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본주의 시대에 낭만을 좇는 창작노동자들에게
언젠가 제목을 듣고 궁금했는데, 우연히! 도서관에서 누군가 반납함에 둔 걸 발견하고 설 명절에 읽게 된 책『GV 빌런 고태경』삼십 대의 독립영화감독 조혜나가 관객과의 대화(Guest Visit)에서 ‘빌런’ 고태경을 만난 뒤, 그가 주인공인 다큐멘터리를 만들면서 벌어지는 이야기다. 처음에는 그를 풍자하며 복수하려는 속내였지만, 촬영을 진행하며 점점 그가 영화를 바라보는 시선이 자신과 같다는 걸 발견하게 된다. 영화를 만드는 일이 업인지 취미인지 혼란스러운 초보 영화감독의 자격지심에 공감되어 빠져들어 멈출 수가 없었다. 그러다가 마음에 콕 박히는 문장을 발견한 6장부터는 앉은자리에서 완독 했다. 심지어 마지막에선 엉엉 울었다.
책을 읽으며 순간순간 자주 떠오른 책이 있었다. 백수로 쉬어가던 시절, 우연히! 제목에 끌려 읽었던『비생산적인 생산의 시간』 영화감독을 지망하는 지망생 15명을 인터뷰하고 창작노동자들에게 마치 비생산적으로 보이는 인풋의 시간이 왜 필요한지 말하는 책이다. 마침 목적 없이 마음 가는 대로 호기심을 따라 조선 역사를 공부하며 즐거워하던 때라 저자가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에 많이 공감되었다. 효율중심의 삶을 살아왔던 내가 변하는데 큰 공을 세우기도 했다.
이 책들은 영화감독이 되기 위한 과정을 거치는 사람들의 지난한 시간을 보여준다. 두 책이 왜 계속 겹쳐 보였는지, 뭐가 그리 좋았는지 생각을 정리해보고 싶었다. 수집한 문장으로 쓰는 독후감.
‘은행원들이 모이면 예술에 대해 이야기하고, 예술가들은 돈에 대해 이야기한다’는 오스카 와일드의 말은 우리에게도 적용됐다.『GV 빌런 고태경』
나는 <원찬스>로 동전 한 푼도 벌지 못했다. 영화는 꿈을 먹고사는 일이기에 노동으로 칠 수 없는 것인가? 영화는 타르코프스키의 말마따나 순교자의 길인가? 그럼 엄마는 또 이렇게 말하겠지. ‘그러게 월급 따박따박 나오는 방송국 들어가랬잖아.’『GV 빌런 고태경』
"아무런 보상이 주어지지 않는데, 세상의 인정조차 주어지지 않으면, 그것을 왜 계속해나가겠어? 보상심리로? 할 수 있는 게 그것밖에 없어서? 그런 삶을 응원할 수 있어, 너?"
나는 윤미의 그 질문이 고태경에게 내가 던지고 싶은 질문과 맞닿아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카르페 디엠이니, 욜로니. 그렇게 살고 싶어도 감독 지망생뿐만 아니라 입시생들이, 취준생들이, 모든 청춘들이 유예된 삶을 살고 있다. 그중에서도 영화는 더더욱 기약도 없이 기다리고 또 기다리며 살아야 하는 일이다. 『GV 빌런 고태경』
자기가 좋아한 것 때문에 아파하는 사람들이 주변에 너무 많았다. 우리가 추구하던 꿈과 기대하던 삶이 전부 무너진 다음은 어떻게 해야 하는 걸까.『GV 빌런 고태경』
절박하게 살아가는 애들인데도 계들은 돈 같은 게 아니라 꿈을 좇고 자기 삶 찾아, 행복 찾아서 가는 애들이니까, 만나면 내가 지금 전혀 행복하지 않은 게 들킬까 봐 두려웠던 것 같아요. 『비생산적인 생산의 시간』
나 역시 남들이 좋다는 길보다 내가 가고 싶은 길이 더 중요한 사람이다. 그리고 내 생각을 이야기로 창작하고 싶은 열망도 강하다. 하지만 내가 이런 사람이라는 걸 인정받고 받아들이기까지 너무 오래 의심하고 자격이 없다고 생각했다. 용기 내어 한 발 앞으로 나아갔다가도, 그렇게 살아서 괜찮겠냐는 압박에 멈춰 서고, 이러다 시기를 놓칠까 봐 조급해져서 뒤돌아 보며 고민했다. 좋아하는 일을 포기하지 못하면서, 스스로 확신을 갖지 못하고 흔들리는 그들에게 감정이입이 될 수밖에 없었다.
