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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화. 케렌시아

83년생 이야기 2

by 신영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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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케렌시아(Querencia)는 스페인어로 피난처 혹은 안식처라는 뜻이다. 원래는 마지막 일전을 앞둔 투우장의 소가 잠시 쉴 수 있도록 마련해 높은 곳이었다. 지금은 일상에 지친 사람들이 몸과 마음을 쉴 수 있는 재충전의 공간이란 뜻으로 쓰인다.”


투우장에서 소가 지칠 때로 지쳤을 때 잠시 케렌시아에 다녀오면 다시 힘을 내어 경기를 마칠 수 있다고 한다. 일에 지쳐 쓰러지지 않기 위해서는 우리도 가끔은 나만의 케렌시아를 찾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특히 재택근무 프리랜서인 나는 일과 쉼이 쉽게 구분되지 않아 케렌시아의 필요성을 더욱 느꼈다. 거기에 어린 자녀 육아까지 더해지면 몸과 마음은 금방 지쳐버렸기 때문이다.


몇 번의 번 아웃 위기를 넘기면서 케렌시아의 소중함을 느꼈다. 한두 달에 한 번씩은 숨을 쉬러 나가야 했다. 내가 선택한 곳은 바다가 있는 곳이었다. 산보다는 바다가 더 좋았다. 산은 뒷동산에만 올라가도 볼 수 있었으니까. 물론 바다에 가지 못할 땐 정상에 올라 도시를 내려다보는 게 좋았다. 땀을 한 바가지 흘리고 내려오면 체력도 좋아지고 머리도 맑아지는 느낌이 들었다. 하지만 진정한 케렌시아는 아니었다. 생존을 위한 미봉책에 불과했다.


진정한 쉼은 세상의 그 무엇으로부터 온전히 해방되는 순간이다. 사람도 일도 아무것도 나에게 영향을 주지 않는 상태를 말한다. 물론 종일 일을 해야 하는 나에게는 불가능한 설정이다. 그래도 잠시 10분 만이라도 아무런 방해 없이 자연과 연결되는 순간을 희망한다. 눈앞 탁 트인 바다를 바라보며 숨통이 확 트인 느낌이 든다. 그 찰나에 가슴이 벅차오른다. 잠시나마 현실 속의 나를 잊는 순간이기 때문이다. 이 순간만큼은 아무런 생각을 하지 않는다.


3시간 가까이 운전해서 고작 10분을 즐기러 가느냐 말할 수 있느냐만... 직접 이걸 해보지 않는 이상 내 감정을 100% 이해할 수는 없을 것이다. 3시간 공백에 수백 개의 카톡 메시지가 쌓여 있겠지만, 충전된 마음으로 밀린 일을 기꺼이 쳐낼 수 있다. 몇 시간이 문제가 아니라 고작 10분이라는 시간이라도 나는 한두 달은 또 힘내서 일할 수 있다. 투우장에서 피범벅이 된 소가 잠시 숨을 고르고 결전을 펼치는 것과 같은 원리다. 그래서 동해는 내게 케렌시아다.



20대에는 사실 강릉 안목 바다를 좋아했다. 그땐 사람들이 안목 바다를 잘 모를 때였다. 지금처럼 번화하지 않았다. 갑자기 안목 커피 거리라는 명칭이 생기면서 사람들이 많이 몰리게 되었다. 그땐 커피숍이라고는 <바다 위에 쓰는 편지>라는 개인 운영하는 곳밖에는 없었다. 오히려 사람들은 안목 바다에 비치된 자판기 커피를 즐겼다. 하지만 금방 인기몰이에 분위기를 타서 이곳저곳 개발되기 시작했다. 지금은 발 디딜 틈이 없을 만큼 안목 바다는 번화했다.


더 많은 사람에게는 좋은 일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나에게는 안타까운 결과다. 개인적으로 조용히 혼자 나만의 아지트처럼 쉴 수 있는 장소를 잃게 되었으니까. 더는 안목 바다는 케렌시아가 될 수 없었다. 온전히 나만이 누릴 수 있는 그런 장소가 더는 아니니까. 다른 장소를 찾아야만 했다. 그나마 덜 붐비는 바다 쪽으로 고개를 돌려 보았으나 ‘연곡’이든 ‘사천’이든 예전만큼 힐링이 되는 후보지는 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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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동안 나만의 케렌시아를 찾기 위해 방황했다. 강릉에 부모님이 계셔서 자주 강릉을 찾았다. 부모님은 치매에 걸려 기억력이 짧아진 할머니를 근처에서 모셨다. 우리 부모님의 마지막 숙제였다. 어딘가 자유롭게 떠나지 못하고, 항상 주변에 맴돌며 할머니를 돌봐야 했으니까. 매일 다르게 기억을 잃어가는 할머니는 하루에 20~30통씩 전화를 했다. 나와 잠깐 만나서 식사하는 동안에도 부모님 전화기는 번갈아 가며 쉴 새 없이 ‘징-’ 진동을 울렸다. 밥이 코로 넘어가는 건지 입으로 들어가는 건지 알 수 없을 정도였다.


