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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 회장을 거쳐 전교부회장에 당선!

by 스테이시

아이는 내가 인지하지 못하는 사이에 조금씩 자라나고 있었다. 언제까지나 내가 이끌어 줘야 될 것이라고 생각하던 녀석이 하나 둘, 자신의 원함들에 대해서 자신의 의지를 사용하기 시작했다. 어쩌면 기다리던 순간들이기도 했던 것 같다. 결국 양육자라는 건 아이들이 스스로 날 수 있을 때까지 둥지에서 떨어뜨리는 역할을 해주는 거니까 말이다. 지금까지는 풍향과 지형을 고려해 둥지에서 밀어보고 아니다 싶으면 잽싸게 가서 내 날개에 태워왔지만 이제 녀석은 혼자 파닥 거리는 날갯짓을 시작했다. 이제 내 역할은 로드맵 설계자에서 필요할 때만 도움을 주는 서포터로 바뀌어 가고 있었다.


그것을 실감할 수 있었던 계기가 바로 임원 선거였다. 녀석이 2학년 때 회장 임명장을 받아왔길래 무슨 일인지 물었더니 모두가 돌아가면서 하는데 자신이 차례가 먼저 와서 받아왔다고 그랬다. 그래서 나는 그 임명장을 코팅해서 벽에 딱 잘 보이게 붙여 주었다. 이 방법은 내가 어릴 때 우리 부모님께서 해주신 방법이기도 했다. 아주 작고 사소한 것이라도 아이가 의미를 느낄 수 있도록 크게 칭찬해 주면서 자존감을 높여주는 방법 말이다. 이것도 할 수 있는 시기가 제한적이다. 사춘기가 되면 그냥 엄마의 오버로 비칠 수 있기 때문이다. 다행히 우리 집 꼬마는 이 디스플레이가 싫지는 않았나 보다.


3학년이 되더니 그 상장 컬렉션에 한 칸을 더 추가하고 싶어 졌는지, 반에서 자신이 받고 있는 호감도를 고려했을 때 승산이 있다고 판단한 건지 회장 선거 출마를 고민하기 시작했다. 2학기가 되자 마음이 90% 정도 출마에 가 있는 상태에서 살짝 망설이는 모습을 보였다. 며칠간 망설이는 이유를 떠보자, 소견 발표에서 뭐라고 하면 좋을지 걱정이 되는 듯했다. 그래서 이 때다 하고 엄마가 도움을 자청했다. 이곳에 제일기획 오프라인 카피라이터 인턴을 했던 내 재능을 쏟아부으리라 하고 소견문 작성이라는 사이드 프로젝트에 돌입했다.


내가 쓰는 카피의 주 타깃층은 3학년이었다. 첫 번째로 길이적으로 짧아야 했다. 즉 지루하지 않아야 했고 두 번째로 재미있어야 했다. 뻔하지 않고 다른 학생들의 소견과 달라서 기억에 남아야 했다. 마지막으로 이건 내 글 쓰는 스타일이기도 하지만 사실에 기반해야 했다. 아무리 좋은 글이어도 그게 화자와 스트리로 연결되있지지 않으면 향기 없는 조화에 불과하다고 생각했다. 이 세 가지 조건을 충족한 소견문을 쓰는 건 쉽지 않았다. 방금 말한 건 콘텐츠의 요건이었다면, 발표 스킬적으로는 질문이라는 기법을 효과적으로 도입해 관심을 유도해야 했다. 이렇게 말하면 엄마가 다 준비해 준 것이라고 생각하실 수 있지만, 더 중요한 건 실제 시연을 하는 사람의 퍼포먼스였다. 결국 내가 쓴 소견문의 콘셉트를 이해하고 발표를 하려면 무대체질을 발휘하고 쇼맨쉽이 필요했고 다행히 이 녀석은 그것에 능했다. 그렇게 나온 첫 번째 소견문은 다음과 같았다.


