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리적 상징 해석과 니체적 해석
심리적 상징에 대한 분석
키워준 엄마에서 벗어나고, 낳아준 엄마를 죽인다. 이 모든 것이 자신을 만들어준 것들과의 이별이다. 오이디푸스에서의 아버지란 사회의 규범과 제제이지만 여기서의 어머니는 자신을 만들어준 사회다. 어른이 된다는 것 성숙한다는 것은 바로 그것이다. 자신을 만들어준 엄마 즉 사회와 구조에서 독립하고 자신만의 것을 세워나갈 수 있는 것이다. 오이디푸스가 아버지를 죽이고 엄마와 결혼하는 것은 에스텔라가 키워준 엄마를 떠나서 친구들에게 가는 것이다.
에스텔라는 태생부터 사회에 적응하지 못하는 아이였고 키워준 엄마는 그 에스텔라를 사회에 적응하도록 하는 역할을 한다. 그러나 그것을 하지 못한채 죽는다. 그리고는 친구를 만나는데 도둑들 즉 사회부적응자들이다. 엄마를 자기가 죽였다는 죄책감이 있었으나, 그것이 사실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고 그 죄책감에서 벗어난다.
엄마를 만나러 가는 장소는 분수대이다. 그것은 솟구치는 생명의 상징이다. 분수대에 올 때마다 변화를 겪는데, 바로 새로운 탄생을 하는 것이다. 낭떠러지에서 떨어지는 죽음의 상징에서 물에 빠지고 다시 태어난다. 그것은 마치 기독교의 세례와 같다. 에스텔라가 키워준 엄마를 극복하는 첫 단계를 지나 크루엘라가 된다. 이 때 함께 했던 친구들과도 멀어진다. 그리고는 그 크루엘라가 불에 타 죽는다. 그 후 크루엘라 버전2는 그리고는 친구에게로 돌아간다. 그리고는 친모를 사회적으로 죽인다. 그리고 크루엘라는 또 다시 태어난다. 친구를 넓혀나가고 새로운 계획을 세운다.
죽음 그리고 다시 태어남 그것은 소중한 것에 대한 부정 그럼으로 성숙해가는 것이다. 사회 적응의 상징인 대리모를 벗어나서 자신의 원래 모습과 꿈을 찾아가서 롤모델로 삼은 것이 친모였다. 처음 변화는 첫 크루엘라는 친모를 모방하는 것이었다. 그 친모를 넘어서기 위해서는 친모를 죽여야만 한다. 그러지 않으면 자신이 죽기 때문이다. 그 집의 집사는 계속 존재하고 그 집의 주인은 변화한다. 새로운 변화를 가장 적실하게 파악하고 변화에 잘 따르는 것이다.
니체의 권력의지로 본 해석
남작과 크루엘라의 대립을 볼 필요가 있다. 남작은 클래시컬한 모더니즘적인 사람이다. 자신을 발산하지 못하고 억눌려 지배당하고 시키는대로만 하는 노예같은 일하는 자들이다. 그에 반해 크루엘라는 가벼움, 파괴적 창조, 발랄함을 보여준다. 니체적으로 봤을 때 크루엘라는 활력과 생명력이 넘친다. 기존의 것을 수용하지 않고 엄숙함을 거부하며 자신들의 넘쳐나는 활력을 그대로 분출한다
일차적으로 니체적이지 않은 자들은 복종하는 종업원들 그대로 따르던 에스텔라의 친구들이다. 크루엘라가 동지를 동등한 의지의 존재자로 여겼을 때 그들은 함께 할 수 있게 되었다. 지배자와 노예의 관계에서는 니체적인 주체적 존재자가 없다. 남작부인은 니체가 말하는 권력의지가 뛰어난 사람이었다. 그러나 그는 자신과 맞서는 존재가 있어야만 자신이 초인이 될수 있음을 몰랐다. 노예로만 둘러쌓인 주인은 초인이 될수 없다는걸 몰랐던거다.
주인의 도덕이 니체가 추구하는 도덕 맞다. 그러나 그것은 힘의 의지를 실현한다는 측면에서이다. 노예로만 둘러쌓인 주인은 자신도 힘에의 의지를 잃어버린다. 자신의 힘에의 의지를 실현할 대상이 없어져버렸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퇴폐적인 평화와 안정적인 상태를 갈구한다. 명령과 그 이행이 안정적으로 수행되는 주인도 노예도 수동적인 상태가 되는 것이다. 결국 남작부인은 관능성과 생기발랄함을 잃고 퇴폐주의적인 엄숙성, 근엄성, 도적적인 억제와 억눌림에 머물게 된다. 그것이 귀족적인 젊잖음의 미술과 디자인이다.
크루엘라는 그러한 것을 깨부수는 것이다.
우리는 왜 이 영화를 보며 해방감과 시원함 그리고 쾌활한 기분을 얻는가? 그것은 우리의 현실이 바로 그러한 남작부인의 세계에 머물러 있기 때문이다. 크루엘라의 세계는 우리에게는 아직 범접할 수 없는 판타지적 세계이다. 판타지를 보며 대리만족하고 이미지적으로 쾌를 얻는 것이다. 그것이 현대의 디오니소스적 예술이 주는 예술적 효과이다. 한 마디로 해방감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