1년에 한 번 이상은 그래도 꼭 할머니를 찾아뵈었다. 하지만 할머니의 기억은 점점 과거로 돌아갔다. 증손주가 둘이나 되는데, 애인이 있냐고 물으셨던 할머니는 이제는 나보고 학교는 잘 다니냐고 물으신다. 아주 어릴 때 같이 살다가 서울에 가더니 정말 강릉에 내려왔다고 반가워 눈물이 난다고 하신다. 그리고 지금의 내 상황을 몇 번이고 설명해도 10초 후면 똑같은 질문이 거짓말을 보태지 않고 수십 번은 반복된다.


분명히 대화는 되고 있지만, 톰 크루즈 주연 영화 《엣지 오브 투모로우》가 생각난다. 내가 어떻게 대답하느냐에 따라 조금씩 할머니의 반응은 달라진다. 하지만 다시 원점으로 돌아간다. 도돌이표를 경험한다. 10번까지는 그래도 어떻게든 친절하게 답변한다. 10번이 넘어가니 나도 슬슬 지쳐간다. 할머니께 진심으로 죄송하지만, 또다시 잠시만 안녕할 때가 되었다. 5분 후에는 내가 다녀간 것도 잊으실 테니 괜찮다고 스스로 위안 삼는다.


자리에서 일어나 할머니를 꼭 안아드린다. 그리고 다음에 또 오겠다고 말한다. 하지만 할머니 눈시울이 붉어지며 울먹이듯 말씀하신다. 자문자답하시며 희망 사항을 내던지신다.



“다음에 또 오면 언제 온다고? 내일 또 온다고?”

“네. 내일 또 올게요.”


정해진 답이기에 나는 거침없이 대답한다. 그렇지 않으면, 할머니는 손을 붙잡고 놓아주시지 않으니까. 반복 학습을 통해 정답을 안다. 거동이 불편해 1층까지 따라 나오시지는 못하고, 현관에서 작별한다. 그리고 차를 타기 전에 베란다 쪽에 고개를 돌리면 할머니가 창문을 열고 손을 흔들고 계신다. 나도 웃으며 크게 양손을 흔든다. 들리는지 안 들리는 모르겠지만, “갈게요!”라고 소리치며 차에 탄다.


자동차 거울에 비친 할머니는 계속 그 자리를 지키신다. 내가 시야에서 사라질 때까지 발걸음도 시선도 쉽게 옮기지 않으신다. 잠시 후면 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생각지 못하고 다시 전화기를 붙들고 통화버튼을 누르고 있을 것이다. ‘아들아! 며느리야! 언제 집에 들르겠느냐고.’ 그렇게 무한 루프 속에 하루하루 똑같은 삶이 반복된다. 이기적으로 들릴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강릉은 더 이상 내게 케렌시아가 아니다. 장소와 상황만 다를 뿐 현실이다.


현실을 잠시 떠나서 쉴 곳을 찾아온 것이니 그럴 수밖에. 그런데 내게는 혼자가 아니어도 ‘케렌시아’를 느끼게 해주는 사람이 있다. 어릴 때부터 가까이 함께 지내 온 친척 형이다. 《83년생 이야기》 1편의 부록에 실렸던 소설, 《닭장 속의 유토피아》의 등장인물의 모티브가 되었던 인물이기도 하다. 형은 삼척에서 직장을 구했다. 그래서 나는 자연스럽게 강릉에 잠시 들렀다가 삼척으로 향했다. 형을 만나러 가기 위해서 그리고 숨을 쉬기 위해서. 내가 갈 때마다 멋진 장소도 알려주고, 맛집도 알려주고, 숨 쉴 곳도 소개해주었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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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에 강릉에서 삼척으로 가는 길엔 고속도로가 없었다. 국도만 있을 뿐. 모래시계로 유명한 정동진을 지나 동해를 거쳐 가야 한다. 이 사이에서는 1996년 9월 끔찍한 사건이 있었다. 정확히는 안인 근처 바다에 북한 잠수함이 좌초되며 무장 공비(북한 특수 부대원) 26명이 침투한 사건이었다. ‘강릉 무장 공비 사건’으로 검색하면 자세한 내용이 나온다.


