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3년생 이야기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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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릿고개는 지난해 가을에 수확한 식량이 모두 떨어지고, 보리가 아직 여물지 않은 4~6월 사이에 극심한 식량난을 겪던 시기를 의미한다.”
극심한 보릿고개를 겪었다. 21세기에는 상상도 못 할 일이었다. 곧이곧대로 식량난에 비유한 건 아니지만, 관련이 있었다. 경제 활동에 극심한 가뭄이 왔기 때문이다. 직장인은 일이 많으면 힘들지만, 반대로 프리랜서는 일이 없으면 힘들다. 더는 매달 꼬박꼬박 통장에 월급이 꽂히지 않기 때문이다. 일이 얼마나 들어오느냐가 곧 생계를 결정한다.
직장을 그만두고 두 달 동안 계속 일이 없었다. 작가의 길에 들어섰으니 궁극적인 경제 활동은 바로 ‘강연’이었다. 보통은 책을 내면 계약금을 받지만, 증쇄해야만 인세를 정산받을 수 있다. 우리나라는 1년에 약 6만 5천 권 책이 출간되는데, 그중 90% 이상은 2쇄를 찍지 못한다. 일반적으로는 평범한 작가라면 책만으로는 돈을 벌기가 쉽지 않다는 의미다.
내가 처음에 책을 출간할 때는 출판 시장이 차갑게 얼어붙지 않았다. 덕분에 운 좋게 《1등급 공부법》은 5쇄를 찍을 수 있었고, 다른 책들도 2쇄 이상을 해냈다. 하지만 내가 직장을 그만두는 시점에는 세상의 판도가 달라졌다. 나는 작가로서 책을 계속 써냈지만, 잘 안 팔렸다. 2쇄를 넘기는 책이 점점 사라졌다. 그전에는 인세도 나름 먹고사는 데 보탬이 되었지만, 이제는 아니었다.
설상가상으로 ‘강연’까지 의뢰가 들어오지 않으니 수입은 ‘zero’로 수렴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보험으로 사학연금을 한 번에 타버린 게 그나마 다행이었다. 아껴 쓰면 한 해는 버틸 수 있는 돈이었기 때문이다. 10년 동안 쌓아둔 퇴직금으로 보릿고개를 잘 견뎌야만 했다. 그나마 희망의 불씨가 있다면, 강연 성수기가 다가오고 있는 거였다.
주로 학교나 도서관에 강연을 나갔기에 학기가 끝나가는 6~7월이 되면 강연 의뢰가 쏟아져 왔기 때문이다. 다행히도 5월쯤 되자 슬슬 하나둘씩 강연 의뢰가 들어왔다. 숨통이 트이는 기분이 들었다. 준비한 곡식을 다 써버리면 어쩌나 전전긍긍하며 하루하루 보냈으니까. 40대 외벌이 가장의 어깨는 매일 짓눌렸다. 이제는 일이 많아서 걱정할 게 아니라 일이 없으면 걱정을 해야 하는 상황이 되었기에...
퇴사 후 첫해 보릿고개를 겪으며 많은 생각이 들었다. 전 직장에서 좀 더 버텨볼 걸 그랬나 싶기도 했다. 날은 점점 따뜻해졌지만, 마음은 시베리아 겨울만큼 추웠다. 구속받지 않는 신분이 되었지만, 극심한 빈곤은 그 자유를 누리지 못하게 했다. 무엇이든 닥치는 대로 일을 찾았다. 다시는 하지 않겠다던 ‘시험 영어’ 관련 일에도 손을 댈 수밖에 없었다. 현실과 이상의 괴리는 너무 컸다.
조선 시대 선비들이 책이나 읽고, 글이나 쓰면서 굶어 죽어가는 이야기가 나의 현실이 되었다. 이렇게 된 이상, 체면 따위 필요 없다. 땅을 파서라도 가족을 먹여 살려야만 했다. 다행히 내가 20년 넘게 쌓아온 전문성을 활용할 수 있었다. 다만, 책 읽고, 사색하고, 글 쓰고, 책 출간하고, 강연만 하면 살아가는 건 허망한 ‘이상’ 일뿐이었다. 갑자기 누군가의 말이 떠올랐다.
