 못 건너오는 곳, 아버지도 하느님도 못 따라오는 곳이라면 모두.

p. 26


아버지는 엄마가 늦게 들어오는 날이면 어김없이 큰소리를 지르며 화를 냈다. 엄마는 그런 아버지를 숨 막혀했고, 보란 듯이 더 늦었다. 나는 오고 가는 윽박지름 속 서사를 따르다가 결국 귀를 막았다. 아무리 틀어막아도 비집고 들어오는 소리를 외면하기 위해서는 뭔가를 써야만 했다. ‘엄마 아빠가 또 싸운다’고 일기를 시작하면 네 살 많은 오빠가 옆에서 들여다보다 고개를 저었다. 그렇게 일기 쓰면 안 된단다. 나는 이유를 물었고 오빠는 난처해할 뿐 답을 하지 못했다. 나는 지우개로 그 문장을 지웠다. 그리고 다시 시작했고 결국 ‘오늘도 참 재미있었다’는 문장으로 글을 마쳤다. 그날 일기 속 엄마는 내가 좋아하는 볶음밥에 케첩을 뿌려주었고 아빠는 신문을 보다가 내 공부를 가르쳐 주었다. 아직도 그 일기장을 가지고 있다. 오늘도 참 재미있었다는 그 하루를 들여다볼 때마다 심장이 터질 듯이 뛴다. 거짓말 같은 나를 신은 봤을까. 알고 있을까.


그때만 해도 소리와 이렇게 연락을 주고받을 줄 몰랐는데, 단지 용식을 돌봐주고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지우는 소리가 가깝게 느껴졌다. 그래서 지금의 신뢰감과 친밀함을 잃고 싶지 않았다. 필요하다면 거짓말을 해서라도.

p.89


서연이를 어린이집에 보내기에 너무 어렸다. 나는 일을 해야 했고 아이는 집 근처 시터에게 맡겨졌다. 죄스러움, 미안함, 고마움 그리고 대부분을 차지한 불안과 걱정으로 나는 예쁜 공책을 샀다. 매일 아이를 안겨드리며 내가 쓴 공책을 함께 드렸다. 아이를 돌보느라 힘드시죠.(그래도 제 월급의 상당량을 드리고 있어요.) 식사 습관을 잘 잡아주셔서인지 집에서도 밥을 잘 먹어요.(아이가 밥을 제때 못 먹은 것은 아니겠죠.) 덕분에 출근해서 일할 수 있어 얼마나 감사한지 몰라요.(오늘도 불안함으로 일이 손에 잡히지 않습니다.) 밤에 자는 동안 열이 났는데 해결제를 먹여서 다행히 열이 내렸어요. 제가 퇴근하는 대로 병원에 데려갈 테니 그때까지만 잘 부탁드려요.(열이 나면 해열제만 먹이지 마시고 바로 병원에 좀 데려가주실 수 없을까요?) 나는 시터와 신뢰감과 친밀감을 절대 잃어서는 안 되었다. 그녀의 심기를 건드려서 안될 뿐만 아니라 그녀의 심기를 적절히 보듬어 주기도 해야 했다. 글은 죄스러움과 미안함과 고마움을 가장한 불안과 걱정뿐이었다. 티 내지 않으려고 최선을 다했다. 나는 거짓말에 진심이었다.


채운이 홀로 고개를 저었다.

‘소리는 엄마가 자길 떠날까 두려워 아픈 엄마의 손을 잡고 매일 기도했다는 아이니까. 나와는 다른 아이니까.’

채운이 초조한 듯 발을 떨었다.

‘게다가 모든 사람이 다 진실을 원하는 건 아니잖아? 더구나 그게 자신에게 별 이득이 되지 않는 진실이라면.’

