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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화. 서울 상경

83년생 이야기 2

by 신영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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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상경이란 말은 중복된 표현이다. 상경이란 단어에 수도가 들어가 있으니까. 하지만 오히려 좋다. 익숙한 것에 끌리는 게 인간의 심리라고나 할까. 강릉에서 조부모님과 함께 살던 부모님은 분가를 이유로 내가 3살 때 서울로 상경했다. 사정이 있어서 새롭게 직업을 구해야 했던 아버지는 취업 준비생인 채로 무작정 서울로 향했다. 정확히 기억은 나지 않지만, 보증금 1천만 원 정도의 전셋집을 구했다. 남산 도서관 바로 아래 후암동 한 언덕에 있는 방 두 칸짜리 집이었다.


취준생 가족이 뭐가 넉넉했으랴. 아버지가 시험에 합격해서 정식으로 발령이 나기 전까지 간신히 입에 풀칠하는 정도였다. 비록 넉넉하지 못한 환경이었으나 포근하고 행복한 가정이었다. 어린 날 기억 속 떠오르는 장면이 있다. 갑작스러운 불꽃놀이 소리에 소스라치게 놀란 밤. 하지만, 오색빛깔 찬란한 불빛에 매료되었던 밤. 비 오는 날이면 따뜻한 방바닥에 누워서 찐 고구마를 먹으며 TV를 보거나, 아버지가 기타 치며 불러주시는 올드 팝송을 듣는 모습.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행복이고 추억이었다.


물질적으로 가진 것 없어도 마음은 풍요로웠던 어린 날이 떠오른다. 아마도 때 묻지 않은 어린 날의 순수했던 기억이라 그럴지도 모르겠다. 가난한 나라에서 해맑게 살아가는 사람들의 행복 지수가 높은 이유도 이와 같지 않을까. 무언가를 이루고, 무언가를 가지게 된 나중의 인생보다는 온전히 우리 가족만이 남아서 똘똘 뭉쳐 살아가던 그 시절이 좋은 기억으로 남은 건 부정할 수 없다.


해방촌 바로 위에 있었던 후암동에서는 3살 때부터 7살 때까지 4년 정도 살았다. 그리고 무슨 이유에서인지는 모르지만, 시흥동으로 이사했다. 지금은 전세 제도에 대해서 좀 알게 되어 추측해 본다. 아마도 계약갱신이 끝나는 4년 차에는 전셋값이 많이 오르지 않았을까? 2년 후에 계약갱신을 하면 5%만 전셋값을 올릴 수 있지만, 4년이 만기가 되면, 시세에 맞게 올릴 수 있으니까. 오른 전셋값을 오롯이 감당할 수 없었던 부모님은 조금 더 집값이 싼 집으로 옮겨야만 했을 것이다. 집 없는 사람은 서러워서 어떻게 사나.


두 번째 전셋집도 방 두 칸짜리 집이었다. 다른 점이 하나 있다면, 전 집과 다르게 마당이 있었는데, 주인과 함께 쓰는 공간이었다. 주변 시세보다 전셋값이 저렴해서 덜컥 계약하고, 이사하는 날 알게 된 사실이 있다. 여러 사람이 이 집을 들락날락했고, 가까운 곳에서는 찬송가 소리가 크게 들렸다. 알고 보니 집주인은 교회를 운영하시는 목사님이었다. 집 구조를 파악해 보니 마당 아래에 교회가 있었다. 종교가 없던 부모님은 깜짝 놀랐지만, 이미 계약금을 보낸 후라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했다.


순간의 판단이었지만, 그래도 집주인이 목사님이니 나쁜 사람은 아닐 거라며 위로했다고 했다. 하지만 전세금이 싼 이유는 있었다. 싼 게 비지떡이라는 말이 있는 것처럼. 수요일 저녁이나 주말이면 사람들이 교회로 모여들었고, 종교가 없었던 부모님은 얼떨결에 찬송가 소리를 들으며 살게 되었다. 거부감이 있는 건 아니었지만, 내가 사는 공간에서 조용히 지내고 싶은 욕구를 채울 수 없었다. 특히 주말에는 교회에 북적이는 사람들로 시끌벅적하여 쉬지 못하니 괴로웠다.