“내가 좋아하는 일 10%를 하기 위해서는 싫더라도 90% 해야 할 일을 해야만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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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장은 그만두면 신분은 둘로 나뉜다. 일을 쉬고 있으면, 백수 또는 취업준비생이 된다. 간간히 일을 하고 있으면, 프리랜서라 부른다. 나는 일을 쉬고 있는 게 아니니 프리랜서가 되었다. 4대 보험이 없는 신분이기도 하다. 물론 건강보험료는 내야만 한다. 가족 중에 나를 책임질 사람이 없다면 말이다. 월급에 따라 부여하는 직장 의료보험이 아닌 내 재산 수준에 따른 지역 의료보험으로 자격도 바뀐다.
연금의 경우엔 국민연금을 자발적으로 납부할 수 있다. 하나 굳이 낼 이유는 없었다. 한 푼이라도 아쉬운 시기에 필수가 아니면 꼭 할 필요는 없었으니까. 세금도 3.3%만 떼고 받았다. 프리랜서는 1인 사업자와 단기 아르바이트 등과 같이 고용 관계없이 독립적으로 일할 때 적용받는 세율 3.3%가 똑같이 적용되기 때문이다. 뭔가 더 풍족해진 느낌이었다. 1년 후 세금 신고할 때 진실과 마주하기 전까지는 그랬다.
행여나 연금을 부어야 하는 상황이라면 또 상황이 달라진다. 연금을 온전히 나 혼자 다 부담해야 한다. 보통 직장에서는 내가 연금의 절반을 내고, 절반은 회사가 책임진다. 그래서 매달 수십만 원을 추가로 더 버는 격이다. 게다가 세금도 15.6%를 떼거나 기타 소득은 8.8%를 떼기에 연말정산을 하거나 다음 해에 최종 정산할 때 타격을 크게 받지 않는다. 조삼모사라고 할지라도 갑자기 큰돈을 마련해서 세금으로 낼 필요는 없으니까.
프리랜서의 특징은 어딘가 속하지 않는 자유로운 영혼이었다. 내 마음대로 일을 조절할 수도 있다. 자유가 보장된다. 쉽게 말해, 일하는 만큼 벌 수 있다. 혹시라도 일이 많아서 힘들면, 언제든 일을 조절할 수 있다. 하지만 한 가지 불가항력이 있다. 치명적인 단점이기도 하다. 일이 없으면, 굶어 죽는다. 성수기일 때 잘 저장해두지 않으면, 비성수기일 때 극심한 보릿고개를 겪는다.
안타깝게도 이 사실을 전혀 모른 채 퇴사했다. 주변에 꼭 같은 사례가 없으니 누가 알려줄 수도 없는 노릇. 황무지를 개척하듯, 맨땅에 헤딩하듯, 홀로 구르고 피 터지며 하나씩 배워나가야 했다. 한 가지 깨달은 게 있다. 내가 만일 퇴사를 꿈꾼다면, 현실적으로 따져 봐야만 한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내가 지금 직장에서 버는 돈만큼 외부 활동으로 벌고 있다고 가정해 보자. 과연 이 상황에서 퇴사하는 게 괜찮을까? 내 씀씀이로 충분히 버티거나 먹고사는 데 지장이 없다면, 괜찮은 선택일 수 있다. 하지만 내가 ‘1’로만 살아가는 게 충분치 않아서 추가로 ‘1’를 만들어냈다면 다르다. 전체로는 ‘2’니까 수입이 뚝 반으로 줄어드는 것이다.
만일 내가 직장에서 버는 것보다 2배를 추가로 벌 때는 어떨까? 이건 괜찮을 수 있다. 전체가 ‘3’이었다가 ‘2’가 되니까. 물론 개인 상황마다 다르겠지만, ‘2’로 살아갈 수 있는 상황이라면 말이다. 내가 퇴사를 결정하는 시점에 나는 이 단순한 계산을 놓쳤다. 직장에서 버는 만큼만 더 벌고 있었기에 ‘2’에서 ‘1’로 순식간에 추락하는 경험을 한 것이다.
