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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새래 Nov 30. 2018

읽지 못하는 카톡에 대하여

#안읽씹


최근 인터넷에서 '회피형 연애'에 대한 글을 본 적이 있다.

쉽게 말해 중요한 결정을 연애 상대방에게 미루는 (특히 나쁜 결정을) 타입인데 기저에는 나쁜 사람이 되기 싫다는 마음이 지배적이기 때문이라고 한다.


연인사이가 이미 끝난 것은 알고 있지만, 내 손으로 끝내기 싫어서 상대방의 애정어린 메시지를 한참이나 읽지 않거나, 마지못해 읽은 후에는 "응ㅎㅎ" "괜찮아ㅎㅎ" "그래ㅎㅎ"와 같은 힘빠지는 단답형 답신을 보내는 자들이 꽤 있다고 한다.


당해본 적은 없지만 정말 인간이란 잔인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차라리 대놓고 '나쁜놈'이 되어주면 욕하고 술먹고 친구들에게 위로받으면 되는데, 이건 뭐 겉으로 보기엔 끝까지 젠틀하고 예의있는 '분'이시니 당하는 사람만 환장할 노릇이지 싶은거다.


적어도 내 관계, 내 연애에 있어서는 자기주도적인 사람이 되어야지! 내 결정을 남에게 미루지 않을거야! 라고 어렸을 적부터 생각해왔고, 여태껏 그렇게 살아왔다고 생각한다.


그러던 내가 요즘 '안읽씹'하는 카톡이 생겼다.

상대는 다행히 연인은 아니고, '퇴사하신 전 팀장님'이다.


퇴사하신 지 1년여가 지났지만 같은 지역, 동종업계,  타업체에 계신 관계로 잊을만 하면 카톡을 보내서 점심을 제안하시는데, 나는 이 점심제안이 참 감사하면서도 동시에 그만큼 부담스럽다.


직장인에게 점심시간이 어떤 의미를 갖는지는 목줄차고 다니는 (사원증을 패용하는) 사람들은 모두 알 것이리라. 때론 업무 파트너와의 비즈니스, 때론 친한 사람들과의 친목도모, 때론 혼자만의 휴식을 취할 수 있는 하루 중 유일한 자유시간임을. '퇴사하신 전 팀장님'과의 점심은 그 몇가지의 카테고리 중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다.


침묵을 견디지 못하고 아무말이라도 해야될 것 같은 이상한 강박을 가진 내게, 말수가 없으시고 딱히 개인적인 유대가 없는 전 팀장님과의 식사는 '일하는 점심'인데, 이 일의 성과(?)가 무엇인가에 대한 생각을 하기 시작하면서부터 이 점심을 견디기 힘들어졌다.


굳이 말하자면 향후에 업무적으로 다시 만났을 때 도움을 주고받기위한 좋은 관계 유지..정도일까? 하지만 있을지 없을지도 모르는 미래를 위해서 현재의 내 소중한 점심시간을 할애하는 것이 아까워지기 시작했다. 아마 팀장님도 같은 의도로 점심을 제안하셨을테지만, 내 시간이 아까워지는만큼 송구스러운 맘도 동시에 커졌다.


몇 차례 있지도 않은 선약을 만들어 거절을 했음에도 잊을만하면 점심을 제안하셨고, 거절을 말하는 것에도 지친 나는 이제 카톡을 '안읽씹'하기 시작했다.


사실 생각해보면 단순하다.

까짓거 좀 불편해도 감수하고 점심을 먹거나, 아니면 그 때 그 때 선약이 있다고 거절을 하거나 둘 중의 하나를 하면 될 일이다. 그런데 이건 뭐 매번 제안에 응하자니 힘들어 죽겠고, 매번 거절을 하자니 미안해 죽겠는 노릇인 것이다.


그래서 고작 선택한 방법이 '응하지 않는 것'이다. 상대방이 '알아서' 나의 완곡한 거절의 의사를 깨달아주길 바라는 것이다. 위계때문도 아니고, 상대가 나보다 어른이어서도 아니고, 어쨌든 거절당하는 마음이 어떤 것인지 알기 때문에 상처주고 싶지 않은 마음때문이다. '더이상 제안하지 말아주세요'를 내 나름의 방식대로 완곡하게 말하고 있는 것이다.


아마 회피형 연애를 하는 사람들의 마음은 이런 것이었으리라. 부담스럽지만 부담스럽다고 말하지 못하는 사람들. 당신이 싫어졌지만 싫어졌다고 말하지 못하는 사람들. 내가 말하지 않아도 상대방이 떠나버린 내 마음을 알고 알아서 떠나가주길 바라는 사람들. 용기없고 비겁한 짓인줄 알지만, 그냥 그렇게 잊혀지거나 버려지는 편이 낫다고 생각하는 사람들.


'좋아싫어'를 말하는 건 사람과 사람사이의 당연한 '예의'의 문제라고 생각했었는데, 막상 당해보니 참 힘들고 어려운 문제다. "왜 내마음을 받아주지 않아? 왜 나와 점심을 먹고싶지 않아?" 참 대답하기 어려운 문제다.


아마 다음주 쯤 나는 슬쩍 저 카톡을 읽고, "앗 팀장님 죄송해요 이제 보았네요 ㅠㅠ 다음주쯤 점심 어떠세요?" 라고 또 카톡을 보내겠지. 누가봐도 거짓말인 저 카톡에 팀장님은 또 "화요일 콜?"하고 답장을 보내실 것이다. 언제까지 이 팀장님과의 무용한 밀당을 계속해야하는 걸까.


내 카톡창의 빨간1은 언제쯤 바로바로 사라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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