이 글을 쓰면서 깨달은 점이 있다. 그래서 주말이면 그렇게 아버지가 나와 동생을 데리고 종일 산에 다녀왔구나 싶다. 물론 나와 동생은 일요일 아침엔 1시간 교회에서 예배를 드렸다. 부모님이 교회에 가는 건 거절하셨지만, 아이들이라도 보내라는 목사님 가족의 부탁을 거절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이 집에 계속 혜택을 받으며 살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을 것이다. 서울에 살면서 이렇게 싼 보증금으로 살 수 있는 집이 얼마나 있었으랴. 그렇게 그 집에 6년간 살고 내가 6학년이 되었을 때 드디어 우리 가족은 서울살이를 청산했다. 꼬박 10년 만이었다. 평촌 신도시에 아파트를 분양받아서 가게 되었기 때문이다. 드디어 우리 집이 생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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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나 현재나 같은 점이 있다. 서울에 집 사는 건 어렵다는 것이다. 서울에서는 전셋집에 살며 언제 쫓겨날까 전전긍긍하며 살았다. 하지만, 경기도로 내려오니 바로 우리 집이 생겼다. 더는 이사 걱정을 할 필요가 없어진 것이다. 똑같이 방은 2칸이었지만, 거실도 있고, 부엌도 있다. 조금 아쉬운 것은 나와 동생이 점점 크면서 19평 아파트도 살기엔 적어졌다는 점이다.


내가 스무 살이 되던 해 부모님은 같은 가격으로 30평대 아파트를 사셨다. 물론 지역은 더 남쪽이었다. 화성 봉담이라는 곳이었다. 신도시에 살다가 ‘읍’으로 내려가니 집은 넓어졌지만, 아직 동네는 개발 전이었다. 수원역에서 버스를 타고 집까지 가는 길에는 염소도 보이고, 소도 보였다. 서울에 살던 어릴 적 친구는 아직도 우리 집에 놀러 오던 날을 잊지 못한다고 한다. 도심 속에 소가 누워있는 광경이 꽤 충격이었다고 말이다.


중학생이었던 내 동생은 평촌에 살 때는 코 닿으면 학교에 갈 수 있었다. 하지만 이사 와서는 한참을 걸어야 학교가 나왔다. 우리가 사는 집만 아파트지 주변은 ‘읍’이었던 곳이라 농촌과 도시가 어울릴 듯 아닐 듯 공존했다. 이곳도 지금은 도로며 아파트며 개발되어 상전벽해를 이뤘지만, 그땐 그랬다.


어쨌든 같은 값으로 1.5배 이상으로 넓은 집에 살게 되었으니 호강할 수밖에. 처음으로 쾌적한 집에서 각자의 공간을 차지하며 살 수 있었다. 사람들과 약속이 있어서 서울 근처로 가려면 교통은 불편한 것만 빼면 말이다. 대학도 수도권으로 가다 보니 집이 가까웠다. 군대도 서부 최전방이지만 어쨌든 산골 오지는 아니라 휴가 때 집에 오기 괜찮았다. 첫 직장은 다시 안양으로 갔지만, 두 번째 직장은 수원이라서 10년 가까이 이 집은 유용했다. 딱 하나 재테크 관점에서만 빼면 말이다.


평촌집은 분양가보다 4배가 올랐는데, 이 집은 부모님이 집을 팔고 다시 강릉으로 내려가는 시점에 거의 오르지 않았다. 만일 평촌 집을 팔지 않고 잘 살려두었으면 어땠을까? 아버지가 퇴직 후 울며 겨자 먹기로 고향으로 내려가실 필요도 없었을 것이다. 어머니도 화가 일을 더 활발하게 하시며 경제 활동을 하기 쉬웠을 것이다. 하지만 퇴직 후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부모님은 모든 걸 포기하고 시골집으로 내려갔다. 집 팔고 대출금 갚고 남은 돈으로 할 수 있는 최선이었다.


