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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주가원 Aug 04. 2024

안되는 것이 우긴다고 될 수는 없다

여름이 점점 다가오고 있는지 해가 길어지고 있었다. 겨울철에는 출퇴근할 때 세상이 깜깜해서 나무에 새순이 돋았는지, 새들이 다시 활동을 시작했는지, 벌레들이 세상을 점령하기 시작했는지 등의 시간의 변화를 전혀 알 수 없었고, 지나가는 사람들의 얼굴도 제대로 보이지 않아서 그야말로 자기 존재감을 마구 드러내는 산발한 머리와 화장기라고는 약에 쓸려고 해도 보이지 않는 맨얼굴, 노숙자로 오해받을 만큼 후줄근한 무릎 나온 추리닝 차림(운동복 따위의 고급스러운 단어로 절대 표현될 수 없다) 이었지만, 해가 길어지고 거리를 오가는 사람들의 수가 급속도로 늘어나고 있는 시간을 맞이하고 나니, 시미나도 더는 거지꼴을 하고 돌아다니는 것이 부담스러워지기 시작했다. ‘스쳐 지나가는 사람을 왜 신경 써, 다시 볼 것도 아닌데 상관없지’라고 당당하게 생각하면 좋았겠지만, 시미나는 다른 사람들의 평가와 인정에 예민했으며, 지구는 허브 행성으로의 역할을 매우 잘 수행하고 있었으므로 겨울이 거의 끝나가기 시작하자 거리 곳곳에 관광객들이 바글거리기 시작했다.      

화사하다 못해 화려한 관광객들 사이를 거지꼴로 편안하게 다닐 수 있을 만한 무신경함도 없고 모르는 사람들 속에서도 느껴야 하는 초라함을 참을 만큼 대범하지도 않은 시미나는 싫어도 해야 하는 일이 있지라며 자기 합리화를 시전하고 주섬주섬 멀쩡한 옷을 찾기 시작했다. '정말 싫다'라고 생각하면서 먼지 쌓인 화장대를 뒤적이는 자신이 한심했지만, 평생을 그렇게 살아온 마음을 한순간에 바꾸는 것은 정말이지 어려운 일이었다.      

퇴근 이후에는 남은 밤이 다 지나가도록 별로 생산성 없는 일 위주로 놀다가, 해가 뜨면 잠이 드는 생활을 지속했는데 오늘은 이유 없이 눈이 일찍 떠졌다. 햇빛 잘 드는 창가에 앉아서 따뜻하면서도 시원한 바람 냄새를 맡으며 앉아있는데 문득 의미 없이 뒹굴뒹굴하고 있는 시간이 아깝게 느껴졌다. 시미나는 오랜만에 차려입고, 평상시보다 일찍 집을 나섰다.      


예전에는 출근 도장을 찍듯이 다니던 커피숍의 지점을 들러 다이어트를 이유로 눈길도 주지 않던 런던포그 밀크티를 호로록 대면서 출근하는데, 우울증 걸린 무기력증 환자 주제에 다이어트는 왜 신경을 썼던 것일까? 라고, 갑자기 든 의문에 머릿속이 혼란해져 왔다. 물론 시미나 머릿속의 복잡함과는 전혀 상관없이 세상은 그대로였다.      


시미나의 자아 성찰적 의문과는 무관하게 첫 상담부터 다사다난했다. 오늘의 고객님은 음악을 좋아하시는 것이 틀림없는지 끊임없는 도돌이표 질문을 반복했다.    

  

“ 솔라 공용은행에서 이쪽으로 전화해 보라고 했다니까! 정지된다고, 왜 못 해준다는 거야! ”     


“ 네? 은행에서 여기로 전화해 보라고 했다고요? 고객님, 본인 계좌 정지를 요청하시는 거예요? 우리은하 말고 타 은하에 있는 계좌요? ”     


“ 아니라고 사기꾼! 내 돈 떼먹고 E190-AQ 은하단에서 지구로 도망친 놈 계좌! 스페이스 폴(우주 경찰) 이 지구로 도망친 거까지 확인해 줬어! 여기로 정지요청 하라고 했다고! ” 


“ 고객님, 타인의 계좌 정지는 가능 여부에 따라서 은행에서 진행하는 것이지, 저희 16920 세타 상담소에서는 불가능합니다.”라는 대화가 무한루프로 반복되었다.      


