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힘내”보다 “어떻게 살아갈래?”

부모의 위로가 바뀌어야 할 시간

by 김성곤 교수

위로의 말에 온도가 없습니다

“힘내.”

우리는 이 말을 너무 자주, 너무 쉽게 건넵니다.

아이에게, 배우자에게, 때로는 자신에게도 건넵니다.

하지만 정작 그 말 뒤에는 아무런 온도가 없습니다.

위로라기보다 의무처럼, 혹은 그 상황을 빨리 끝내고 싶은 마음처럼 들릴 때가 있습니다.


한국 사회에서 ‘힘내’는 감정의 종착역처럼 쓰입니다.

슬픔을 드러내기보다는 빨리 정리하고, 다시 일상으로 복귀하라는 사회적 신호입니다.

우리는 감정을 다루는 법보다 참는 법을 먼저 배워왔습니다.

그래서 ‘위로’라는 말은 종종 ‘견디라’는 뜻으로 들리고,

누군가의 고통에 머물러 주기보다 서둘러 정상으로 돌아오길 기대하는 말이 되어버렸습니다.


저 역시 그랬습니다.

아이에게 “괜찮아, 잘할 수 있어”라고 말하면서 사실은 아이의 불안을 받아들이기 어려웠습니다.

괜찮다는 말로 덮고 싶었고, 잘할 수 있다는 말로 내 불안을 밀어내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나중에 깨달았습니다.

그 말들이 아이에게는 “지금의 나는 부족하다”는 뜻으로 들렸을 수도 있다는 사실을요.

hvTLN1VOl4bYqbIEIf_58.png

그건 슬픈 깨달음이었습니다.

진짜 위로는 방향을 묻는 질문입니다

진짜 위로는 “힘내”가 아니라 “어떻게 살아갈래?”라는 질문입니다.

그 질문은 상대가 스스로의 생각과 감정을 정리할 수 있도록 돕는 대화입니다.

심리학자들은 이를 ‘정서적 동조(Emotional Attunement)’,

즉 해결이 아닌 ‘함께 머무름의 기술’이라고 부릅니다.


위로의 목적은 문제를 해결해 주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답을 찾아가는 과정을 함께 지켜보는 일입니다.

그래서 부모의 위로가 ‘문제 해결’로 흘러가면, 아이는 스스로의 방향을 잃습니다.

“다음엔 잘하면 돼”보다 “그 상황에서 너는 어떤 생각이 들었니?”

“다시 하면 뭐가 달라질까?”

이런 질문이 아이의 주체성을 깨우는 시작이 됩니다.

부모의 위로가 아이의 사고를 확장시킬 때, 아이는 비로소 성장합니다.


우리 사회는 오랫동안 ‘정답을 맞히는 능력’을 가르쳤습니다.

그러나 진짜 위로는 정답이 아니라 방향을 묻습니다.

“어떻게 살아갈래?”라는 말은, 존재의 주체성을 회복시키는 질문입니다.


철학자 한나 아렌트는 “행동은 인간이 세상 속에 존재하고 있음을 증명하는 방식”이라 했습니다.

아이에게 이 질문을 던진다는 것은,

그 아이가 자기 삶을 스스로 증명할 수 있도록 기다려주는 일입니다.

그리고 그 기다림이, 사랑의 또 다른 이름임을 저는 배워가고 있습니다.

AeaDPXg5JIPmuQYoa2iGV.png

아이의 시간에 ‘쉼’을 허락해야 합니다

우리는 흔히 시간은 공평하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사실 그렇지 않습니다.

누군가는 이미 지친 시간을 살고 있고,

누군가는 아직도 준비할 여유가 없는 시간을 견디고 있습니다.

공평한 것은 ‘24시간’이라는 숫자뿐입니다.

그 시간을 어떤 마음으로 채우느냐, 그 농도와 질은 각자 다릅니다.


아이에게 필요한 것은 더 많은 학습의 시간보다,

‘회복의 시간’, ‘멈춤의 시간’입니다.

부모의 위로는 아이의 시간을 재촉하는 말이 아니라,

그 시간을 지켜주는 말이어야 합니다.


“너만 힘든 거 아니야. 그래도 해야 하는 거야.”

말은 부드러웠지만, 그 안엔 조급함이 섞여 있었습니다.

아이의 표정이 굳는 순간마다,

나는 사랑이 때로는 부담이 된다는 걸 배워가고 있었습니다.

그건 내 안의 불안이 흘러나온 말이었습니다.


한국의 부모는 사랑을 ‘책임의 형태’로 배워왔습니다.

그래서 아이를 위로할 때조차 ‘책임지게 만드는 말’을 합니다.

“해야 한다”는 문장 속엔 사랑의 불안이 숨어 있습니다.

그러나 쉼은 게으름이 아니라, 생각이 자라는 여백입니다.

L9Q1TaBhcNgd6jJO4KgnX.png

‘빨리빨리’라는 집단 무의식 속에서,

우리는 느림을 잃어버렸고, 그 느림이 주는 위로의 힘까지 함께 잃어버렸습니다.