인간이 흙에서 태어나 다시 흙으로 돌아가는 느낌이다. 강릉에서 호기롭게 서울로 상경했다가 점점 남쪽으로 가더니 결국 강릉으로 돌아갔으니까. 간접적이지만, 부모님의 삶을 통해서 느끼는 게 많았다. 집은 노른자 지역에서 멀어질수록 값이 싸지만, 나중에는 가치가 없어진다는 걸 말이다. 부모님이 강릉으로 내려가신 후 나는 다시 안양이 직장이라 근처에서 자취했다. 심지어 월세였다. 보증금이 많지 않은 사회 초년생으로서는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먼 거리를 출퇴근하는 것보다는 훨씬 나은 선택이라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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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 후 첫 집은 수원이었다. 처가댁이 수원이었기 때문이다. 아파트를 분양받으면서 보증금이 없었던 나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아파트가 다 지어질 때까지 1년 정도 처가댁에 머물렀다. 처남이 외국에서 유학 중이라 내 살림을 가지고 들어와도 답답하지는 않았다. 그리고 첫째가 태어나서는 사정이 있어서 처 외할머니댁으로 들어갔다. 할머니를 보살필 사람이 필요했고, 우리는 아기를 돌볼 공간이 필요해서였다. 그렇게 떠돌이 생활을 했다. 물론 가족애는 더 피어오르고 애틋했다.


오랜 기다림 끝에 마침내 보금자리가 완성되었다. 첫째에 이어 둘째도 수원에서 태어났다. 우리 집 아이들은 태어나서부터 자라는 곳이 수원이 되었다. 아내도 학창 시절부터 살았으니 30년 넘게 수원에 살았다고 한다. 30년 동안 대출금 원금과 이자를 갚아가며 살아갈 집이라 수원은 우리가 평생 살아갈 터전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삶은 그 누구도 예측할 수 없다. 우리에게도 여러 번의 위기와 기회가 찾아왔기에.


아이가 둘이 되니 고정 지출이 점점 늘었다. 지금 상태가 지속되면 이 집을 유지하는 건 미련한 짓이었다. 아내랑 몇 번이고 생활비를 아껴가며 궁핍하게 이 집을 지키는 게 맞느냐 토론을 벌였다. 근처에 구축 아파트로 가면 빚 없이도 살 수 있는데 그렇게 할까 수 없이 고민했다. 새 아파트를 누리기 위해 감당해야 할 경제적 부담은 우리 분수에 맞지 않았기 때문이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한 해는 휴직하고, 심지어 다음 해에는 퇴사했다. 드디어 이 집을 포기할 때가 왔다. 작가로 살아가기 위해 퇴사를 했지만, 몇 달간 수입이 없으면서 더욱 분명해졌다. 하지만 위기는 또 기회로 찾아온다. 작가의 길이 아닌 20년간 키워 온 내 전문성을 살리니 새로운 회사에서 일하게 되었다. 다행히 여러모로 좋은 조건으로 일을 할 수 있었다. 이 집을 포기하기로 모든 마음을 내려놓았더니 오히려 이 집을 지킬 수 있는 상황이 되었다. 그렇게 지키고 싶을 때는 마음대로 안 되더니 포기하니까 오히려 기회가 왔다.


회사는 다행히 내가 들어오고 나서 꾸준히 매달 성장했다. 덕분에 나의 경제적인 상황도 급속도로 좋아졌다. 게다가 회사는 갑자기 사옥 건물을 구매했다. 재택근무 기반 사업이라 출근할 필요는 없었지만, 갑자기 회의하려면 제약이 많았다. 대표님은 일산에 살고 있고, 나는 수원에 살아서 자주 만날 수는 없었다.


한 달에 한 번꼴로 2시간 넘게 운전해서 가서 1~2시간 회의하고 다시 2시간을 운전해서 내려왔다. 비효율의 끝판왕이었다. 하지만 얼굴 보며 만나서 대화를 나누면 아이디어가 쏟아졌고, 매달 더 좋은 시스템을 만들어냈다. 그런 의미에서 사옥은 우리에게 더 큰 성장과 발전을 이룰 기회를 줄 것만 같았다.


사옥 건물 위치는 서울 송파구였다. 대표님도 사옥 근처로 이사했다. 그러니 이제 회의 장소는 일산이 아니라 서울이 되었다. 물리적 거리는 분명히 많이 줄었다. 하지만 시간은 별반 다를 게 없었다. 오히려 차가 많이 막히니 회의에 다녀오면 진이 빠져 일에 집중할 수 없었다. 그런데 사옥이 있으니 더 자주 만나서 회의를 해야 했다. 대책이 필요했다.


