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자이너가 어도비를 안 쓸 수 있다고?
월말 정산을 하다가 멈칫했다. 어도비 크리에이티브 클라우드 월 구독료가 48,000원. 그런데 지난 한 달 동안 프리미어 프로는 0번, 일러스트레이터는 한 번, 포토샵은 두 번 정도밖에 안 켰다는 걸 깨달았다. (마치 헬스장 끊어놓고 한 달에 몇 번 가면서도 계속 월회비를 내고 있는 기분)
15년 동안 어도비 없인 하루도 못 산다고 생각했는데, 언제부턴가 내 손은 다른 프로그램들을 찾고 있었다는 걸 곰곰 생각해 보니 알 수 있었다. 내 작업 패턴이 완전히 바뀌어 있었는데, 브랜드 아이덴티티 작업보다는 콘텐츠 디자인이 주력이 되었고, 복잡한 작업보다는 빠르고 직관적인 결과물을 원하는 클라이언트들이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었다.
그래서 결심했다. 과감하게 어도비 없이 디자이너로 살아보기
처음엔 정말 막막했다는 게 솔직한 심정이었다. 15년 동안 몸에 베인 포토샵의 단축키, 일러스트레이터의 펜툴의 편리함이 하루아침에 사라지는 건 아니니까. 그리고 무엇보다 '프로는 어도비를 써야 한다'는 고정관념까지 떨쳐내기가 쉽지 않았다. 하지만 한 달 동안 이것저것 시도해 보니 생각보다 대안이 많다는 걸 발견할 수 있었는데, 마치 오랫동안 같은 길로만 출근하다가 새로운 골목길을 발견하는 기분이었다고 표현하면 적절할 것 같다.
캔바부터 시작하게 된 이유는 단순했다. 가장 접근하기 쉬워 보였고, 무엇보다 월 구독료가 9천 원 대로 어도비에 비해 압도적으로 저렴했기 때문이다. 솔직히 처음엔 우습게 봤다는 게 진실이다. '아마추어들이나 쓰는 거 아닌가?' 하는 선입견이 있었거든. 그런데 막상 캔바 프로를 제대로 파보니 생각이 완전히 바뀌었는데, 이건 그냥 디자인 툴이 아니라 창의적 놀이터라는 표현이 더 적절해 보였다.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건 요소들의 다양함이었는데, 일러스트레이션, 아이콘, 스티커부터 시작해서 정말 상상도 못 했던 소재들이 가득하다는 점이 놀라웠다. 예전에 일러스트레이터에서 벡터 소재 찾겠다고 셔터스톡이나 프리픽을 뒤지며 보냈던 시간들이 아까울 정도로 풍부한 라이브러리를 갖추고 있었다. 검색창에 '전통주'만 쳐도 다양한 스타일의 한국 전통 일러스트가 쏟아져 나오는 걸 보면서, 이게 정말 월 만원 구독료에 포함된 서비스인가 싶을 정도였다.
지난번에 제주 전통주 브랜드 라벨 디자인을 진행하면서 이 기능의 진가를 제대로 체험할 수 있었는데, 캔바 안의 한국 전통 요소들로 거의 모든 작업을 해결할 수 있었다는 점이 인상적이었다. 예전 같았으면 일러스트레이터에서 펜툴로 직접 그리거나 따로 구매해야 했던 헤리티지 일러스트레이션들이 이미 완벽하게 벡터로 준비되어 있더라는 게 정말 놀라웠고, 게다가 목업까지 바로 적용할 수 있어서 클라이언트에게 보여줄 때 실제 라벨이 붙은 모습까지 한 번에 확인할 수 있다는 점이 작업 효율성을 크게 높여주었다.
저작권 문제 해결이라는 측면에서도 캔바 프로는 정말 혁신적이라고 할 수 있는데, 예전에는 하나하나 스톡 사이트에서 구매하던 이미지들을 월 9천원대로 무제한 사용할 수 있다는 건 연간으로 따지면 몇십만 원을 절약하는 것과 같다. 마치 뷔페 요금으로 단품요리를 무제한으로 먹을 수 있는 기분이랄까? 사실 블로그에 들어가는 사진만 잘 조합해서 써도 뭐... 뽕은 그냥 뽑을 수 있는 것 같다.
그리고 멀티 디자인 기능은 정말 게임 체인저라고 할 수 있는데, 하나의 프로젝트 안에서 명함, 포스터, 웹 배너, 인스타그램 포스트를 모두 관리할 수 있게 되었다. 프로젝트 내의 컬러나 폰트를 바꾸면 모든 디자인에 일괄 적용되는 시스템은 예전에 어도비에서 파일 여러 개를 열어놓고 작업하던 번거로움을 완전히 해결해 주었다.
같은 맥락으로, 이렇게 멀티 디자인 내에서 캔바의 자동 이미지 사이즈 변경을 이용해서 인스타그램 정사각형으로 만든 디자인을 스토리 사이즈로 바꾸면 자동으로 레이아웃을 조정해 주면서 텍스트 크기나 요소 배치까지 알아서 최적화해 준다. 예전에 포토샵에서 대지 하나하나 만들고 요소들을 일일이 조정하던 번거로운 과정을 생각하면 정말 혁명적인 변화라고 할 수 있다. (구글 배너 만드느라 수십 개씩 조절하던.. 그 노가다..)