“조금 쉬어도 괜찮아.”

이 말은 포기가 아니라, 다시 일어설 힘을 키워주는 위로입니다.

그리고 어쩌면, 그 말을 가장 들어야 했던 사람은 나 자신이었는지도 모릅니다.


선택의 기회를 주는 것이 위로입니다

아이에게 선택의 기회를 주는 것도 위로입니다.

운명은 우연이 아니라 선택으로 만들어집니다.

그런데 우리는 종종 아이의 선택을 대신해 주면서

‘아이를 위한 최선’이라 착각합니다.

하지만 선택하지 못한 아이는

결국 자신이 만든 인생을 살아본 적이 없는 어른이 됩니다.


“그때는 어쩔 수 없었어.”

그 말 뒤에는 늘 누군가 대신한 결정이 숨어 있습니다.

진짜 부모의 위로는 아이가 스스로 선택하고,

그 결과를 견뎌낼 수 있는 힘을 믿어주는 것입니다.


대한민국의 부모들은 ‘성공’이라는 집단적 서사를 짊어지고 살아갑니다.

그래서 사랑은 종종 통제가 되고, 위로는 조언으로 변합니다.

사회학적으로 보면, 우리는 오랜 세월 ‘결핍의 기억’을 품고 살아왔습니다.

그 기억은 아이를 더 나은 환경에서 키우고자 하는 욕망으로 발전했지만,

때로는 아이의 자율성을 갉아먹는 불안의 언어로 바뀌었습니다.


저 역시 그 불안 속에서 아이를 사랑했습니다.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내 불안을 물려주고 있었습니다.

위로는 통제의 반대편에 있습니다.

사랑은 완벽하게 돕는 것이 아니라,

불완전한 세상 속에서도 스스로 서보게 하는 믿음입니다.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고 선택의 책임을 배우는 것,

그 경험이야말로 자존감을 키우는 진짜 성장의 수업입니다.

ZrugD7s3xCZfN-y0UF3pF.png

삶은 목적지를 알려주지 않습니다

우리는 여전히 깜깜한 터널을 걷고,

어디쯤 와 있는지도 잘 모릅니다.

그럴 때 필요한 것은 정답이 아니라, 함께 걸어주는 사람입니다.


“괜찮아”보다 “함께 가자”가 위로가 되고,

“다 잘될 거야”보다 “지금 여기서도 충분히 잘하고 있어”가 힘이 됩니다.

한국 사회는 늘 누군가를 앞세우고, 누군가를 뒤처지게 합니다.

그래서 ‘함께’라는 말은 단순한 위로를 넘어

경쟁의 사회를 살아가는 우리 모두에게 필요한 회복의 언어입니다.


아이를 이끌기보다 곁에 서주는 부모,

길을 알려주기보다 함께 걸어주는 부모가

아이의 내면을 단단하게 만듭니다.

결국 삶은 누가 앞서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누가 멈춰 서서 옆 사람을 기다려줄 수 있느냐의 문제입니다.

그 기다림이 곧 인간의 품격입니다.


부모의 위로란, 아이의 삶을 믿는 일입니다

부모는 아이를 키우며 위로를 배웁니다.

아이는 부모를 통해 선택의 책임을 배우고,

그 안에서 서로가 조금씩 성장합니다.

그래서 결국 위로는, 자녀를 위한 것이면서 동시에

나 자신을 위한 공부이기도 합니다.

whSEd9lKKICJxPBI3tJS9.png

부모가 아이에게 해줄 수 있는 가장 큰 위로는

결국 아이의 삶을 믿어주는 일입니다.

아이의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고,

그 실패 속에서 스스로 답을 찾을 거라고 믿어주는 것.

그것이 진짜 위로입니다.


“너는 어떻게 살아가고 싶니?”

이 한 문장이 부모가 아이에게 건넬 수 있는 최고의 위로입니다.

그 질문은 아이 안에 숨어 있던 가능성을 깨우고,

삶을 선택할 힘을 길러줍니다.


그리고 시간이 흘러,

그렇게 자란 아이가 누군가를 위로하게 됩니다.

그 위로의 말들은 다시 나에게로 돌아옵니다.

결국 타인을 위로한다는 것은,

내 안의 상처를 다독이는 또 다른 방식의 ‘나의 위로’입니다.

OqB28dv78uAQ0xPX0AU-r.png

위로는 그렇게 세대를 건너 순환하며,

결국 우리 모두를 조금씩 단단하게 만듭니다.

사람은 위로받은 만큼 위로할 줄 아는 존재로 자랍니다.

그리고 그 언어를 가장 먼저 배워야 하는 사람은, 부모 자신입니다.

오늘도 나는 위로를 배웁니다.

조금 더 느리게, 조금 더 따뜻하게.

그리고 오늘만큼은, 온도가 있는 위로를 건네고 싶습니다.


103동 언니, 김성곤 교수의 부모가 먼저 자라는 수업

Parenting Insights by Prof. Seong-Gon Kim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