[소견문 1]


안녕하세요, 저는 회장 후보 OOO입니다.

저는 학원을 딱 하나만 다니고 있습니다. 무슨 학원일까요? (친구들의 대답을 조금 기다림)

네! 바로 레고 학원입니다. (당시에는 실제 레고 학원만 다니고 있었음)


제가 레고를 좋아하는 이유는 각각의 다른 모양의 블록들이 만들어 낼 수 있는 하나 된 모습의 매력 때문입니다. 이와 같이 다양한 모양의 우리 반 친구들이 하나 되어 아름다운 모습을 만들어 낼 수 있도록 선생님을 돕고 우리 반을 이끄는 회장이 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소견문 1번의 포인트는 두 가지였다. 보통 학원이라고 말하면 영어나 수학을 생각하고 있는데 레고라고 말하는 반전이 첫 번째고 두 번 째는 누구나 이해하기 쉬운 레고의 캐릭터 '다양한 모양의 하나 됨'을 차용한 것이다. 결과는 대 성공이었다. 집에 돌아온 아이는 회장에 선출되었다고 한다. 물론 내가 써준 소견문의 역할보다는 아이가 평소에 친구들하고 쌓아왔던 교우관계가 탄탄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고 생각했다. 아이는 자세히 말하지 않았지만 나중에 같은 반 어머님께 전해 들은 바로는 여자 아이들이 몰표를 선사했다고 한다. 아이는 이 경험을 통해 자신감에 한 칸 레벨업을 한 듯했다.


그렇게 첫 번째 도전으로 회장에 당선된 아이는 자신감이 절정으로 올랐는지 4학년 때는 바로 1학기에 회장선거에 도전하겠다고 했다. 나는 살짝 걱정이 되었다. 작년에는 2학기 때였기 때문에 반 친구들이 이 녀석의 매력을 충분히 알고 있었기에 뽑혔을 텐데 1학기 선거는 이미지 싸움이라고 봐도 과언이 아니었다. 아이가 한 번에 당선을 맛봐서 이번에 떨어지면 너무 좌절하는 것 아닐까 걱정을 많이 했다. 그래서 이번에는 첫 인상에서 불리한 점이 될 수 있는 상대적으로 체구가 작음에 대해서 오히려 먼저 치고 나가는 전략을 짜기로 했다.


[소견문 2]

안녕하세요, 저는 회장 후보 OOO입니다.

오늘은 제가 좋아하는 캐릭터는 하나 소개해 드리려고 합니다.


이 캐릭터는 파란색이고 아주 빠릅니다. (실제로 파란색 셔츠를 입고 갔음)

그리고 아주 작습니다. 바로 저처럼요. (실제로 반에서 키가 작은 편이었음)


무슨 캐릭터 인지 아실까요?

네! 바로 소닉입니다.


제가 소닉을 좋아하는 이유는 친구들이 어려운 상황에 있을 때 빠르게 나타나 도움을 주기 때문입니다. 저도 이와 같이 어려운 친구들 돕고 반 전체를 돌아보는 회장이 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이 소견문은 아이가 실제로 가장 좋아하는 캐릭터에서 출발해서 만들어진 것이었다. 아이디어가 떠오르지 않을 때는 문제가 제기된 그 처음 시작점에 답이 있다. 만약 아이가 처음부터 어려운 친구를 돕겠다고 말했다면 기억에 남지 않는 소견문이 되었을 것이다. 그런데 소닉을 데려왔기 때문에 이 소견문은 오래 기억될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사실 이 녀석은 여자아이들에게는 그냥 있어도 호감을 받는 친구지만, 아직 키가 작은 편이고 남자아이들의 세계에서 통하는 거침이 없기 때문에 남자 아이들의 표를 가져오는 것은 과제였다. 그래서 남자아이들의 관심도가 높은 캐릭터를 차용한 것도 있었다. 감사히 아이는 다시 한번 긍정적인 경험을 할 수 있었고 좋은 결과를 얻어왔다.