하지만 서울은 엄두도 못 낼 곳이었다. 서울과 수원 집값 차이는 어마무시했으니까. 수원 집을 팔아도 사옥 근처로 가는 건 상상도 못 할 일이었다. 그래도 한번 지푸라기 잡는 심정으로 대표님 집 근처에서 회의하고, 부동산을 통해 전셋집을 알아봤다. 20년 가까이 된 구축 아파트라 그런지 30평대이지만, 안방 화장실에 샤워 시설이 없었다. 성별이 다른 자녀를 둔 나로서는 충격이었다. 집값은 엄청 비싼 데 집은 거지 같았다. 차라리 3분의 1밖에 안 하는 수원 집이 훨씬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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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로 이사를 하는 게 과연 옳을까? 아니 과연 나는 이걸 감당할 수 있을까? 감당하더라도 그만큼 가치가 있는 것일까?’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이런저런 생각으로 머리가 복잡했다. 고민으로 밤에도 잠이 오지 않았다. 불면증이 다시 재발하는 것만 같았다. 간신히 잠이 들었다. 그런데 갑자기 폭포 소리가 들렸다. 밖에 비가 많이 오나 싶었다. 여름날 장마를 겪고 있었으니까. 집이 무너질 정도로 시끄러워서 베란다 창문을 닫으려 거실로 나왔다. 베란다 창문은 굳게 닫혀있었다. 더워서 에어컨을 켜두었으니까. 그런데 이게 웬걸. 천장에서 물이 폭포수처럼 쏟아지고 있었다.


꿈인가 싶어 볼을 꼬집어 보았지만, ‘악-’ 소리 지를 만큼 아팠다. 눈앞에 펼쳐진 광경은 모두 현실이었다. 급히 화장실에서 양동이를 가져와 아래 두고, 걸레와 수건을 있는 대로 동원해 흥건히 젖은 바닥을 훔쳤다. 끝이 보이지 않았다. 쉬지 않고 바닥을 닦아내니 다행히 점점 해결되어 갔다. 다만 천장에서 쏟아지는 폭포는 기세를 멈추지 않았다.


자세히 살펴보니 천장이 부풀어 있었다. 손으로 꾹 눌러보니 물이 급히 흘러내렸다. 양동이를 몇 번 비워내고 나니 드디어 기세가 멈췄다. 이젠 물이 시냇물이 흐르듯 졸졸 흘러내렸다. 결국 밤을 지새웠다. 눈을 뜨고 있으니 뭐라도 해야 했다. 천장 누수로 인터넷을 검색했다. 한 전문 업체가 기가 막히게 해결한다고 홍보했다. 후기를 보니 가격은 비싸도 말끔하게 해결한다는 내용이었다.


실례가 안 되는 아침 시간이 되자마자 적힌 번호로 메시지를 남겼다. 사진과 영상을 첨부했다. 다행히 오전 중으로 연락이 왔다. 가장 빠른 날로 예약을 잡았다. 불행 중 다행으로 천장에서 흐르는 물은 많이 줄었다. 업체가 올 때까지 버틸 수 있었다. 드디어 전문 업체에서 방문했다. 4명의 기사님이 왔다. 그리곤 천장을 뚫어야 원인을 알 수 있다고 했다. 누수가 있어서 수리해야 하면 비용이 많이 들 거라고 했다. 비용이 문제가 아니었다. 빨리 이 답답한 상황을 정리하고 싶었다.


천장을 뚫고 ‘슥-’ 보더니, 위층과 관련이 있어 보인다고 했다. 추측이 옳다면, 굳이 기계를 넣어서 배수관을 뚫거나 할 필요는 없다고 했다. 그럼 비용도 줄 거라고 했다. 위층에 올라가 초인종을 눌렀다. 몇 번을 눌러도 답을 하지 않았다. 하지만 포기하고 싶지 않았다. 혹시나 해서 문을 두드리기도 했다. 인터폰 소리가 작을 수도 있으니까. 다행히 어르신이 눈을 비비며 무슨 일이냐 물으며 나오셨다.


업체에서는 아랫집에 물이 새어 위층 누수가 원인일까 파악하러 왔다고 했다. 에어컨 쪽을 살펴보더니 ‘잡았다!’하고 소리를 외쳤다. 아파트에 균열이나 누수가 있는 게 아니라 에어컨 호스가 빠져 있어서 밖으로 배출되지 않고, 아래층 천장으로 물이 흐르고 있었던 것이었다. 모든 일이 30분 이내 해결되었다. 기쁨을 감출 수 없었다. 곧 모든 게 해결이 될 것만 같았다. 하지만 좋은 일이 있으면, 또 안 좋은 일도 있는 법.