영화판을 험난하다고 표현하는 데는 다 이유가 있었다. 영화감독이 되기 위해 지망생은 10년이라는 시간을 준비한단다. 이론 공부도 하고, 소양도 쌓고, 현장에서 경험하며 실전 감각을 익히면서, 생계를 위해 아르바이트도 병행한다. 그 와중에 짬짬이 자신의 시나리오를 완성하는 거다. 일단 여기까지만도 쉽지 않아 보이는데, 고생은 이제 시작에 불과하다. 그토록 만들고 싶은 작품을 세상에 꺼내 놓는 '기회' 한 번을 만들기 위해 투자금을 구하고, 주어진 환경 내에서 가능한 방법을 찾아가며 하나씩 포기하고 타협하며 작품을 완성한다. 수많은 관계자들과 소통하고 매 순간순간 선택하면서.
그러나 첫 술에 성공하는 영화 같은 일은 현실에선 보기 드물다. 이렇게 힘들게 얻은 기회가 실패로 귀결될 때, 그 패배감과 좌절감은 감히 상상이 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모든 걸 감당하게 하는 원동력은 뭘까?
과정은 서둘러 탈출해야만 하는 고통스러운 시기로 그려지고, 그 과정을 겪는 사람들은 불완전한 존재로 인식된다. 과정에 있는 건 즐거운 일이어야 하는데, 우리 사회에서는 그게 참 힘들다. 『비생산적인 생산의 시간』
두 권의 책에 또 하나의 공통점이 있다면 "원동력은 OO이다."라는 각자의 답을 찾을 수 있게 과정을 보여준다는 것이다.
결과는 흘러가는 인생의 한 순간에 불과하다. 인과관계와 맥락이 잘린 스냅샷은 너무 많은 여지가 있고 그래서 곡해될 수 있다. 인스타그램 속 연출된 사진 한 장처럼. 나는 성공한 누군가를 영웅화하여 성공담을 보여주는 것보다 그 결과에 이르기까지 고뇌와 그 어려움을 이겨낸 과정의 이야기를 좋아한다. 반짝이는 순간을 만든 일등공신은 그 순간에 이르기까지의 시간들이다. 확신도 근거도 부족하지만 일단 첫 선택을 하고, 그 결과를 분석하면서 취향과 선호를 알아간다. 첫 깨달음은 근거가 되어 주고 다음 선택으로 나아가게 한다. 이런 반복에서 절대 포기할 수 없는 것과 무엇을 버려야 할지 깨닫고, 자기 삶의 우선순위를 찾을 수 있다. 살아간다는 건 결국 나만의 의미, 나를 움직이는 원동력, 나만의 방법을 찾아 영점조정을 해나가는 과정이다. 이는 시간을 통과해야만 알 수 있는 것들이다.
결국 영화를 만드는 것은 많은 선택지 앞에서 내가 좋아하는 게 뭔지 고백하는 것이었다. 『GV 빌런 고태경』
언제든 떠날 수 있지만 그러지 않을 수 있는 힘, 불안정한 상황에서도 흔들리지 않으려고 마음을 다잡는 힘은 열정이라기보다 의지에 가깝다.『비생산적인 생산의 시간』
재능이니 뭐니 하는 건 이십 대에나 하는 거 아냐? 그냥 하는 거지. 이 나이 되니까, 재능 있다던 사람들 그만두고 재능 없다고 생각했던 사람이 성공하는 것도 다 지켜봤어. 꾸준히 계속하는 의지야말로 진짜 재능이지.『GV 빌런 고태경』
이제는 실패가 나의 일부라는 것을 명확하게 안다. 인생이 원찬스가 아니고 내가 다 날려버리지 않았다는 것을 안다. 나는 하루하루 최선을 다할 뿐이다. 기회를 만들기 위해 시나리오와 연출 노트를 열심히 쓰면서. 기회가 왔을 때, “나는 준비가 아직 안 된 것 같아”라고 말하지 않기를 바라면서. 『GV 빌런 고태경』
'열정의 쓴맛'으로 전개되는 이야기는 후반부가 되면서 점점 '의지'로 무게중심이 이동한다. 좋아하는 일을 지속가능하게 만드는 건 결국 성실이고 노력이고 의지다. 과정에서 스스로가 만족하는 포인트를 찾아낼수록 의지는 자라고 선택에 점점 확신을 갖게 된다. 관객 수, 수익, 평점 등등 그 결과가 남들이 정해놓은 기준과 상관없이, 자신에게 중요한 기준과 내가 이 일을 계속해야 할 충분한 이유를 발견하게 되는 것.