나는 이 과정을 함께 거치면서 아이에게 쇼맨쉽이라고 부를 만한 무대체질이 있다는 것을 다시 한번 눈치챌 수 있었다. 당장 회장이 되는 것이 아이돌이 되는 것과 큰 상관관계가 있는 것은 아니지만 내가 생각하는 내 아이 아이돌 만들기 프로젝트의 정점은 차곡차곡 쌓아 올린 자신감을 바탕으로 스스로의 기회에 도전하는 것이었다.


2년 연속 회장에 뽑히고 나자, 다른 큰 그림이 그려졌다. 바로 5학년 때는 스케일을 키워서 전교 부회장에 출마하겠다는 계획을 세웠다. 나와 아이는 6개월 전부터 공약, 슬로건, 소견문 등의 아이디어 회의를 시작했다. 그러다가 아이가 교실에서 보면 전교 임원 선거 소견발표 방송을 아무도 안 듣는다는 이야기를 했다. 많은 후보들이 다 비슷비슷하게 발표를 하기 때문에 이목을 끄는 사람이 거의 없고 대부분 1번이 당선되는 엔딩이 된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생각해 낸 것이 공약 전체를 노래로 해보자는 것이었다. 많은 학생들이 인트로에 살짝 유명한 가요를 불러서 흥미를 불러일으키고 지루한 소견문을 읽는다고 하니 잠깐 주제와 상관없는 가요를 부르는 것은 전략이 될 수 없었다.


그렇게 나온 소견문은 아래와 같다.


[소견문 3 Draft]


손이 가요 손이 가, 홍길동에 손이 가요
선배 손, 동생 손 자꾸만 손이 가
학폭 없는 00초, 행복 가득 00초

함께 만들어 가요

1번 홍길동


물론 이 건 세상에 없던 새로운 발견은 아니였다. 새우깡 CM송이 선거에 쓰인 역사는 꽤 오래되었기 때문이다. 좀 오래되긴 했지만 나이를 불문하고 보편성을 가지기 쉬운 노래를 찾기가 쉽지 않았다. 그 당시 굉장히 핫했던 마라탕후루 등은 너무 센 원곡 가사 때문에 개사를 해도 가사가 잘 들리지 않았다. 그래서 결국 새우깡 노래를 하기로 했는데 공약을 세부적으로 디테일하게 담을 수 없는 것이 약점이긴 했다. 그렇지만 내 결론은 선거는 공약싸움 아니라 이미지 싸움이라는 생각이었다. 한 가지 문제가 더 있었는데 소견 발표 시간은 1분이 주어지는데 저 노래는 20초 내외로 끝났다. 나머지 절반의 시간을 그냥 날릴 수는 없었다.


그 당시 아이와 함께 즐겨 보던 TV 프로그램 중에 '더 매직 스타'라는 프로그램이 있었는데 그 때 본 한 마술이 너무 내 마음을 두드렸다. 바로 시간을 되돌리는 마술이었다. 마술사가 "제가 셋을 세면 모든 것이 2분 전으로 돌아갑니다." 이런 식의 멘트를 하고 손가락을 튕기니까 정말 모든 것이 처음처럼 돌아가 있었다. 나는 이 마법 뒤에 숨겨진 기술보다 이 멘트가 주는 흡입력에 놀랐다. 그리고 머리에 번개가 쳤다. 바로 이거다! 내가 써 놓은 소견문의 짧음과 디테일의 부족을 커버해 줄 구성요소가. 그렇게 나는 이 멘트를 기용하기로 했다.