강릉에서 여자 승객을 태우고 해안 도로를 따라 남쪽으로 장거리 중인 택시 기사가 있었다. 자정이 넘은 시간에 어두운 해안 도로에 여러 사람이 움직이는 걸 보고 이상하게 여겼으나 처음에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 손님을 내려주고 다시 강릉으로 돌아갈 때 ‘섬광 같은 불빛’을 보고 이상함을 감지해 바로 경찰에 신고했다. 그 시간은 새벽 1시 30분경이었다.


강원도에 친척이 많다 보니 이와 관련하여 다양한 숨은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사실인지 허구인지 모르겠으나 택시 기사가 왜 그 시간에 장거리 운행을 했는지 등 말이다. 그리고 2달 가까이 작전이 진행되면서 사살되거나 실종된 무장 공비를 제외한 최후의 1인 생포 과정도 들었다.


배고픔에 굶주린 마지막 생존자는 산속에 농사를 짓는 한 부부의 집 근처에 접근했다. 그때 남편이 동네 주민인 줄 아는 척하고 친근하게 말을 걸었다고 한다. 그러는 동안 부인은 전화로 경찰을 불렀다. 이 장소는 강릉 도심에서 고작 5~6km 정도 떨어진 곳이었다. 실제 이 근처에 우리 가족은 간 적이 있다. 어릴 적 기억이지만, 산속 사슴 농장에 가서 녹용을 먹었던 기억도 있다. 시기적으로도 별로 차이가 나지 않아서 이야기를 들을 때 등골이 오싹했다. 잘못하면 놀러 갔다가 괜히 죽음에 가까웠을지도 모르니까.


굳이 이때 이야기를 꺼낸 이유는 따로 있다. 강릉은 해수욕장이 많아서 잘 정비가 되어 있는 편이다. 그러나 동해, 삼척으로 내려가게 되면 중간마다 험한 절벽을 마주하게 된다. 잠수함이 좌초한 것도 암초에 걸려서였으니까. 지금은 고속도로가 있어서 해안도로로 굳이 가지 않으니 거센 파도를 잘 볼 수 없다. 하지만, ‘바다가 보이는 동해휴게소’ 근처를 달리면 장관이 펼쳐진다. 왼쪽에 바다가 일직선으로 펼쳐져 있기 때문이다.


파도의 기세가 대단하다. 자연의 위대함을 느낀다. 거센 파도는 위협적이기보다 꽉 막힌 가슴을 뻥 뚫어준다. 휴게소가 올라가서 봐도 좋지만, 나는 개인적으로 차 안에서 그 장관을 보는 걸 더 즐긴다. 케렌시아에 많이 가까워졌다는 신호이기 때문이다. 아직 진짜 케렌시아에 가지 않았는데도 흥분된다. 현실을 떠났다는 게 느껴진다. 설렌다는 표현이 적절할 듯하다. 좋아하는 사람, 좋아하는 장소가 있는 ‘삼척’에 가까워졌으니까 말이다.


낮 시간대에 형은 직장에서 일하고 있으니 나는 가장 먼저 들리는 곳이 있다. 아쉬울 수 있겠지만, 장소는 굳이 밝히지 않겠다. 강릉 안목 바다처럼 또다시 내 휴식처를 잃기 싫어서다. 언젠가는 또 알려지고 내가 좋아하는 만큼 이 장소를 좋아하는 사람이 많아지면 복잡해지겠지만, 그 시간을 늦추고 싶다. 이름은 밝히지 않지만, 묘사해 보면 이렇다.