진짜 놀라운 건 AI 기능, 특히 드림랩의 실사 퀄리티가 정말 인상적이었다는 점을 강조하고 싶다. 며칠 전에 웹사이트용 강사 모델 사진이 필요한 상황에서 '젊은 한국인 여성 강사, 정장 착용, 따뜻한 미소'라고 입력했더니 정말 자연스러운 인물 사진이 생성되었는데, 클라이언트들도 AI로 만든 이미지인 줄 전혀 모르고 "모델 섭외하셨어요?"라고 물어볼 정도로 자연스러운 퀄리티를 보여주었다.
물론 한계가 없는 건 아니다. 정말 디테일한 벡터 작업이나 타이포그래피는 여전히 일러스트레이터의 정교함이 필요한 영역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내가 하는 작업의 70퍼센트 정도는 캔바로도 충분히 해결할 수 있다는 걸 한 달 동안의 경험을 통해 확인할 수 있었다.
영상 편집은 원래 캔바의 간단한 자동편집 기능이나, 프리미어 프로의 컷 편집으로 진행하고 있었는데, 좀 더 크리에이티브한 작업이 필요해지면서 캡컷 프로를 도입하게 되었다. 프리미어에 익숙해져 있던 내게는 처음에 인터페이스가 좀 낯설게 느껴졌지만, 며칠 써보니 "왜 진작 안 바꿨을까" 싶을 정도로 편리하다는 걸 깨달을 수 있었다.
마스킹 기능이 정말 직관적이라는 점이 가장 인상적이었는데, 프리미어에서는 복잡한 과정을 거쳐야 했던 작업들이 클릭 몇 번으로 해결되면서 인물의 배경을 바꾸거나 특정 부분만 색보정하는 작업이 정말 쉬워졌다는 걸 체험할 수 있었다.
타이포그래피 작업도 놀라울 정도로 발전되어 있었는데, 텍스트 애니메이션이 정말 다양하고 자연스럽게 구현되어 있었다. 타이핑 효과, 페이드 인, 스케일 업 등등 예전에 프리미어에서 키프레임 하나하나 찍어가며 만들어야 했던 효과들이 원클릭으로 적용되면서 미리 보기도 실시간으로 확인할 수 있어서 작업 효율성이 크게 높아졌다는 걸 실감할 수 있었다. 제일 귀찮고 하기 싫었던 '캡션 생성'도 캡컷에선 원클릭이다. 음성을 인식해서 자막을 생성해 주는 기능이 프로에 탑재되어 있는데 정확도가 정말 높다. 숫자나 내 엉망인 영어발음은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지만, 표준어는 거의 완벽하게 처리해주고 있다. 타이밍에 맞게 자막이 생성되는 효과나, 에셋으로 준비된 자막 스타일도 정말 다양해서 영상의 톤 앤 매너에 맞게 선택할 수 있다는 점이 편리했다. 예전에 프리미어에서 자막 하나씩 타이핑하며 시간과 싱크를 맞춰야 했던 번거로운 과정을 생각하면 정말 혁명적인 발전이라고 할 수 있다.
라이브러리의 풍부함도 실무에서 정말 도움이 되었는데, 효과음부터 배경음악까지 저작권 걱정 없는 소재들이 카테고리별로 잘 정리되어 있으면서 내가 자주 사용하는 텍스트 스타일이나 효과들을 미리 저장해 두고 템플릿처럼 불러와서 바로 적용할 수 있는 시스템은 일관성 있는 작업을 가능하게 해 주었다.
개인적으로 가장 감사하게 생각하는 기능은 보정 기능인데, 스노우 못지않은 자연스러운 보정 효과로 내 투턱을 은근슬쩍 가려주고 있다... 덕분에 쇼츠를 만들 때마다 기분이 좋다. 뷰티 모드가 내가 선택한 만큼, 과하지 않게 자연스럽게 보정해 주면서도 인위적이지 않다는 점이 마음에 들었다.
물론 한계가 없는 건 아니다. 정말 복잡한 모션그래픽이나 3D 작업은 여전히 애프터 이펙트의 전문성이 필요한 영역이고, 속도감에 있어서도 프리미어만큼 정교하지는 않다는 아쉬움이 있다. 하지만 일반적인 콘텐츠 영상이나 SNS용 영상을 만드는 데는 캡컷이 오히려 더 빠르고 편리하다는 걸 한 달간의 경험을 통해 확신할 수 있게 되었다. 심지어 나는 영상 전문가가 아니니까, 이 정도로도 충분히 만족스럽다.
이제 1개월째 어도비 없이 지내고 있는 현재 상황을 솔직하게 평가해 보자면, 거의 불편함을 느끼지 못하고 있다는 게 정확한 표현일 것 같다. 오히려 작업 속도가 빨라졌고, 예상치 못했던 새로운 가능성들을 발견하고 있다는 점이 흥미롭다.