[소견문 3 Final]


손이 가요 손이 가, 홍길동에 손이 가요
선배 손, 동생 손 자꾸만 손이 가
학폭 없는 00초, 행복 가득 00초

함께 만들어 가요

1번 홍길동


"여러분! 제 손가락을 보십시오. 제가 셋을 세면 모든 것이 20초 전으로 돌아갑니다. 셋, 둘, 하나! (손가락 튕기기)"


손이 가요 손이 가, 홍길동에 손이 가요
선배 손, 동생 손 자꾸만 손이 가
학폭 없는 00초, 행복 가득 00초

함께 만들어 가요

1번 홍길동


그렇다. 중간에 마법 퍼포먼스를 넣어서 반전을 준 다음 내가 하고 싶은 메시지를 반복으로 준 것이다. 20초짜리 노래를 한 번 들으면 쉽게 잊겠지만 두 번 들으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그리고 그 때 투어스의 '첫 만남은 너무 어려워'가 유행했기 때문에 그 부분은 연상 시키기 위해 일부러 '하나, 둘, 셋' 이 아닌 '셋, 둘, 하나'를 쓰는 쪽을 선택했다. 이렇게 우리는 이 모든 퍼포면스가 55초 안으로 들어오도록 수도 없이 연습을 했다. 실제 전교 임원 선거 소견 발표는 방송실에서 방송으로 진행하는데 아이의 말에 따르면 카메라 뒤에서 이 발표를 지켜보던 선생님들께서 마술사 멘트가 끝나고 노래가 다시 시작되는 부분에서 모두 빵 터지셨다고 한다.


이렇게 만반의 준비를 하고 5학년 1학기가 찾아왔다. 기호를 뽑으러 다녀온 아이는 자신이 1번이라고 했다. 그래서 절대적으로 유리한 숫자가 돼서 감사하다고 생각했는데 반전이 있었다. 자신 말고 아무도 도전자가 없었다는 것이다. 그렇게 아이는 전교부회장이 되어 버렸다. 이런 사실 앞에 굳이 눈에 띄는 퍼포먼스를 할 필요가 있을까 고민했지만 두 가지를 고려해서 저 소견문 발표를 강행했다. 첫 번째로는 인지도를 높여서 다음 선거를 대비하자는 것과 둘째로는 많은 사람들 앞에선 노래를 불러본다는 경험을 갖고 깡을 키우는 것 말이다. 그런 게 아이돌모먼트이고 자아를 일깨워 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그렇게 전교 부회장이 된 아이는 00초의 연예인이 되어버렸다. 길에서 마주치는 많은 학생들이 "부회장 형이다. 새우깡 오빠다." 라며 알아보기 시작했다. 물론 그중에는 일부러 시비를 거는 친구들도 있었다고 한다. 그래서 아이는 아이돌 되기 프로젝트에 필요한 한 가지 예방주사를 먼저 맞게 되었다. 바로 공인이 된다는 것에 대한 피로감에 대해서 말이다. 노래하는 것을 좋아해서 가수가 된다면 좋아하는 것을 실 컷 할 수 있는 행복이 있겠지만 공인으로 살아가야 되는 스트레스도 항상 따를 것이다. 사실 어떤 직업을 선택해도 내가 좋아하는 면이 있고 싫어하는 면이 있을 테지만 아이돌을 직업으로 고려한다면 '공인으로서의 시선'에서는 자유로워질 수 없을 것이다.


아이는 00초 공인의 삶에 때때로 부담을 느끼기도 하는 것 같았다. 특히 모두에게 칭찬받고 모두에게 사랑받을 수 없다는 것에 대해서 말이다. 그때 나는 아이에게 누군가 너를 좋아할 수도 있고 이유 없이 싫어할 수도 있으며, 인기가 정말 많고 호감형인 연예인들 마저도 항상 악플러가 있다고 말해주었다. 그렇게 공인에 삶의 높은 피로도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능가하는 즐거움이 있다면 또 그렇게 살아갈 수 있지 않겠는가? 아이는 특정 가수를 보면서 그런 생각을 어렴풋이 하기 시작 하는 것 같았다. 그 주인공은 바로 25년 기준 데뷔 10년차 그룹 세븐틴이었다. 과연 세븐틴의 어떤 모습을 보고 아이는 그렇게 느끼게 되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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