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개인적으로는 고등학교 때 댄스 동아리 활동을 했기 때문에 무대 경험이 주는 짜릿함을 잘 알고 있었다. 무대에 오르기 전에 입술이 바짝 마르고, 무대 위에서는 심장에 무리가 가는 기분은 중독을 불러일으키는 듯 했다. 나는 누가 봐도 명백한 I로 평생을 살아왔지만 춤을 출 때는 마치 다른 사람이 된 것처럼 미쳐 날뛰고는 했다. 포장해서 말하자면 무대 체질인 거고, 현실은 이중 생활을 하는 고등학생 이었달까? 관종은 아니었던 것이 오히려 춤을 출 때 내가 희열을 느끼는 부분은 다른 사람들의 관심을 받는 것이 아닌 다른 사람들의 시선에서의 자유로워지는 것이었다. 노래 가사 한 줄처럼 " 남들이 날 어떻게 보든 상관없어." 이런 마음이랄까?
나와 내 친구들은 장소를 가리지 않고 배터리로 쓸 수 있는 CDP를 들고 춤을 추러 다니고는 했다. 많은 시간을 산본 중앙공원에서 춤을 추고는 했는데 지나가던 꼬맹들이 싸인 해달라는 해프닝이 있기도 했다. 그리고 또 많이 방문했던 곳이 군포시민회관 1층이었는데 외부에 유리문이 10미터 정도 연결 된 공간이 있었다. 그 유리문을 거울 삼아 연습을 하고는 했는데, 그런 모습이 거기 계신 어른들 눈에 딱해 보였는지 아예 그 자리에 거울을 설치되었다. 하지만 그게 소문이 났는지 다른 팀들도 연습하러 오기 시작해서 자리 잡기가 어려워지기도 했다.
내가 서본 무대 중에 가장 큰 무대는 군포 시민 회관 대강당(1300석)이었고 가장 많은 인파가 있었던 곳은 군포 시청 앞 야외 무대였다. 사실 내 앞에 사람이 몇 명 있는지 와는 상관없이 무대에 오르면 심장이 나대고는 했다. 수 십 년이 지난 지금 도 내 인생에서 행복했던 top 3을 뽑으라면 꼭 무대 경험을 꼽는다. 그리고 나는 그때부터 내 캐치프레이즈로 내 영어 이름과 합쳐 Stacy On Stage를 쓰고 있다. 지금도 카톡 프로필에 써 놓은 저 문구에 대해 가끔 물어오는 사람들이 있다. 왜 On Stage 냐고...... 그럼 씩 웃으며 라떼를 시전 한다.
이렇게 내 인생의 지대한 영향을 미쳤던 경험을 자녀에게도 만들어 주고 싶은 건 어찌 보면 당연했다. 요즘은 시대가 많이 바뀌어서 아이들이 TV에서 트로트도 부르고, 댄스 신동이니 이런 모습도 보이지만 나는 이 녀석이 튼튼한 어린 시절을 보내고, 잘 준비된 요즘 말로 육각형 아이돌이 되길 바랐던 것 같다. 그래서 일상이라는 궤도를 유지하면서 할 수 있는 특별한 경험들을 소중히 여겼고, 기회들은 감사히 우리를 방문해 주고는 했다. 그 녀석이 7살이 되었을 때였다. 그 녀석은 어린이집을 다니고 있었고 두 번의 작지만 소중한 무대 경험을 얻을 수 있었다.
첫 번째는 짧은 연극 공연 같은 것이었다. 어린이집에서 결혼에 대해서 배웠고 모의 결혼식을 해보기로 했단다. 내가 이렇게 담담하게 문자화 했지만 그 녀석의 워딩은 가히 충격적이었다. "엄마, 나 결혼해." 그때 그 충격이란 정말 미래에 며느리가 왔을 때 받을 타격을 미리 받는 듯했다. 나는 당황한 마음을 숨길 틈도 없이 버벅거렸다. "누.. 누구... 랑?" 반에서 가장 예쁜 아이란다. 선생님께 물어보니 모의 결혼식을 연극처럼 하는데 배역을 정했고 이 꼬마가 신랑역에 선출되었다고 한다. 제비 뽑기로 역할을 정하지 않았을까 하는 내 예상과 달리 녀석은 당당히 인기투표를 통해 남자 주인공 역을 따냈다고 한다.
그때 알게 되었다. 이 녀석이 밖에서 사랑 받는 사회생활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아기 때부터 많은 어르신들이 예쁜 꼬마라며 커서 여자 많이 울리겠어 이런 애기를 종종 하셨고, 내 눈에 사랑스러워 보이긴 했지만 어른들의 의례적인 덕담이고 내 눈에 콩깍지라고만 생각을 했던 터였다. 그랬다. 이 녀석은 베일듯한 조각 미남은 아니지만 유독 작은 머리를 바탕으로 호감형 외모를 가진 인간이었던 것이다. 사실 이놈의 인기는 초등학교에 가서 까지도 계속되었다. 특히 여자 친구들이 그렇게 이 녀석과 친하게 지내고 싶어 했다. 어느 날은 학교 끝나고 친구 몇 명이 올 수도 있다 길래 당연히 남자 애들 일거라고 1도 의심을 안 했는데, 여자 친구들만 3명이 왔다. 그래서 또 한 가지 알게 되었다. 이 녀석의 사회생활 컨셉이 본인이 원하든 원하지 않든 만인의 연인이라는 것을.