가장 큰 변화라고 할 수 있는 건 워크플로우의 단축이다. 예전에는 프로그램 간 파일 이동이 번거로워서 포토샵에서 편집한 이미지를 저장하고, 다시 그걸 웹에 업로드하는 과정이 꽤나 번거로었는데, 이제는 대부분이 클라우드 기반이라 캔바에서 만든 콘텐츠를 로그인된 인스타그램에 바로 게시하고, 영상도 캡컷에서 완료하고 바로 게시하는, 연동이 자연스럽게 이루어진다는 점이 정말 편리하다.
비용 절약 효과도 상당하다는 걸 실감하고 있다. 어도비 월 48,000원 대신 캔바 프로 9,900원과 캡컷 프로 9,900원을 합쳐도 월 2만 원이 채 안 되는 금액으로 해결되니까 연간으로 따지면 30만 원 이상을 절약하는 셈이다. 이 정도 금액이면 새 모니터 하나 정도는 충분히 장만할 수 있는 수준이다.
무엇보다 스트레스가 현저히 줄어들었다는 점을 강조하고 싶은데, 프로그램 업데이트로 인한 호환성 문제나 라이선스 인증 오류, 갑작스러운 프로그램 크래시 같은 예상치 못한 상황들이 거의 발생하지 않게 되었다. 클라우드 기반 시스템의 장점인 자동 저장 기능과 어디서든 접근할 수 있는 편리함은 작업 환경의 안정성을 크게 높여주었다.
의외의 발견들도 많았는데, 새로운 툴들을 배우면서 오히려 창의적 접근법이 늘어났다는 점이 가장 흥미로웠다. 캔바의 AI 기능이나 요소 그래픽들을 활용하면서 전에는 생각지 못했던 아이디어들이 떠오르기도 했고, 캡컷의 다양한 효과들을 통해 예전보다 훨씬 역동적이고 매력적인 영상을 만들 수 있게 되었다는 걸 실감할 수 있었다.
물론 완전히 어도비를 버릴 수 있을지는 아직 미지수라고 해야 정확할 것 같다. 벡터 작업이 많은 브랜딩 프로젝트가 들어온다면 다시 일러스트레이터의 정교한 기능들이 필요할 수도 있고, 복잡한 그래픽 창작이 요구되는 작업에서는 여전히 어도비의 전문성이 빛을 발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당분간은 이 실험을 계속 이어갈 계획이다. 일러스트레이션 작업은 프로크리에이트로 갈아탈 예정이고, 콘텐츠 디자인 작업은 캔바에서도 충분히 가능하다는 걸 확인했기 때문에 큰 문제는 없을 것으로 예상한다.
아직 1개월밖에 안 된 짧은 기간이지만, 지금까지는 심각한 불편함이나 한계를 느끼지 못하고 있다. 오히려 새로운 가능성들을 발견하고 있어서 재미있다는 게 솔직한 심정이다. 물론 대형 브랜딩 외주나 복잡한 프로젝트가 들어온다면 그때 가서 다시 상황을 판단해 봐야겠지만 말이다.
15년 동안 어도비만 사용하다가 다른 툴로 넘어가는 결정을 내리기까지는 정말 많은 고민과 두려움이 있었다는 게 솔직한 고백이다. '프로다움'을 잃게 되는 건 아닐까, 클라이언트들이 뭐라고 할까, 혹시 중요한 기능을 놓치면서 작업 품질이 떨어지는 건 아닐까 하는 온갖 걱정들이 머릿속을 맴돌았다.
하지만 실제로 경험해 보니 정작 중요한 건 어떤 툴을 사용하느냐가 아니라 어떤 결과물을 만들어내느냐라는 본질적인 부분이었다는 걸 깨달을 수 있었다. 클라이언트들도 프리미어로 편집했는지 캡컷으로 편집했는지에 대해서는 전혀 관심이 없고, 그들이 진짜 원하는 건 자신들의 브랜드를 더 매력적으로 보여줄 수 있는 퀄리티 높은 콘텐츠였다.
그리고 무엇보다 새로운 툴들을 배우면서 오히려 창의적 가능성이 확장되었다는 점이 가장 의미 있는 변화였다고 생각한다. 어도비라는 틀에만 갇혀 있을 때는 생각지 못했던 다양한 접근법들을 발견하게 되었고, AI 기능들 덕분에 전에는 시도해보지 못했던 새로운 스타일들도 실험해 볼 수 있게 되었다.
물론 어도비가 나쁜 프로그램이라는 건 절대 아니다. 여전히 강력하고 전문적인 기능들을 갖춘 훌륭한 툴이라고 생각한다. 다만 내 현재 작업 스타일과 필요에 더 적합한 대안들을 찾게 되었을 뿐이다. 마치 격식 있는 수트 대신 편안하면서도 스타일리시한 캐주얼 의상을 선택한 것과 같은 맥락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세상은 계속 변화하고, 생각보다 다양한 대안들이 존재하고, 오히려 예상치 못한 새로운 가능성들을 발견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이우연의 캔바 디자인이 궁금하다면,
https://leewooyeon.my.canva.site/canpap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