나 열심히 하는 건 자신 있었거든. 그런데 내 마음처럼 되지 않는 게 이 일의 본질인 것 같아.『GV 빌런 고태경』
그렇게 사나, 이렇게 사나 다 불안한데 왜 하고 싶은 걸 안 하고 살아요? 『비생산적인 생산의 시간』
'변화 외에 영원한 것은 없다'는 고대 그리스 철학자 헤라클레이토스의 말처럼, 불확실성은 디폴트, 그로 인한 불안은 우리가 잘 데리고 살아야 할 반려감정인 세상을 우리는 살고 있다. 통제가 업인 영화감독 마저 내 마음대로 할 수 없다는 걸 받아들이는 것처럼, 피할 수 없다면 즐기는 법을 고민하는 게 현명한 자세 아닐까? 무력감을 끌어안고 고통스럽게 살 수는 없으니까.
외적 조건에 압도되지 않고 자기 행동을 스스로 조절할 수 있으며 내가 내 운명의 주인인 듯한 느낌이 들었던 순간. 기분이 마냥 고양되고 행복감을 맛본다. 이런 경험은 우리 뇌리에 오랫동안 남게 되고, 더 나아가 자신이 지향하고 싶은 삶의 이정표가 될 수 있다. - 미하이칙센트미하이, 『몰입』
나의 인생책 중 하나인『몰입』에서 저자는 목표 달성에 너무 집착해 현재에서 즐거움을 얻지 못하면 삶에 대해 만족을 느끼기가 어렵다고 말했다. 버겁지 않을 수준의 목표를 새우고 그를 달성하기 위해 노력하는 과정에서 몰입감을 느낄 수 있다는 것이다.
의무감으로 해치우려 하기보다 제약과 한계를 만나면 '또 한 단계 성장하겠구나' 하는 계기로 받아들이는 것.
원하는 일을 수행하는 과정에 내가 즐거움과 만족감을 맛볼 수 있는 포인트를 많이 심어두도록 설계하는 것. 이 과정에서 삶의 만족도가 높아진다는 걸 느꼈다.
창의적인 결과물이 나오기 위해서는 인풋에 들이는 시간이 반드시 필요하다. … 소재를 찾는 일은 ‘영화 소재를 찾아야 한다’는 목적의식으로 소재를 물색하는 과정이라기보다, 영화를 찍는 것을 전제로 일상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관찰하는 과정이다. 『비생산적인 생산의 시간』
지망생들은 머리를 비우고 그 자리를 오로지 시나리오에 대한 생각으로 채워 넣는다. 이 과정을 ‘머리를 비우기’, '아무것도 안 하기’, ‘멍하니 있기’와 같이 표현하고 있었다. 일종의 모드 변경 과정이다. 『비생산적인 생산의 시간』
이야기가 있고 주제가 있는데 이게 생각보다 별개예요. 내가 어떤 주제를 쓰고 싶어서 이야기를 풀기 시작했는데, 다 풀고 나면 내가 생각했던 주제가 아닐 때가 있어요. 이야기는 아는 만큼만 나오는데, 제가 이 주제를 생각했던 것보다 잘 알지 못한 거죠. 이야기와 주제 사이를 왔다 갔다 하는 시행착오를 계속 반복해요. 그러면서 저 스스로도 제가 말하고 싶었던 주제에 대해 배워 가요. ‘아, 내가 하고 싶었던 얘기가 이게 아니구나. 다른 이야기구나’ 하는 걸 알게 돼요. 『비생산적인 생산의 시간』
작년에도 생산과 효율이 최고라고 믿었던 나에게 라는 글로『비생산적인 생산의 시간』을 소개한 적이 있었다. 당장은 비효율적인 것처럼 보이고, 시간낭비인듯해도 그런 모호한 시간, 제대로 인정받지 못하는 듯 보이는 시간이 결국은 창작의 과정이라는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 아직 여전히 경험하고 배우는 중이지만, 그렇게 스스로 깨달아 가는 맛을 보니 진짜 그 힘이 얼마나 중요하고 큰 것인지 느껴진다. 영화감독뿐 아니라 창작을 하는 많은 이들이 당장의 효율과 비법, 노하우, 지름길에 목매지 않고 고민을 품고 되새김질하면서 자기만의 방법을 만들어 갔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