게다가 프리랜서는 직장인처럼 매달 돈을 받지 않는다. 일하고 나서 정산이 되는 날도 모두 다르다. 모든 게 불규칙적이다. 정해진 게 없다. 쉽게 말해, 불안정하다. 프리랜서의 삶을 살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면, 이 불안정성을 과연 견뎌낼 수 있는가를 스스로 문답해봐야만 할 것이다. 나는 놓친 부분지만, 이 문답만으로도 결정적인 도움이 될 것이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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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기 내어 퇴사를 결정하고 실행한 나를 보면, ‘무식이 용감이다.’라는 말이 떠오른다. 더 좋아하는 일이 생겼고, 그걸로 경제 활동을 할 수 있는 상황이 된 것 말고는 완벽히 준비되지 않았기에... 사실 완벽히 준비하려 들었으면, 퇴사는 물거품이었을지도 모른다. 다들 마음은 있지만, 완벽히 준비하는 건 쉽지 않은 일이라 그렇다.
혹은 완벽하게 준비되었을 땐, 이미 늦은 시기일지도 모른다. 차라리 원래 내가 속한 직장에서 최선을 다해 더 올라가는 게 나을지도... 나는 시스템의 노예가 되지 않기 위해, 누군가의 울타리에 나를 가두지 않으려고 안전지대를 벗어났다. 자유와 평화를 찾아서 선택한 일이었다. 하지만 안전지대를 벗어났다는 사실은 금방 현실로 다가왔다. 세상이 나를 가두지 않지만, 스스로 나의 틀을 만들지 않으면 불안정성과 통제 불능의 위험이 도사리고 있었다.
첫 번째 《83년생 이야기》에서 통제에서 벗어나 나의 세상에서 살자고 외쳤다. 호기로운 외침은 불과 몇 달 만에 무너졌다. 막상 나와 보니 울타리 밖 세상은 만만치 않았다. 천적이 가득한 정글에서, 물 한 방울 없는 사막에서, 개척되지 않은 황무지에서 홀로 살아남아야만 했다. 비록 덩치 큰 시스템과의 싸움은 아니었지만, 벼랑 끝에 선 자신과의 싸움에서 이겨내야 했다. 옆에서 도와줄 동료도 없었고, 최종 책임을 지는 관리자도 없었다. 내가 곧 대표이자 책임자였다. 권리를 더 얻은 만큼 책임은 더 커질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소속이 없는 나로서는 거대한 집단의 시스템에 또 당할 수밖에 없었다. 정글에서 포식자가 더 위에 있는 것과 같은 원리였다. 아무리 내가 잘났다고 말해도, 규정이라는 시스템에 밀렸다. 그들이 정해 놓은 규정을 맞춰 근거를 제시하는 게 어려웠다. 나의 마지막 직장에서의 직책이 꼬리표처럼 따라붙었기 때문이다. 오히려 다행이었다. 소속도 없이 홀로 시작한 프리랜서는 더 처참히 짓밟혔고, 혹독한 대우를 받았다.
내가 속한 세상에 사는 한 그 시스템의 규정에 맞춰야만 했다. 그렇게 벗어나려 발버둥 쳤지만, 결국 제자리로 돌아왔다. 오히려 신분이 명확하지 않으니 불리한 점이 생겼다. 대표적으로 은행에서 대출받는 일이었다. 안정적인 직장인 신분일 때는 ‘신용’이 분명했다. 하지만 프리랜서가 되자마자 대출은 신속히 막혔다. 손가락 몇 번만 튕기면 바로 몇천만 원을 빌릴 수 있던 그 힘이 사라졌다.
사업을 하는 지인이 한 말이 생각났다. 매출은 수 억이지만, 인건비와 재료비 등 모두 비용 처리하고 나면 순수익은 얼마 안 된다고 했다. 그런 이유로 대출도 쉽지 않다고 했다. 이 말을 들을 때는 이해가 되지 않았다. 매출이 ‘억’ 대인데 왜 대출이 안 될까? 세금을 안정적으로 많이 내는 만큼 돈을 갚을 능력이 있다는 걸 증명하는 게 아닐까 생각했다. 개인적인 추측이지만, 내 생각이 맞을 것 같다.
