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3년생 퇴사 후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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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시절 내 주변 사람 중 건물주는 한 집뿐이었다. 남편은 공무원이고, 아내는 가정주부였다. 그래서 그런지 쥐꼬리만 한 월급으로 먹고살아야 하니, 알뜰의 끝판왕이었다. 기억 중 하나는 이 집에 가면 볼 수 있는 특이한 광경이 있었다. 보통 화장실 변기 물은 용액을 넣든지 해서 파란색일 경우가 많은데, 이 집은 달랐다. 보통 노란색이었다. 향기가 아니라 코를 찌르는 냄새가 났다. 그렇다. 큰 볼일이 아닌 이상은 소변을 모았다가 한 번에 내리는 거였다.
서울에 거주하니까 대중교통이 편리해 차도 없었다. BMW의 표본이었다. Bus, Metro, Walk의 줄임말이다. 유지비가 들어가지 않으니 매달 쏠쏠하게 저축할 수 있었다. 아이는 둘이었지만, 교육비도 아꼈다. 엄마표나 아빠표로 초등학교 때까지는 직접 가르쳤다. 치킨도 브랜드 치킨은 시켜 먹지 않았다. 아이들이 치킨 먹고 싶다고 졸라대면, 시장에 가서 치킨을 튀겨왔다. 완전 기본에 충실한 시장표 후라이드 치킨이었다.
그리고 가능하면 주변에서 옷도 물려받고, 안 쓰는 물건이 있으면 다 얻었다. 지금으로 치면 당근으로 나눔을 받은 거라고도 볼 수 있겠다. 새 제품보다 중고라도 필요한 것만 취했다. 집이 좁아서 필요 없는 물건을 들이지 않았다. 겨울에도 난방을 아꼈다. 대신 옷을 두껍게 입고 실내화를 신고 생활했다. 온돌 시스템이 없는 외국처럼 느껴졌다. 겨울에 이 집에 다녀오면, 감기에 걸릴 것만 같았다. 아파트인데도 웃풍이 있는 주택처럼 느껴졌으니까.
지금에서야 깨달은 점이 있다. 아파트도 절대 고층에 살지 않았다. 전셋값도 고층보다 저층이 싸니까. 아마도 아낀 현금을 저축하거나 재테크를 하는 데 썼을 것이다. 모든 것은 추측이지만, 그렇게 아껴서 살더니 결혼 후 10년 후에 서울에 건물을 샀다. 자가 아파트도 없이 전세로만 살고 있었는데 덜컥 건물주가 된 것이다. 그러니 내가 이렇게 오버해서 추측하는 것도 당연하다. 어쩌면 로또가 당첨되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내가 아는 한 그런 곳에 돈을 쓸 집이 아니었다.
언제나 사소한 것에 낭비는커녕 절약하는 모습에 안쓰럽기만 했다. 양말이나 옷을 꿰매 입는 건 당연했으니까. 90년대 2000년대를 살았지만, 70년대 80년대를 살아가는 모습이었다. 그나마 다행인 건 6.25 전쟁 시절만큼은 아니었다는 점이다. 하지만, 그렇게 아끼더니 건물주가 된 것이다. 금수저로 태어나지 않고, 이렇게 자기 힘으로 건물주가 되는 일이 얼마나 있을까.
사업을 해서 성공한다면, 충분히 가능한 일이다. 하지만 직장인으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다. 평생 벌어도 집 하나 장만 못 하는 경우가 허다하니까. 우리 집에 있던 LP판이 있는 전축을 물려받은 기억도 난다. 우리는 없는 형편에도 CD가 돌아가는 새 전축을 샀는데, 그래서 건물주가 될 수 없었나 보다.
실제 주변에 돈이 많은 사람들을 보면, 쿠폰 하나까지 아껴서 쓴다. 택시비를 아까워하고, 주차비도 아까워한다. 소소하게 새는 돈을 가만히 두지 않는다. 그런데 또 자신이 생각하기에 가치 있는 소비에는 과감하다. 마치 공부할 때 공부하고, 놀 때 놀 줄 아는 우등생처럼. 돈을 쓸 때 쓰고, 아낄 때는 아낀다. 그래서 부자에 가까운 삶을 살아가는 것 같다.