지금 소리가 모르는 진실이 있다면 그건 저기 침대에 무력하게 누워 있는 사내가 평소 자기 아내와 자식을 학대한 사람이라는 거였다.

p. 137


우리 엄마에게 세상에서 제일 이쁘고 똑똑한 사람은 바로 딸이었다. 엄마는 아직도 잘 모른다. 내가 얼마나 멍청한지. 바로 대학에 붙었고 임용에도 붙었고 원하는 교육청에 발령받은 딸이 공부를 못해서 그 중요한 1정 연수에서 꼴찌 비슷한 점수를 받았다는 사실. 그저 아이 키우느라 승진 길에 들어서지 못했다고 안타깝게 보실 뿐이다. 나는 내 점수를 엄마에게 말하지 않았다. 연수받는 동안 젖이 불어 아파서 앉아 있기도 힘들었어요. 그래도 열심히 공부는 했어요. 점수는 나쁘지 않았는데 승진하려면 단지 그 연수점수만 필요한 게 아니잖아. 나는 초조한 듯 발을 떨며 속으로 말했다. 엄마가 내 점수를 알고 싶어 하는 건 아니잖아? 누구에게 이득이 된다고? 엄마에게 나는 그저 육아로 주저앉아 남편뒷바라지만 한 불쌍한 딸일 뿐. 엄마가 모르는 진실이 있다면 그 당시 당신 딸은 갓난아이를 핑계로 공부 따윈 전혀 하지 않았다는 사실. 공부도 안 했으면서 고득점은 받고 싶었고, 고득점도 아니었으면서 승진은 하고 싶었다는 못난 인간이었다는 사실.


-있지. 사람들 가슴속에는 어느 정도 남의 불행을 바라는 마음이 있는 것 같아. 아무도 몰랐으면 하는, 그런데 모를 리 없는 저열함 같은 게.

p.140


같은 학교에 근무하면서 친하게 지낸 언니가 있었다. 언니와 나는 성이 같고 마음이 잘 통해 우린 친자매처럼 지냈다. 오래 연락하지 않아도 가족처럼 마음이 통한다 느꼈다. 내 딸보다 2살 많은 딸을 키우는 언니는 늘 말했다. 우리 애는 공부가 안돼서 미술을 시켜야 하나 생각 중이다. 미술학원하나 차려주면 어떻게든 먹고살지 않을까. 수학을 못해서 부진아가 됐단다. 모르는 담임도 아닌데 창피해서 어쩌냐. 이런 토로를 들을 때마다 난 위로했으나 속으로는 저열했다. 언니가 열심히 안 시키니까 애가 수학을 못하지. 나는 저리 되지 않도록 일찍부터 서연이에게 수학을 시켜야겠다. 언니 딸의 수능시험을 앞두고 나는 오랜만에 연락을 했고, 기프티콘과 함께 응원해 주었다. 시험이 끝난 어느 날 언니가 전화가 왔다. 결과를 물어보지 못하고 궁금해하고 있었는데 언니 목소리가 약간 상기되어 있었다. 우리 애가 대학에 합격했어. 어디? 부산대 의대! 뭐라고? 진짜, 와 대박이다. 정말 축하해 언니! 그 전화 이후 나는 언니와 연락할 수 없었다. 불행을 바라지 않았다고 장담할 수 없는 내 연약한 마음을 들킬까 봐 나는 차마 언니의 메시지에 답을 할 수 없었다. 거짓말에도 정도가 있다. 편하게 건넬 수 있는 거짓말과 도저히 그럴 수 없는 거짓말. 그 기준은 내 저열함을 내가 견딜 수 있느냐 없느냐다. 아무래도 언니와의 인연은 끝인가 보다.


아버지를 찌른 사람은 난데 사람들이 나를 위로합니다.

나는 무릎 꿇고 고개 숙여 그들에게 절합니다.

이곳은 내가 벌받는 자리입니다.

위로가 벌이 됩니다.

