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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튼 원피스

말하자면 민소매 원피스

by 무늬

“타투 도안은 가져오셨나요?”

“아뇨... 도안은 못 정했는데... 하고 싶은 위치는 있어요. 제가 민소매 원피스를 좋아해서 원피스를 입었을 때 잘 어울렸으면 좋겠어요.”

한겨울, 따뜻한 분위기의 타투샵에서 민소매만 입은 나는 왼손가락으로 반대편 어깨의 가장 끝 부분을 가리키며 말했다.

“주로 어떤 걸 좋아하세요? 좋아하는 이미지 같은 것 있으세요?”

“바람에 나부끼는 나무를 보고 있는 것을 좋아해요, 꽃도 좋아하고요, 오후 늦은 햇살도 좋아해요.”

긴 생머리의 시원한 인상을 한 타투이스트는 내 뒤에 있는 화분을 멍하니 바라보다 무언가 떠오른 듯 아이패드에 도안을 그리기 시작했다.


“이런 건 어때요?”

나비 문양을 보여주며 그가 물었다.

“괜찮은 것 같은데 마음이 확 끌리진 않아요.”

“이건요?”

타투이스트가 도안을 지우고 새로 그리기 시작했다. 나뭇가지에 돋아난 나뭇잎이 바람에 흩날리는 형상이 펜 끝에서 돋아났다. 데칼코마니처럼 상하로 대칭된 도안은 나뭇잎 같으면서도 꽃 두 송이처럼 보이기도 했다.

“멋있긴 한데 잘은 모르겠어요.”

“타투는 눈으로만 볼 때와 직접 대봤을 때 느낌이 달라요. 방향을 조금만 바꿔도 분위기가 확 달라지거든요. 한번 대보실래요?”

타투이스트는 프린트한 도안을 내 어깨에 살짝 붙였다. 낯설게만 느껴졌던 도안이 피부에 닿자 마치 오래전부터 그 자리에 있었던 것처럼 자연스러웠다.

타투를 새기고 집에 오자마자 초록색 민소매 원피스를 꺼냈다. 몇 해 전 여름, 인사동 작은 옷가게에서 발견한 바로 그 원피스. 나뭇잎으로 온통 둘러싸인 초록색 원피스. 옷을 갈아입자, 타투를 새긴 어깨가 열감으로 화끈거렸다. 전신 거울 앞에 서서 원피스를 입은 내 모습을 이리저리 살폈다. 맨 어깨에 돋아난 새싹을 보니 나는 꼭 내가 된 것만 같았다. 내가 나로 온통 가득 찬 기분이었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옷을 입고 그 원피스에 어울리는 타투까지 새기니 행복의 중심에 서 있는 듯했다. 이런 순간을 더 자주, 더 오래 지속하고 싶었다.


그리하여 내 행복은 여름에 집중되어 있다. 민소매 원피스를 입는 것이 나의 가장 큰 행복 중 하나이기 때문이다. 그날 초록 원피스를 산 이후 비슷한 스타일의 원피스들이 내 옷장에 하나둘씩 늘어났다. 얇은 끈으로 어깨를 가볍게 감싼, 발목까지 내려오는 통 넓은 원피스. 무릎 아래로 더운 바람이 훅 스며든다. 원피스 자락 사이로 드나드는 바람과 함께 걷는다. 팔과 어깨, 쇄골에 뜨거운 햇볕이 무방비하게 쏟아진다. 온몸으로 여름을 느낀다. 다른 계절엔 누구보다 온몸을 꽁꽁 싸매지만, 여름이 오면 나의 계절이 돌아왔다는 듯 맨살을 드러내고 거리를 활보한다.


20대 초중반의 나는 내 몸을 똑바로 마주하지 못했다. 신체 강박에 사로잡혀 있었기 때문이다. 여러 신체 부위 중에서도 유독 팔뚝에 자신감이 없었다. 친구들은 내 몸을 거리낌 없이 평가했고, 그들이 툭툭 내뱉은 말들이 나를 점점 작아지게 했다.

“너는 왜 이렇게 팔살만 많아? 여기만 빼면 꽤 괜찮을 것 같은데.”

인터넷에서 유행한다는 팔뚝살 운동을 수도 없이 했다. 효과는 미미했다. 결국 강도 높은 다이어트를 시작했고 내게 남은 건 푸석한 피부와 영양실조, 생리불순뿐이었다.

내가 맨살을 당당하게 드러낼 수 있게 된 것은 바로 그 초록 원피스 덕분이었다. 운명의 원피스를 손에 넣은 그날, 마음이 설레서 당장이라도 갈아입고 싶었다. 반팔티 위에 원피스를 걸쳤다. 팔뚝은 나에게 언제나 감춰야 할 부위였다. 늘 그랬듯이.


하지만 그날의 무더위는 참을 수 없을 만큼 지독했다. 반팔티 아래로 뜨겁고 끈적한 땀이 줄줄 흘러내렸다. 더는 버틸 수 없어 반팔티를 벗어던지자, 어깨와 팔뚝이 드러났다. 창피함과 더위가 뒤섞인 그 순간, 비로소 주변 사람들은 나를 그다지 신경 쓰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내가 그토록 두려웠던 시선은 사실 내 안에서 자라난 것이었음을. 인사동 골목을 걷는 내 발걸음이 차츰 가벼워졌다. 그 이후로 나는 형형색색의 민소매 원피스를 입었다. 바람에 흔들리는 나뭇잎처럼 살랑이며 여름을 자유롭게 만끽하기 시작했다.

또다시 한겨울. 냉장고 문을 열듯 숨을 크게 들이쉬고 비장한 각오로 집 밖을 나선다. 여름 태생인 나는 결국 추위 앞에 무릎 꿇은 채 오늘도 양 소매에 손을 껴 넣고 내시처럼 길을 걷는다. 목도리를 눈 아래까지 칭칭 감는다. 드러난 부위는 오직 눈과 이마뿐이다. 언제쯤 맨살을 드러낼 수 있는 계절이 찾아올까.


나와 반대로 모든 옷을 벗어버린 앙상한 나무를 바라본다. 그 끝에 작은 겨울눈이 돋아 있다. 그 속에는 봄이 오면 자라날 잎, 꽃, 가지가 고요히 숨 쉬고 있다. 나의 옷장 속 원피스들도 겨울눈처럼 따뜻한 날을 기다리며 잠들어 있다. 이제 나는 내 팔뚝도, 내 어깨도, 나의 일부로 사랑한다. 여름의 뜨거운 햇볕이 나를 감쌀 때 기꺼이 그 빛을 마주한다. 계절이 바뀌어도 여름의 나는 내 안에 오래도록 머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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