업체는 누수 발견 비용으로 100만 원을 청구했다. 천장 잠깐 뚫고, 위층에 올라가서 눈으로 확인한 게 다였는데 말이다. 너무 과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가격 조정을 요청했지만, 강력히 부정했다. 그리고 보험으로 처리하면 다 보상받을 거라고 했다. 일단 급한 불은 껐으니 알았다고 했다. 하지만 계속 머릿속으로는 100만 원은 과잉 청구가 아닌가 하는 의구심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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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곳저곳 커뮤니티에 조언을 구했다. 비용이 많이 청구된 건 아니냐고 물었다. 사람마다 의견이 달랐다. 많은 의견이 업체마다 부르는 게 값이고, 그게 관례이니 따를 수밖에 없다고 했다. 고작 30분에 100만 원을 벌다니 참 대단하다고 생각했다. 일단 비용은 인정하기로 했다. 하지만 현금영수증을 받는 과정에서 일이 터졌다. 내가 바빠서 아내한테 통화를 부탁했는데, 현장이 시끄러워 잘 못 들었는지 엉뚱한 소리를 했다.


아내는 현금영수증 요청을 할 뿐이었고 궁금한 게 있어서 무언가 물어봤다. 그런데 그 업체 대표라는 인간은 남편한테 이야기 듣지 못했냐, 부부가 대화는 안 하냐는 둥 이상한 말을 지껄였다. 아내는 그 말에 화가 나서 무슨 말하느냐 따져 물었다. 그랬더니 전화기 너머로 ‘씨발’이라고 소리치며 전화를 끊어버렸다고 했다.


아내에게 직접적으로 한 말이 아니었다고 해도 고객에게 ‘쌍욕’이라니... 돈 받았으면 땡인가 싶었다. 아무리 TV에 나온 업체라고 할지라도 고객서비스가 엉망이면 개차반 업체 아닌가? 그리고 고객이 궁금한 게 있으면 물어볼 수도 있는 게 아닌가? 아내가 많이 속상해했다.


이건 그냥 넘어갈 일이 아니라 생각했다. 평화주의자인 나로서도 용납이 안 되었다. 무엇이 잘못인가, 무슨 오해가 있었던 것인지 확인을 하고 싶었다. 어찌 되었든 양쪽 말은 들어봐야 하니까. 개인적인 의견이지만, 분명히 그쪽 대표가 어떻게 아내 말을 이해했는지 확인하고 싶었다. 그게 오해가 되었다면 일단 풀고 시작하면 더 좋을 테니까. 심호흡하고 전화를 걸었다. 다행히 전화를 받았다. 그리곤 대화했다.


그쪽 말을 들어보니 이러했다. 이미 나와 문자로 모든 일을 종결했는데, 다시 연락해서 현금영수증 언제 끊어주느니 이것저것 물으니 짜증이 났다고 했다. 그리고 현장 소음으로 대화가 잘 안 들리고 해서 대화가 잘 안 됐다고. 자신의 갖은 핑계를 댔다. 그러면서 또 내 아내를 막 욕하려 들었다. 왜 종결된 일을 따져 물으려 전화를 하느냐고. 또 흥분을 하길래 나도 화가 나서 한 마디를 했다.


“사장님... 지금 실수하시는 겁니다. 잘 생각해 보시지요.”


내 말을 잘 못 듣는 것 같길래 여러 번 큰 소리로 이 말을 반복했다. 그랬더니 상대방이 갑자기 정신이 드는지 차분해졌다. 그래서 내가 차분하게 다시 설명했다. 내 아내는 현금영수증을 요청한 거고, 그리고 궁금한 사항이 있어서 단순히 물어본 것뿐이다. 따져 물으려 전화한 게 아닌데 부부 관계에 대해서 그렇게 비난하듯이 말하면 누가 기분이 좋겠냐고.


이성이 돌아온 저쪽 대표는 내 말을 유심히 들었다. 그리곤 갑자기 내게 사과했다. 자기가 현장에서 바쁜데 전화가 오니 괜히 민감하게 반응했던 것 같다고 했다. 그리곤 아내에게도 연락해서 사과드리겠다고 했다. 알겠다고 하고 끊었다. 다행히 아내에게도 전화가 왔는데, 아내는 받고 싶지 않아 했다. 그러니 문자가 왔다. 자기가 실수한 것 같다고. 아내는 기분이 다 풀리지는 않았지만, 일단락되었으니 그냥 잊으려 노력한다고 했다.


