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뮤지컬 '어쩌면 해피엔딩'이 부럽다

뮤지컬 어쩌면 해피엔딩의 토니상 수상 소식을 접했을 때, 마음 깊숙한 곳에서 부러움이 피어올랐다. 이는 단순한 개인적 감정의 차원이 아니라, 한국 콘텐츠 산업 전반이 걸어온 길과 내가 몸담고 있는 애니메이션 업계의 현재를 다시금 돌아보게 하는 계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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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어쩌면 해피엔딩의 한 장면 (c) CJ ENM, NHN


나에게는 오래전 '아기공룡 둘리' 애니메이션을 들고 프랑스 깐느의 MIPTV, MIPCOM 등의 영상물 마켓에 참가하여 애니메이션을 판매했던 경험이 있다. 그때 한국에서 온 우리들 애니메이션 판매자, 영화 판매자, 드라마 판매자들은 타국의 셀러들이 바이어와 활발히 비즈니스를 논하는 모습을 보며, 정작 우리 한국관에는 사람들의 발길조차 뜸한 현실을 마주해야 했다. 빈 부스를 바라보며 느꼈던 무력감은 아직도 생생하다.

그러나, 이후 <대장금>이 뒤늦게 수출이 되고, 한국의 드라마의 매력을 알게 된 바이어들이 너도나도 한국의 드라마를 찾아서 한국 드라마의 성공을 견인했다. 영화도 마찬가지로 처음에는 해외 시장에 안 팔렸으나, <괴물>과 <올드보이>를 본 많은 바이어들이 이후 한국 영화를 찾기 시작한 기억이 있다.

한국 영화, 드라마, K-Pop은 더 이상 서브컬처의 영역에 머무르지 않는다. 이제는 세계 주류 문화의 한 축으로 당당히 자리 잡았다. 글로벌 시장에서 한국 콘텐츠가 보여주는 파급력은 과거 우리가 상상조차 하지 못했던 수준에 도달했다. 그리고 이제는 한국산 뮤지컬마저 메인컬처의 무대에서 인정을 받기 시작했다. 이는 기술적 완성도나 이야기의 보편성, 그리고 글로벌 감수성 측면에서 한국 창작자들이 그동안 얼마나 치열하게 노력해 왔는지를 보여주는 증거이다.


이 변화는 애니메이션 업계 종사자인 나에게 분명한 시사점을 준다. 예전에는 "한국 애니메이션의 정서는 글로벌 시장에 맞지 않는다"거나 "우리는 해외 진출 노하우가 부족하다"는 식의 핑계를 댈 여지가 있었다. 하지만 이제는 그러한 변명은 더 이상 유효하지 않다. 세계는 한국의 이야기와 감성을 충분히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고, 이미 여러 장르에서 그 가능성이 검증되었다. 그렇다면 애니메이션만 뒤처질 이유는 없다.

타 장르는 익숙하지 않은 한국인 얼굴과 정서를 가지고도 저렇게 성공하는 것이다. 가장 수출이 어렵다는 뮤지컬마저도 이제 세계 최고의 상을 받은 지금 한국애니메이션 업계도 많은 노력이 필요하다.


최근 국산 애니메이션에서도 긍정적인 조짐이 보인다. <킹오브킹스>와 넷플릭스의 첫 한국 오리지널 애니메이션 <이 별에 필요한>과 같은 작품들이 등장하면서 글로벌 인지도 확보의 기반이 마련되고 있다. 이는 단순한 콘텐츠의 수출 차원이 아니라, 한국 애니메이션이 세계 시장에서 경쟁 가능한 산업적 생태계를 구축할 수 있다는 신호이다. 물론 이러한 흐름이 본격적인 성공으로 이어지기 위해서는 여러 가지 구조적인 조건이 충족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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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니메이션 '이별에 필요한' 이미지 (출처 : 넷플릭스)


콘텐츠 산업에서 매우 중요한 요소 중 하나는 자국 시장에서 일정 수준 이상의 경제적 성공을 거두는 것이다. 자국 시장의 성공은 단순한 수익 창출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 이는 창작자들에게 자신감을 심어주고, 후속 프로젝트를 위한 재투자 여력을 확보하며, 무엇보다도 작품의 완성도를 높일 수 있는 환경을 제공한다. 이러한 내부적 기반 없이는 글로벌 시장에서 지속적으로 경쟁하기 어렵다. 할리우드 영화나 일본 애니메이션이 세계 시장을 장악할 수 있었던 것도 자국 시장이라는 든든한 배경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한국 애니메이션 시장의 현재 상황은 녹록지 않다. 국내 시장의 규모는 지속적으로 축소되고 있으며, 방송 편성이나 극장 개봉 등 기존의 유통 경로마저도 점점 좁아지고 있다. 이는 산업 전반의 생태계 유지에 심각한 위협이 되고 있다. 특히 젊은 창작자들이 지속적으로 작품을 만들고 실험할 수 있는 토양이 점점 메말라가고 있다는 점은 장기적으로 매우 우려스러운 현상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한국 애니메이션이 글로벌 시장에서 충분히 성공할 수 있다고 믿는다. 이제는 자국 시장에만 의존하는 전략에서 벗어나야 한다. 글로벌 플랫폼과의 협업, 국제 공동 제작, 현지 시장에 최적화된 콘텐츠 전략 등 다양한 방식으로 세계 시장을 적극적으로 공략해야 한다. 이미 여러 성공 사례에서 확인했듯이, 한국의 창작 역량과 기술력은 충분히 세계적 경쟁력을 갖추고 있다.


여기서 한 가지 재미있는 상상을 해봤는데, 한국 애니메이션 업계는 사실 한국콘텐츠진흥원의 지원금이 가장 확실한 투자금이다. 하지만 < 킹오브킹스>가 만일 지원금 신청을 했더라면 과연 지원금을 탈 수 있었을까? 스토리 자체가 종교적이라 아마 불합격했을 것이다.


내가 사랑하는 한국 애니메이션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혹은 점점 사라져 가는 국내 시장에 얽매이지 않고, 더 넓은 세계에서 그 가치를 인정받는 시대가 오기를 바란다. 이는 단순한 바람이 아니라 반드시 이루어야 할 과제이다. 글로벌 시장은 한국 애니메이션이 성장할 수 있는 새로운 무대이며, 우리가 그 무대에서 성공하기 위해 필요한 것은 변명이나 핑계가 아니라 철저한 준비와 치열한 실행뿐이다.


이제는 그 어느 때보다도 치밀하고 과학적인 접근이 필요하다. 세계 시장의 트렌드를 면밀히 분석하고, 현지 소비자들의 문화적 코드와 감수성을 깊이 이해해야 한다. 그리고 한국 고유의 이야기와 감성을 현대적 기술과 접목하여 글로벌 시장에 어필할 수 있는 콘텐츠로 재구성해야 한다. 이러한 전략적 접근 없이는 수많은 콘텐츠가 쏟아지는 글로벌 시장에서 주목받기 어렵다.

따라서 앞으로의 한국 애니메이션 산업은 기술, 스토리텔링, 제작 프로세스, 마케팅 전략 모든 측면에서 새로운 표준을 구축해 나가야 한다. 이것이 바로 내가 지금 애니메이션 업계의 한 사람으로서 절실히 느끼는 시대적 과제이며, 실천해야 할 목표이다. 한국 애니메이션이 글로벌 주류 문화의 일원으로 자리매김하는 그날까지, 우리 모두는 더 이상 변명에 기대지 말고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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