전망대에 오르기 위해 나무 계산을 올라간다. 꼭대기 입구엔 나무 정자가 우두커니 위치해있다. 그리고 조금 더 지나서 나아가면 전망대가 나온다. 나는 오른쪽부터 왼쪽으로 훑어보는 걸 좋아한다. 가파른 절벽은 아니지만, 암초가 가득 포진해 있다. 함부로 육지로 올라오기 힘들어 보인다. 파도는 바람에 실려 바위에 부딪힌다. 말로 설명하기 어렵지만, 강한 에너지를 느낀다. 지친 심신이 강인한 자연 에너지를 받아 다시 살아나는 느낌이 든다. 이렇게 강한 에너지가 있는 곳이니 강철 잠수함도 좌초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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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망대에서 5분 정도 세상과 단절된 나와 오직 자연만이 소통하는 시간을 보낸다. 긴 시간은 아니지만, 별의별 상상을 해본다. 내가 거인으로 변해서 망망대해에서 누워서 편하게 떠 있는 상상을 해본다. 그러다 지겨우면 갑자기 자유형을 해본다. 알고 보니 바다가 얕아서 벌떡 일어서 걸어도 본다. 끝이 보이지 않는 수평선 끝자락을 향해 시선을 고정한 채로.


상상의 나래를 펼친 후에 만족하고 나면 서서히 전망대에서 내려온다. 바로 앞에 있는 카페에 들어간다. 일단 급한 일부터 빠르게 처리하고, 평소 여유롭게 하지 못했던 독서를 한다. 때론 글을 쓰기도 한다. 온전히 나에게 집중하는 시간의 연속이다. 다시 세상과 단절되는 시간이다. 오롯이 내가 좋아하는 일에 집중하는 시간. 무아지경에 빠진다.


그러다 누군가 젊은 사람이 나를 쓱 보더니 바로 옆 테이블에 앉는다. 처음엔 왜 나를 쳐다보나 생각했다. 나는 그 사람을 흘끗 보다 말았다. 삼척에서 나를 알아볼 사람이 없을 테니까. 시선이 느껴져서 다시 옆을 살펴보니 친척 형이다. 얼마나 집중했으면 형을 알아보지 못할까. 형은 내가 문자 답장을 하지 않길래 당연히 여기 있을 줄 알고 왔단다. 정말 나는 시간 가는 줄 몰랐다. 나만의 시간에 흠뻑 젖어있었기에.


형이 갑자기 제안한다. 혹시 더 좋은 곳 가보지 않겠냐고. 내가 좋아할 만한 곳이 생각이 났단다. 아직 저녁 먹기까지 시간이 좀 있으니 걸어도 되겠냐고 한다. 절대 후회는 없을 거라고 자신 있게 말하는 형의 태도에 넘어갔다. 차를 타고 잠시 이동했다. 5분도 채 걸리지 않았다. 차에서 내리니 언덕길이 보였다. 이 길이 바로 해파랑길이라고 한다.


우리나라 동해, 서해, 남해 삼면을 잇고, 서해에서 동해로 가르는 북쪽 테두리를 걷는 길이 총 4개가 있다고 한다. 최전선인 고성에서 동해를 따라 남쪽 부산까지는 해파랑길. 동쪽 부산에서 남해를 따라 서쪽 해남까지는 남파랑길. 서쪽 해남에서 서해를 따라 북쪽 강화까지는 서해랑길. 서쪽 강화에서 비무장지대를 따라 동쪽 고성까지는 DMZ 평화의 길이라 부른다.


힌트를 주자면, 해파랑길 33번 코스를 지났다. 삼척에서 동해로 가는 길이었다. 중간에 경계선을 마주했다. 언덕에 올라 오른쪽에 펼쳐진 기세 강한 삼척 바다를 바라봤다. 하지만 언덕을 내려가면서는 대반전이 일어났다. 거센 파도는 어디 간데없고, 고요한 바다를 안고 있는 고운 모래로 뒤덮인 해변이 나타났다.


‘고작 삼척에서 동해로 넘어왔다고 이렇게 분위기가 다르다고?’


사실 도시를 넘어와서가 아니라 내가 그동안 삼척에선 해변에 간 적이 없어서 일지도 모르겠다. 강릉의 화려한 해변과는 180도 다른 느낌이었다. 네온사인이 가득한 밤낮으로 반짝이는 부산 바다가 아닌 언제나 평온함과 고요함이 묻어나는 통영 바다를 보는 느낌이라고나 할까. 차고 넘치는 에너지에 동요하여 흔들리는 심장 소리가 아니었다. 분명히 두근거림은 같지만, 다른 두근거림이었다.