직장인이 아닌 프리랜서의 삶은 너무나도 달랐다. 내가 모르는 세상의 일이 많았다. 직장에 처음 들어갔던 초년생이 된 기분이었다. 업무를 처리할 때도, 세금을 파악할 때도 전부 새로웠다. 안정적인 걸 추구하면서도 새로운 도전을 좋아하는 성향이기에 프리랜서의 삶을 다행히도 살아내고 있다.
내가 안정적인 직장을 그만둔 걸 알게 된 사람들은 다들 묻는다. 혹시 후회는 하지 않느냐고. 퇴사를 결정할 때 부족한 점이 많아서 종종 힘든 시간을 보내곤 하지만, 후회하지 않는다. 그때는 ‘좋으냐 싫으냐’의 문제가 아니라 ‘죽느냐 사느냐’의 문제였기에 그렇다. 삶과 죽음의 기로에 선 극한 상황이 아니었다면, 오히려 장점이 많은 시스템을 잘 활용하며 살아가지 않았을까 싶다. 하지만, 퇴사할 때는 시스템을 잘 활용할 수 있는 상황도 아니었다. 그땐 그랬다.
누군가 힘들어서 퇴사하고 싶다고 내게 조언을 구하면 이렇게 말한다.
“버틸 수 있으면, 최대한 버티세요. 그게 더 나아요.”
직장에서는 버티고 버티면 어떻게든 힘든 게 지나가지만, 괜히 준비 없이 세상에 나왔다가는 바로 죽을 수 있어서다. 아파서 죽는 건 아니고, 굶어서 죽는다. 그러니 안에서 죽을 상황이 아니라면, 끝까지 버티기를 바란다. 아무리 더럽고, 치사해도 오히려 그게 유일한 살길이다. 경험자의 조언이니 진지하게 참고하여 고민해 보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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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한 친구 하나가 나보다 먼저 퇴사했다. 2년 가까이 쉬면서 퇴직금으로 살아갔다. 결국 돈이 떨어지자 다시 취업했다. 오랜만에 대화를 나눴다. 업무는 지난 직장이 더 수월했다고 한다. 새로 들어간 직장은 시스템이 뒤죽박죽이라 할 일이 더 많다고. 그런데도 지난 직장을 그만둔 것을 후회하지 않는다고 한다. 계속 참고 버텼으면, 아마 숨 막혀 죽었을 거라고... 지금 아무리 힘들어도 훨씬 낫다고 1초도 고민하지 않고 단호하게 말한다.
누군가 내게 같은 질문을 한다면, 내 친구와 같은 대답을 할 것이다. 후회는 없다. 아니면 후회할 겨를이 없다고 하는 게 맞을까? 과거는 과거일 뿐, 지금을 살아내기 바쁠 뿐이다. 후회를 생각하는 것마저 사치일 뿐이다. 일이 없으면, 일을 찾으면 된다. 세상에 할 일은 많다. 가족을 위해서라면 무엇이라도 할 수 있으니까.
보릿고개를 지독하게 보낸 나는 현실과 타협하기로 했다. 경제 활동은 내가 잘할 수 있는 일을 활용하기로, 자아실현은 일단 가족을 먹여 살린 후에 하기로 말이다. 퇴사한 이유와는 상충되지만, 배를 곯아 보니 깨달았다. 다시 직장인이 되기로 했다. 누군가의 밑에서 일을 하기로 했다. 마음을 모두 내려놓기로 했다. 운명에 모든 걸 맡기기로 했다.
힘든 시기가 오는 건 더 좋은 기회를 얻기 위해 겪어야만 과정이라고 했다. 퇴사하기 전부터 퇴사하고 나서 까지 고통은 계속 지속되었지만, 비 온 후에 땅은 굳었다. 운 좋게도 내 전문성을 살릴 수 있는 일과 관련된 기업을 찾았다. 인생은 사람으로 인해 힘들기도 하지만, 사람 덕분에 삶이 좋은 방향으로 흘러가기도 한다.