건물주가 되고 나니 월세를 받았다. 부가적인 수입이 생겼다. 여유가 생기니 아내는 한을 풀었다. 늦은 나이에 그동안 평생 한이 되었던 대학에 갔다. 아이를 키우느라 자기 인생이 없었지만, 아끼고 아낀 덕분에 인생이 폈다. 자기 건물에서 교습소를 차리고 수입을 더 늘렸다. 과거 10년은 힘들었지만, 앞으로의 100년은 풍족할 것이다. 자녀는 금수저가 되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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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창 시절 주변 친구들을 보면, 직장인인 부모님이 대부분이었다. 어쩌다 가끔 사업을 하시는 부모님이 있을 뿐이었다. 그런 집은 그럴수록 바쁜 부모님 얼굴을 보기가 힘들었다. 사업을 하면 낮과 밤도, 평일과 주말도 구분 없었으니까. 친구는 혼자서 밥 챙겨 먹고, 집을 지키곤 했다. 덕분에 그 친구의 집은 우리들의 아지트가 되었다. 큰 평수 아파트에 사니까 다 같이 모이기 좋았다. 그리고 보통 집에 없는 게임기부터 국내에선 잘 볼 없는 외국에서 들여온 신기한 물건이 많았다.
부럽기도 하고, 한편으론 안쓰럽기도 했다. 친구는 항상 혼자였다. 엄마는 가끔 아이들을 챙기러 집에 들어왔지만, 아빠는 새벽에 나가서 새벽에 들어오니 얼굴 보기가 힘들었다. 하루는 친구가 아빠랑 너무 놀고 싶어서 아빠한테 말을 걸었다. 그리고 진지하게 물었다. 아빠는 1시간에 얼마를 버냐고 말이다. 그랬더니 아빠가 버럭 화를 냈다. 왜 그런 걸 묻느냐고. 어린놈이 벌써 돈이나 밝힌다고 혼났단다.
그 시절 10만 원은 아주 큰돈이었는데, 아빠는 1시간에 10만 원 이상 버니까 넌 돈 잘 버는 아빠 만난 걸 운 좋은 줄 알라고 했단다. 친구는 시무룩해졌다. 자기가 받는 용돈을 아무리 모아도 10만 원을 만드는 건 어려웠기에. 돈을 모아서 아빠한테 그 돈을 주고 1시간만 놀아달라고 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이거 어디선가 많이 본 내용이 아닌가? 지어낸 이야기가 아니라 실제로 그런 일이 현실에서도 일어났다.
안타깝게도 사업은 승승장구할 때도 있고, 끝없이 추락할 때도 있다. 특히나 현금이 돌지 않으면, 아주 위험한 위기가 오기도 하니까. 어느 날 갑자기 이 친구는 자취를 감췄다. 이미 성인이 된 후였지만, 가정사가 있어 보였다. 사실을 알 수 없으나 아버지 사업에 적신호가 왔을 수도 있고, 아니면 너무 사업이 잘되어 다른 일로 멀리 떠났을지도 모르겠다.
10년, 20년이 흐르고 흘러 정말 우연히 이 친구를 다시 만났다. 잘 지내는지 물어보니 자기 사업을 시작할 거라고 한다. 그동안은 아버지 사업을 돕느라 자기 삶이 없었다고. 그러는 아버지는 무슨 사업을 하시냐 자연스럽게 묻게 되었다. 알고 보니 아버지는 건물주였다. 그것도 한두 개가 아닌 여러 개를 법인으로 운영했다. 혼자서 관리하기가 힘들고, 아무에게나 맡길 수 없으니 믿을 수 있는 혈육에게 관리를 맡긴 것이다.
하지만 친구를 혀를 내둘렀다. 그동안 돈은 많이 벌었을지 모르지만, 자기 삶은 없었다고. 이제는 자기 삶을 살아갈 거라고 했다. 이건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몰랐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돈 많으면 좋은 거 아닌가 싶으면서도 자기 삶이 없는 인생이라니 불쌍도 했다. 변하지 않는 건, 건물주의 아들이라는 점이었다. 같이 만났던 친구들은 다들 부러워했다. 나는 부럽다기보다는 신기했다. 주변에 이렇게 건물이 1개도 아니고 여러 개인 것은 처음이었으니까.