사실 이 녀석의 매력은 호불호가 크지 않은 외모 말고 한 가지 더 있었는데, 만인의 연인이라는 표현에 걸맞게 모두에게 따뜻하고 젠틀하게 대하는 태도가 그것이었다. 그런 태도 덕분인지 임원 선거에 나가면 여자아이들의 몰표를 받아오고는 했다. 어떻게 그런 성격으로 키웠냐고 물으신다면, 조금 슬픈 이야기로 연결된다. 나와 남편이 결혼했을 당시, 남편은 새로운 분야에 도전을 하겠다고 했고 그 결정은 필연적으로 가난을 초래했다. 덕분에 우리는 요 꼬맹이가 초등학교에 입학하기 전까지 계속 짧은 텀으로 이사를 해야 했고 이 녀석이 거친 어린이집, 유치원 총합이 총 7개였다.
즉, 이 녀석이 지금 주인공으로 뽑힌 그 상황이 그 녀석의 몇 달 다니지 않은 일곱 번째 어린이집에서였다는 이야기다. 그 어린이집은 0세부터 쭉 다니는 곳으로 유명했는데, 이 녀석은 그 굳게 엮인 친구들 사이에서 나름의 성과를 이뤄낸 것이었다. 이사를 할 때마다, 어린이 집을 옮길 때마다 아이에게 정말 미안했다. 이미 친해진 친구들과 헤어져야 하는 것에. 계속 다른 지역으로 이사를 다녀 적응해야 되는 사회적 분위기가 바뀌는 것에. 그런데 그런 우여곡절이 이 녀석에게는 사람들과 어울리는 법을 가르쳐 준 것이 되었다. 지금까지 아이를 키워보니 그렇다. 내가 가르칠 수 있는 것보다 없는 게 더 많다.
그중에 하나가 이 챕터에서 말하고 있는 무대 경험이었다. 성공적인 연극 데뷔(?) 무대를 마친 뒤, 감사히 한 번 더 조금 더 큰 무대 경험 기회가 찾아왔다. 쉽게 말하면 재롱 잔치가 열린 것이다. 그 녀석이 속해 있던 반은 '그대에게'라는 응원가에 맞춰 율동, 아니 춤에 조금 더 가까운 퍼포먼스를 펼쳤다. 같이 갔던 할머니, 할아버지는 무대에 다른 애들은 안 보이고, 우리 애만 보인다며 입이 마르도록 칭찬하셨다. 나는 의심이 많고 객관적인 사람이라 '다른 할머니, 할아버지들도 다 자기 애만 보일 거예요.'라는 말을 하려다가 할머니, 할아버지의 기쁨을 위해 음소거 처리했다.
최대한 객관적으로 무대를 관찰한 첫 번째 내 소감은 "와, 선생님 진짜 고생하셨겠다. " 였고 두 번째 소감은 "어쭈구리, 저 녀석 무대에서 눈빛이 살아있네."였다. 그렇다. 선수는 선수를 알아본다고. 나는 알 수 있었다. 이 녀석이 무대 체질이라는 것을. 물론, 퍼포먼스 점수로 평가를 하자면 박자를 놓친 부분도 있고 손의 각도 처리라던가 손 볼 곳이 많아 보였지만 눈빛은 속일 수 없었다. 가끔 남편은 내게 핀잔을 준다. 내 자식으로 사는 거 정말 힘들겠다고. 재롱 잔치면 "아이고, 내 새끼 잘하네 오구 오구!" 하고 말면 될 것을 이 녀석이 가진 가능성을 평가하고 그다음 실천 과제들 까지 쭉 리스트 업 해 버리는 뼛속까지 INTJ 엄마.
지금까지 드러난 단서들은 모두 아이돌을 가르키고 있었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심증일 뿐, 결정적인 물증은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정말 쉽게 누군가 이 친구는 아이돌이 될 자질을 가지고 있습니다 라고 속 시원하게 말해주면 좋겠다는 생각도 들었지만, 사실 이 분야의 탑 티어 전문가 이신 이수만 님, 박진영 님, 방시혁 님 정도가 아닌 이상 누가 말해줘도 나는 쉽게 믿지 못할 터이기도 했다. 그래서 이 싸움은 외로웠고 아직도 조금 외롭다.
과연 이 분야가 객관적 검증이 되긴 하는 걸까? 그 검증은 어느 시점 쯤 가능해 질까? 나는 궁금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