사막에서 오아시스를 찾은 느낌이라고 할까? 뭐라고 표현하는 게 맞을까? 곰곰이 생각해 보니 장작이 떠오른다. 모든 걸 다 삼켜버릴 것처럼 활활 타오르는 ‘장작’이 아니다. 오히려 다 타고 자작자작 타고 있는 ‘숯’ 말이다. 화려한 불꽃은 사라지고 은은한 불빛을 자아낼 뿐이다. 가만히 있으면 세상이 고요해진다. 쉬이- 바람 소리를 내며 타는 소리만 들릴 뿐이다. 따뜻한 온기에 금세 새근새근 잠들 것만 같다. 차가운 밤바다지만, 포근함이 온전히 느껴진다.



삼척에 갈 때마다 형이 만날 혹시 ‘국수’ 먹어보겠냐고 물어봤다. 나는 면보다 밥을 더 좋아하기에 항상 거절했다. 하루는 정말 한 번은 꼭 이 국수를 먹어봤으면 좋겠다고 강력히 말을 했다. 추운 겨울날 동치미국수라니... 이열치열은 있어도 이한치한은 좀 그렇지 않나. 등쌀에 못 이겨 한번 먹어보기로 했다.


차를 타고 시장으로 향했다. 차로 5분 정도 걸려 도착했다. 삼척은 소도시라 30분 이내에 어디든 갈 수 있다. 멀어야 30분이라는 말이다. 웬만해서는 10분 이내면 어디든 간다. 그런데 국수를 먹으려면 오래 기다릴 수도 있다고 했다. 겨울이라 조금 상황이 다를 수 있지만, 항상 줄 서서 먹는 그런 맛집이라고.


배고픔을 참고 줄 서는 건 세상에서 가장 큰 고통이다. 나는 밥때를 놓치면 컨디션이 급격히 저하하기 때문이다. 심할 땐 이틀이나 아플 때도 있다. 그래서 식사 시간을 어겨가며 줄을 서서 밥을 먹는 건 딱 질색이다. 다행히 겨울이라 손님이 없기만을 바라며 식당으로 발길을 옮겼다. 하늘이 도왔는지 우리가 마지막 남은 한 자리를 차지할 수 있었다. 몇 분 차이에 하나둘 모여들어 줄을 서더니 문전성시를 이뤘다. 겨울에도 이 정도면 여름에는 도전할 엄두가 나지 않는다.


우리 차례가 되어 동치미국수 2개를 시켰다. 가격이 정말 착했다. 1그릇에 6천 원이라니. 말도 안 되는 가격이었다. 맛있고 가격이 좋으니 줄을 서서 먹을 수밖에. 넓적한 스테인리스 그릇에 살얼음이 동동 떠 있었다. 국수도 가지런히 둥글게 말려있었다. 우선 숟가락으로 국물을 맛보았다. ‘캬-’ 시원한 겨울 맛이었다. 차가운 국물이 식도를 타고 내려갔다. 그리곤 국수 면발을 집어 들었다. 한 입을 베어 물었다. 분명 국수 면발인데 쫄면 면발처럼 졸깃했다. 왜 형이 이 집에 그렇게 오자고 했는지 한입에 모든 걸 알 수 있었다.


그 후론 삼척에 올 때마다 이 국숫집에 들리는 건 당연한 일이 되었다. 결국에 한 번은 여름날이었다. 시간에 맞춰 왔는데 이미 줄은 길게 늘어섰다. 1시간은 족히 기다려야 했다. 사람들은 가게에 비치된 우산을 들고 따가운 해를 피했다. 우산마저도 동이 나서 우린 뙤약볕에 삐질삐질 땀을 흘리며 우리 순서를 기다려야만 했다. 하지만 기꺼이 기다릴 수 있었다.


드디어 우리 순서가 되었다. 언제나처럼 동치미국수를 주문했다. 여름에 먹는 동치미국수는 다른 의미로 나에게 케렌시아가 되었다. 여름날 견디기 힘든 더위를 물리칠 수 있는 유일한 음식이었으니까. 현실을 벗어나 나만의 케렌시아에 온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으니까 말이다. 그런 의미에서 현재로서는 삼척이란 도시는 내게 온전한 쉼을 주고, 현실을 벗어날 수 있게 도와주는 음식을 제공해 주는 곳이다. 삶은 변하고 또 변하지만, 이 케렌시아만큼은 오래오래 간직하고 싶다.


(엔딩곡)

“좁은 욕조 속에 몸을 뉘었을 때 작은 달팽이 한 마리가. 내게로 다가와 작은 목소리로 속삭여줬어.”


*달팽이

- 1995년 1월에 발매된 이적 × 김진표 듀오 ‘패닉’의 1집 앨범 <Panic>의 4번 트랙에 위치한 타이틀 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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