천장 폭포수, 유명 누수 업체 대표의 막말... 가슴이 조여올 만큼 스트레스가 컸다. 하지만 더 큰 스트레스는 천장에 구멍이 뚫렸는데, 바로 해결할 수 없었다. 위층에서 가입한 보험사에서 조정을 나왔는데, 모든 비용을 다 보상해 줄 수 없다고 했다. 특히 누수 탐지 비용이 지나치게 많아서 그렇다고 했다. 보험사랑 조정하느라 시간이 자꾸만 지체되었다. 천장이 뚫린 만큼 내 심장도 똑같이 뚫린 채 매일매일 보냈다. 그랬더니 그렇게 좋았던 이 보금자리를 떠나고 싶다는 갑자기 생각이 들었다.


아내와 긴 상의 끝에 결론지었다. 일단 우리가 비용을 일부 감수하더라도 보험사 지원금만큼만 받고 보수를 진행키로 했다. 여름에서 어느덧 9월이 되어 추석 연휴가 다가왔다. 한 달 넘게 천장에 구멍이 뚫려 있었다. 간신히 업체를 구해서 천장을 보수했다. 하지만 도배가 되지 않으니 집은 공사판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도배 업체에서 일을 진행하지 못하겠다고 연락이 왔다. 견적을 보러 온 사람이 실수로 견적을 잘못 내었던 것이었다. 그 가격으로는 진행을 못 하겠다는 뜻이었다. 우리도 이렇게 쉽게 약속을 깨는 업체랑 하는 것보다 새로 구하는 게 낫다고 생각했다. 우여곡절 끝에 도배가 끝났고, 7년이 지난 우리 집은 다시 새집이 되었다. 하지만 우리 마음은 예전 같지 않았다. 상처는 아물더라도 그대로 그 자리에 남아 있으니까. 이 집에서 마음이 떠버렸다.


다행히 내가 새로 들어간 회사는 승승장구했다. 그리고 사옥 리모델링 공사도 시작했다. 갑자기 하늘의 뜻이란 생각이 들었다. 이 집을 팔아서 서울로 가면 보증금이라도 낼 수 있고, 부족한 건 대출을 받거나 월세로 내면 되니까. 다행히 급여가 오르고 있으니 감당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아내도 적극 찬성이었다. 둘 다 많이 지쳤었나 보다. 그래도 집에 문제가 있는 게 아니라 위층 잘못으로 물이 흐른 것뿐이니 집을 다른 사람에게 넘겨도 죄책감은 들지 않았다. 과감히 집을 팔기로 했다. 부동산에 시세에 맞게 내놓았다. 하지만 6개월 가까이 집은 팔리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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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을 보러 오는 사람이 많지는 않아도 종종 있었다. 하지만 아이들 짐이 워낙 많으니 깨끗해 보이지 않았다. 혹시 이 짐이 문제일까 싶어 이사를 위해 짐을 정리하고 버리기 시작했다. 잘 안 쓰는 물건은 당근으로 싸게 내놓거나 기부했다. 집이 점점 깔끔해졌다. 하지만 부동산에 찬 바람이 불었다. 설상가상으로 계엄령이 터지고 사람들의 불안 심리에 부동산 시장도 더 위축되었다.


대표님이 사옥 건물은 2월 말이면 완공 예정이라고 했는데, 3월 말로 미뤄지게 되었다고 했다. 한 달 정도 시간을 더 벌었다. 물론 아이들은 학기 중에 전학해야 하니 스트레스가 이만저만이 아닐 것이다. 벼랑 끝에 놓인 기분이었다. 하지만 집이 팔리지 않으니 어쩔 수 없었다. 결단이 필요했다. 희망 가격보다 낮춰서 내놓으려고 보니 시세가 더 내려가 있었다. 그러니 우리 집은 더 안 팔렸을 수밖에. 최저가 보다 더 낮추려니 급매가 아니라 급급매 수준이었다. 달리 방법이 없었다.


5분쯤 지났을까? 부동산에서 바로 연락이 왔다. 집을 보러 오겠다는 사람이 있다고 말이다. 그리고 집을 보고 가자마자 계약하겠다고 했다. 사연을 듣고 보니, 다른 데와 구두 계약을 했는데 자꾸 매도인이 말을 바꿔서 곤란한 상황이었다고. 그런데 그동안 계속 여겨보던 아파트 단지에 최저가가 나온 거라고.