새로 들어갈 기업에서 거인을 만났다. 시스템도 비교적 자유로웠다. 심지어 내가 시스템을 만들어갈 수도 있었다. 지난 나의 경험과 이력이 도움이 되었다. 다만 밤낮없이 일해야 하고, 평일 주말 구분 없이 일해야 했다. 프리랜서로서 일이 없는 것보다는 오히려 할 일이 많은 게 좋았다. 그리고 내가 일한 만큼 대가를 얻을 수 있는 게 가장 좋은 점이었다.
생각해 보니 벼랑 끝에서 살기 위해 그만둔 지난 직장이었지만, 일반적인 직장보다 2~3배는 힘들었던 업무 강도를 경험하고 견뎌냈기에 지금의 일이 가능했다. 지난 경험이 언젠가 다 쓸 데가 있다는 말을 다시 한번 믿게 됐다. 학창 시절 방황하며 글 썼던 경험이 지금 작가의 길을 가는 데 도움이 되고, 군대에서 밤새며 했던 행정업무는 직장에서 일할 때 도움 됐다.
끝으로 지난 직장에서의 힘든 경험들이 모여 지금의 일을 하는 데 큰 영향을 주고 있다. 어쩌면 지금 내가 하는 모든 일은 다음 단계로 나아가기 위한 인고의 시간일지도 모른다. 아무리 지금 당장 쓸모없는 일이라 할지라도 언젠가 쓰이게 될지 모를 일이다. 그래서 나에게 주어지는 모든 상황을 긍정적으로 생각하기로 했다.
‘일이 많으면, 나중에 쓸 돈을 저축할 수 있으니 좋다. 일이 없으면, 체력을 비축해서 주야장천 쉬지 못하고 일할 날을 대비할 수 있으니 좋다.’
…
새로운 직장에서 근무한 지 6개월이 지났다. 온라인 기반 사업이라 사무실에 출근은 하지 않았다. 출퇴근 시간을 아껴서 쉼 없이 일했다. 소수 정예로 운영되는 우리 기업은 아이디어가 생기면 바로 실행에 옮겼다. 매달 새로운 걸 기획하고 실행한 덕분에 매달 성장했다. 경제적으로도 많이 안정되었다. 경제적으로 점차 안정되니 삶에 대한 고민이 슬금슬금 생겨났다. 현실과 이상 사이에서의 고민이 생긴 것이다.
내가 원래 퇴사한 이유는 글을 쓰기 위해서인데, 너무 바쁘니까 자아실현을 할 수 없었다. 새로운 시스템을 적용하느라 며칠을 밤새며 일했더니 몸에 이상 신호가 왔다. 전 직장에서 겪었던 그 느낌. 심장이 조여왔다. 다음 날은 왠지 눈을 뜨지 못할 것만 같았다. 심장이 멈춰버리면 어쩌나 걱정되었다. 과로는 심장마비를 부르니까.
무사히 그 일을 넘기고서 생각했다. 나는 일에 집중하면 과로하는 스타일이구나 싶었다. 대책이 필요했다. 과오를 두 번이나 범하고 싶지 않았다. 벼랑 끝에 서본 경험이 있기에 더 간절했다. 이번에는 잘 해낼 거라고. 미래는 아무도 알 수 없지만, 현재는 내가 통제할 수 있으니까. 결과는 알 수 없지만, 과정에선 최선을 다할 수 있으니까.
경주마처럼 앞만 보고 폭주하는 삶이 아닌, 잠시 쉬어갈 수 있는 삶을 만들어보기로 했다. 아무리 바빠도 틈을 내어 ‘쉼표’를 찍을 수 있는 순간을 만들어보기로 했다. 무리해서 쓰러지는 것보다는 조금 천천히 가더라도 쉬면서 가면 끝까지 갈 수 있다고 믿기에... 현실과 이상 속에서 갈팡질팡하는 내 마음을 확실하게 알지는 못해도 이것만은 꼭 지키리라 결심했다. 이번엔 꼭 그렇게 하리라 다짐했다.
(엔딩곡)
“하지만 내 맘이 이미 변해 버린 건. 나도 잘 몰라. 내가 왜 이러는지 몰라. 알 수가 없어.”
*몰라
- 1999년 6월에 발매된 엄정화의 5집 앨범 <005.1999.06>의 1번 트랙에 위치한 타이틀 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