고객의 이야기를 순서만 바꿔서 반복하다 보니, 시미나의 머리 꼭대기에서도 열이 났다. 우주 상담소에 은하계 사이 각 행성의 매끄러운 자금 연결관리나 다른 행성 계좌의 사고관리를 돕는 업무를 진행하는 내용이 있긴 했지만, 그것은 개별 지역 행성 은행에서 전 우주적 진행이 어려운 일을 돕는 보조적인 것이라, 오직 타 행성 본인 계좌 관련한 상담만 가능했다. 당연히 타인의 계좌 관련 상담은 있을 수가 없었다. 은행도 아니고 경찰도 아닌데 말이 안 되는 소리였다. 고객이 은행에서 얼마나 억지를 부렸으면 여기까지 연결을 해 줬겠느냐는 생각이 들면서도, 자신들의 일을 우주 상담소에 떠넘기는 행태에 뒷골이 당기면서 짜증이 치밀어 왔다. 다행스럽게도 이제는 이런 헛소리쯤은 가뿐하게 넘길 수 있게 된 시미나는 기계적으로 대답했다.     

 

“ 고객님, 우주 상담소에서는 진행할 수 없습니다. 경찰서 신고 부탁드립니다. ”     


“ 아니! 경찰이랑 솔라 은행에서 된다고 했다고! ”      


“ 고객님 경찰서에서 되는지 확인을 해보라는 말인 거 같은데 우주 상담소에서는 진행 안 되는 내용이에요. ” 고객도 들을 생각이 없고, 시미나도 들어줄 생각이 없는 둘 사이는 알력은 계속되었다. 경찰서까지는 계속 우길 수 없었던지, 이 고객 놈은 바로 말을 바꾸며 태세 전환에 들어갔다.     


“ 솔라 은행에서 된다고 16920 세타 상담소에 요청하라고 했다고! ” 다시금 인내심에 금이 가는 마음의 소리가 들렸지만 잘 참아낸 시미나는 대답했다.   

   

“ 정지되는 거였으면 솔라 은행에서 진행이 되었을 텐데, 은행에서 안 되기 때문에 우주 상담소에 문의를 한번 해보는 게 좋겠다고 이야기한 것이 아닐까요? ” 물론 이 고객이 솔라 은행에 전화해서 지금과 똑같이 자기 말만 하고 거절을 받아들이지 않았기 때문에, 나만 아니면 된다는 심정으로 그쪽에서 우리에게 떠넘긴 것이 분명 했다.      


고객에게 더 이상 사실은 중요하지 않았다. 인정하고 싶지 않을 뿐, 이만큼 여러 번 거절을 당하면 본인도 안되는 것인 것을 마음속 깊은 곳에서 짐작하고 있기 때문이다. 자신의 어리석음에 대한 화풀이 대상이 필요했고 여러 번의 거절로 지칠 대로 지친 상태라 악에 받친 자신의 화를 받아줄 친절하지 않은 상담사가 걸렸기 때문이다; 자신의 요구를 들어주지 않으면 불친절하다고 항의한다.      


“ 너 이름이 뭐야? 그사이에 내 돈 빠져나가면 네가 책임질 거야?" : 상담사의 이름은 초기 인사말과 끝맺음을 위해서는 계속 언급되며, 사기꾼 계좌의 돈은 보통 입금되자마자 빠져나간다.     


" 진짜 급해서 그러니까 일단정지만 시켜 달라고! " : 일단정지는 없다.     


" 경찰서에는 다시 신고할 테니까! 네 가족이 이런 일을 당했어도 안 된다고 이렇게 불친절하게 이야기할 거야? : 가족이라도 법적으로 안 될뿐더러, 우주 상담소에는 권한도 없다. ” 지속적인 실랑이는 모두를 지치게 했지만 결국 승자는 시미나일 수밖에 없었다.      