안 될 일은 죽어도 그렇게 안 되지만, 또 될 일은 순조롭게 흘러간다. 이사 날짜도 너무 잘 맞았다. 3월 말 전에 이사 갈 수 있었으니까. 다만 우리도 이사 갈 집을 구하는 게 또 다른 일이었다. 인터넷으로 사옥 근처로 알아보니 운 좋게도 새로 지은 아파트 단지가 있었다. 같은 ‘구’는 아니지만, 차로 5~10분이면 충분히 출근 가능했다. 알고 보니 우리만 모르고 세상 사람들은 다 아는 대한민국 최대 12,000세대가 사는 아파트 단지였다.



이사는 운명이다. 여럿이 떠나고 들어오는 타이밍이 운명처럼 맞출 수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나마 이 운명의 장난을 줄이려면 비어있는 집을 선택하면 된다. 다행히 우리는 새로 입주한 아파트로 이사하는 것이기에 조금은 수월했다. 다만 입주 막바지라서 남아 있는 집이 얼마 없었다. 부동산에서도 우리가 찾는 매물이 별로 없는지 진땀을 흘렸다. 게다가 집을 볼 수 있는 시간이 정해져 있어서 딱 2집만 구경할 수 있었다.


새 아파트라 그런가 아니면 그 유명한 아파트라 그런가 첫 집부터 딱 마음에 들었다. 아이들도 신났다. 각자 방을 정해두기도 했다. 그리고 두 번째 집을 보러 갔는데, 층만 다를 뿐 같은 구조라 특별히 볼 게 없었다. 그래서 거의 들어갔다가 나오듯이 집을 보고 나왔다. 첫 집이 마음에 들어서 계약을 하려고 하는데, 갑자기 집주인이 마음이 바뀌었다고 한다. 전세금을 더 올려서 받아야겠다고 말이다. 끝내 기다렸지만, 조율은 무산됐다. 오히려 두 번째 집에서는 이것도 저것도 다해줄 테니 계약하자고 난리였다. 선택의 여지가 없어 조금은 아쉽지만, 결국 두 번째 집과 계약했다.


하지만 하늘은 오랜 시간 고생한 우리에게 보답하려고 했나 보다. 아직 오래 지내보지는 않았지만, 좋은 집주인을 만난 것 같았다. 아버지뻘 되는 어르신이었는데, 무엇을 이야기하든 서로 조금씩 양보하며 대화가 잘 통했다. 게다가 단지 내 두 개 초등학교가 있는데, 지인이 추천하는 초등학교로 배정받는 동이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단지 내 딱 중간이라서 어디를 가든 접근성이 좋았다.


그리고 한동안 자가로만 살던 나는 세입자가 되었다. 30년 만에 다시 서울 상경을 하면서 말이다. 덕분에 알게 된 사실도 있다. 월세라는 개념은 사실 전세가 기준이었다. 전세금 기준으로 대출이 가능하면 대출받아서 내면 되고, 그만큼 대출이 불가하면 집주인에게 상응하는 만큼 돈을 월세로 계산해서 내는 것이다. 금리 등 상황에 따라 자신에게 더 유리한 방향으로 설정을 하는 것이라는 것도 말이다.


‘지나고 보니’라는 조건이 붙었지만, 결과적으로 지금 집에 매우 만족한다. 나중에 살면서 보니 처음 집은 단지 내 너무 한쪽에 치우쳐서 다양한 인프라를 이용하기에 불편했다. 무엇보다 까다로운 집주인과의 마찰을 피할 수 있으니 지금 매우 만족한다. 일보다는 사람이 더 통제하기 힘든 것이니까. 그리고 이제 서울에 왔으니 사옥으로 출근만 하면 되는데, 나는 오랜 기간 사옥에 출근하지 못하고 재택근무를 하게 되었다. 역시나 이것 또한 사람 때문에 발생한 일이었다.


(엔딩곡)

“서울 서울 서울 아름다운 이 거리. 서울 서울 서울 그리움이 남는 곳. 서울 서울 서울 사랑으로 남으리”


*서울 서울 서울

- 1988년 5월에 발매된 조용필의 10집 <'88 조용필 10집>의 1번 트랙에 위치한 타이틀 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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