p.165


우리 반 3학년 도희(가명)는 체구가 작다. 많이 못 먹을 것 같은데 점심시간이면 급식을 열심히 먹는다. 양에 차지 않는지 더 받으러 간다. 그런데 국은 뜨거워서인지 잘 못 먹는다. 흰쌀밥을 좋아한다. 밥은 늘 더 받으러 간다. 도희는 얼굴이 귀엽게 생겼고 피부도 하얗다. 글씨가 예쁘지만 구구단은 아예 외우지 못한다. 나는 도희에게 구구단은 조금만 성실하면 외울 수 있다고 충고한다. 2학년 때 게을러서 그래. 지금도 늦지 않았으니 조금만 노력해 봐. 도희는 내가 출근하기도 전에 등교하거나, 1교시가 끝난 뒤에 등교한다. 그래도 등교 안 한 날이 없었는데 어느 날 2교시가 시작되어도 도희는 오지 않았다. 엄마한테 전화하니 없는 번호라고 하고 아빠한테 전화하니 잘못 걸었다고 한다. 수업 내내 신경이 쓰이고 불안하기도 하여 어쩔 수 없이 교육복지사와 교감 선생님께 연락했다. 결론만 말하면 도희는 학교에 올 수 없는 상황이었다. 도희네 집은 관리비가 밀려 전기와 물이 끊겼다. 아빠는 오래전에 가출했고, 우울증이 있는 엄마는 밀린 월세 독촉에 늘 도망갈 짐을 싸놓고 있었다. 도희는 늘 도복차림이었는데 태권도가 좋아서가 아니라, 그거 말고는 입을 옷이 없기 때문이었다. 한심한 눈빛으로 도희의 게으름을 지적하던 내가 혐오스러웠다. 다음날 도희는 등교하면서 나에게 죄송하다고 했다. 나는 도희를 똑바로 쳐다볼 수가 없었다. 안쓰러운 눈빛도 보낼 수 없었다. 나는 도희의 아픔에 공감할 자격이 없다. 따뜻하게 바라 볼 자격도 없다. 도희가 나를 쳐다보거나 내게 말을 할 때마다 나는 벌을 받는다. 눈빛을 회피하고 대충 답한다. 도희가 게으름이라는 단어를 몰랐으면 좋겠다.


실제로 지우는 <내가 본 것>을 시작하며 모두가 죽는 이야기를 쓰려고 했다...(중략)... 그리고 어느새 지우는 ‘다 죽이는 것보다 더 어려운 건 결국 그 마음을 내려놓는 것’ 임을 깨달았다. <내가 본 것> 마지막 화는 바로 그런 마음을 담아 끝낸 거였다. 그런데 삶은 지우가 생각하는 것처럼 그렇게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지우가 누군가를 살리는 이야기를 쓴 순간 삶은 가차 없이 지우에게서 가장 소중한 존재를 데려가버렸다.

p.215


이 책을 읽으며 내 숱한 거짓말을 떠올렸다. 거짓말이 지금의 나를 만들었다 싶을 정도로 내가 하는 모든 말과 행동에 거짓말이 콕콕 박혀있었다. 가끔 그 거짓말은 진실보다 힘이 세기도 했다. 그래서인지 다른 사람의 말과 행동도 보이는 그대로 믿지 않는다. 저렇게 말하는 속마음이 뭘까. 그래서 나에게 원하는 건 뭘까. 거짓 뒤에 숨은 진실을 찾게 된다. 하지만 저 말은 분명 거짓이다 한들 나는 타인의 거짓에 넘어갈 것이고, 진실되게 살자 아무리 다짐해도 당최 거짓 없이 살 자신이 없다. 신은 참 보기 좋았다며 뒷짐 지고 손을 놓아버렸다 치더라도 어차피 삶은 살아가는 자의 몫이다. 신이 시킨 들 시킨 대로 하겠는가. 어쩌면 신은 보기가 좋았다며 그저 방임하는 것이 아니라 더불어 살아가는 법을 스스로 익히도록 지켜보는 것일지도 모른다. 나도 죽고, 남도 죽는 길을 걷다 틀렸다 깨닫고 스스로 방향을 돌리도록. 나도 살고 남도 사는 길을 걸어도 돌부리에 걸려 넘어질 수 있고, 넘어지면 또 툭툭 털고 일어나기를 기다리면서 말이다. 태어나고 싶어 태어나지 않았다. 살고 싶어 사는 것이 아니다. 신이 자비, 희망, 노래, 구원, 기적, 선의 등은 까먹었을 뿐이니 거짓말 좀 하면 어때. 거짓말이 살아가는 동력이 된다면 좀 어때. 거짓말이 자비, 희망, 노래, 구원, 기적, 선의 등이 된다면 기꺼이, 마음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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