“ 우리 상담소에서는 진행할 수 없지만, 솔라 은행에서 진행이 된다고 했으면 그쪽에 다시 문의해 보세요. ” 결국 시미나도 떠넘기기를 시전 했다.      


여러 차례 솔라 은행에 전화하면 되느냐, 모른다. 그쪽에 알아보라는 공방이 한참이나 더 오간 뒤, 결국 고객은 화를 참을 수 없었는지 뚝 소리와 함께 전화를 끊었다. 그 뒤로는 일진이 사납겠구나 하고 긴장한 것이 무색하게 별일 없이 일반적인 문의들만 들어왔고 저 멀리에서 파트장의 신경질적인 목소리가 들리기 전까지는 나름 평화로운 시간이 지나갔다. 


“ 누구한테 보고하고 처리 한 거야? 질문했어? ” 한참 파트장의 고함소리가 계속되었다.     


“신입사원들 투입한 지 얼마 안 됐잖아. 안 물어보고 안내서 내용 보고 거기 나와 있는 대로 처리했는데, 하필이면 계좌 사고 신고였던 거지. 은하계 간 계좌 정지요청이었던 건데 그게 오죽 복잡해. 매뉴얼 대로 될 리가 없지.” 오늘 옆자리에 앉은 구디씨가 속닥였다.     


구디씨는 비교적 지구에서 가까운 달 출신 결혼 이민자였는데, 성격이 좋고 인심이 어찌나 좋은지 근처에 앉을 때마다 먹을 것을 한 아름 챙겨 주었다. 그래서 시미나씨도 구디 씨에게는 자연스럽게 친절해질 수밖에 없고 마음이 약해졌다. 시미나에게 구디는 먹을 것을 챙겨 주는 좋은 사람이었다. 그래서 별로 궁금하지는 않았지만, 대화를 이어갔다.      


“ 신입인데 계좌 사고 관련 처리 건이 들어와요? 안 들어올 텐데? 왜 안 물어보고 처리했대요? ”      


“ 물어보면 이거 교육했는데 왜 모르냐고 난리 치니까 안 물어보고 안내서대로 한 거지, 뭘 물어봐야 하는지 뭘 물어보지 말아야 하는지 알 수 없잖아. 신입인데 뭘 알겠어. ” 구디씨는 별로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그쪽을 흘깃대며 속삭였다.”      


시미나는 바로 어떻게 된 일인지 눈치를 챘다. 아무나 드나들기 쉬운 곳. 들어오기도 쉽고 나가기도 쉬운 우주 상담소는 수습을 벗어나서 일이 조금만 어려워 지면 바로 그만두고 사라졌다. 경력이 쌓이더라도 신입과 경력직원의 월급 차이는 없었으며, 잘하는 것만큼 일을 더 많이 떠넘기려고 애를 쓰고 대우를 해주지 않는데, 당연히 전문인력 양성이 안 되는 구조였다. 그러니 야간에 하는 일 중 제일 어려운 일에 속하는 은하계 간의 계좌 사고 관련은 수습 직원들에게는 익숙해지기 전에는 알려주지도 않는 일 이었고 신입사원에게는 사고 신고 전화는 거의 연결되지도 않았다. 불운하게도 가끔 한 번씩 일어나는 너무 많은 전화가 한꺼번에 몰려들어서 통제가 안 되는 사이 겨우 수습을 벗어난 신입직원에게 연결된 모양이었다. 관리자도 화나고 신입도 불행해진 안타까운 사건이었다.      


이곳 우주 상담소는 자본주의의 개념이 가장 명확하게 드러나는 곳이었다. ‘ 돈 받는 만큼만 일한다. ’ 그래서 상담소는 늘 인력 부족에 시달렸고 전화가 몰리는 시간에는 관리자들이 신입 하나하나를 제어할 수 없는 상태였다. 돈은 조금주고 신입을 키울 시간은 없었으며, 사람은 부족한 상태, 자업자득이라고 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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