친구는 투정을 부리면서도 머쓱했는지 자기가 먹을 걸 산다고 했다. 친구들은 얼씨구 좋다고 얻어먹었다. 나도 그리 미안함은 들지 않았다. 물질적인 여유를 가진 친구가 기분 좋게 돈을 쓰는 거니까 말이다. 그런 생각도 들었다. 역시 돈 자랑을 하면, 돈을 쓰게 되는구나. 남들에게 뭔가 해 줄 게 아니라면 자랑은 금물이다.
나중에 상속세나 양도세는 많이 낼 수밖에 없겠지만, 노후는 보장이 된 친구가 부러웠다. 한편으론 어린 시절 아빠 얼굴을 보지 못하고 살았던 외로웠던 날에 대한 보상이니 인정할 수밖에 없다. 적어도 매일 같은 시간에 출근해서 같은 시간에 퇴근해 집에 오시는 우리 부모님은 살을 맞대고 우리를 챙겨주셨으니 돈으로 살 수 없는 그런 경험과 시간을 주셨으니까. 돈이냐 시간이냐 무엇이 더 좋은지 따질 수 없으나 각자의 삶은 다양하구나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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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5년 동안 책을 20권 넘게 쓰면서 계약금, 인세, 강연비 등으로 1억은 넘게 벌었을 것이다. 그런데 작가였다가 부동산 분야로 전향한 한 지인은 5년 동안 부동산 등기를 100개 넘게 치면서 나보다 100배 더 많은 돈은 벌었다. 지금은 한 200개 정도라고 하는데, 그의 끝은 어디에 있나 싶다. 돈이 전부는 아니지만, 어떤 분야를 선택하느냐에 따라서 이렇게 결과가 달라지는 걸 보니 여러 감정이 든다.
그런데 200개 등기를 쳤어도 아직 대도시의 고층 빌딩을 사지는 못했다. 부동산 자산이 1개도 아니고, 여러 개도 아니고, 수백 개가 넘는데도 큰 빌딩은 또 다른 세계의 이야기인 듯하다. 대기업이 지어 올린 번듯한 사옥 건물은 수백억에서 수천억까지 하니까 말이다. 오히려 숫자가 감당이 안 될 만큼 크니까 현실감이 없다. 상상조차 안 된다. 기업이 아닌 개인이라면 어떻게 저런 빌딩을 새로 짓거나 아니면 비싼 돈을 주고 살 수 있을까.
레버리지를 적절하게 활용한다고 할 수 있는 일도 아니다. 수십억 정도 빌리면, 한 달에 나가는 이자가 수천만 원이 넘으니까. 계속 수입이 크게 들어와야만 이자를 감당할 수 있다. 레버리지도 능력이 있어야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런 이유로 매달 똑같은 월급을 받는 직장인은 꿈도 못 꾼다. 직장인이 저축도 잘하고 재테크를 잘해서 꼬마빌딩이라도 산다면, 정말 대단한 것이라는 말이다.
그런데 또 지역도 중요하다. 수도권 어느 지역을 가보면, 공실이 허다하다. 그 건물 주인은 이자를 갚느라 죽어날 것이다. 밑 빠진 독에 물을 부어가며 어떻게든 건물을 지킬 것이다. 이미 이룬 건물을 포기할 수는 없으니까. 계속 드는 생각이지만, 꾸준한 소득 혹은 현금 흐름이 있어야만 버티고 지켜낼 수 있다. 안 그러면 경매로 홀라당 넘어가 버리니까. 건물을 사는 것도 능력이지만, 진짜 능력은 지켜낼 힘이 있는 것이다.
가장 좋은 건 내 건물에서 내 사업을 하면 좋다. 다른 사람한테 임대료 낼 필요 없으니 좋고, 은행 이자를 충당할 수 있으니 좋다. 단순히 임차인을 구해서 임대료가 나오기만을 기다리는 건 피가 말린다. 임차인 사업이 잘 안 되면, 월세를 못 내고 결국엔 보증금 까먹고 공실이 되니까. 게다가 망한 자리엔 잘 안 들어온다. 분위기나 기세라는 게 있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건물 자리도 매우 중요한 것 같다. 나도 우연히 알게 된 사실인데, 지역에 따라서 건물 위치에 따라서 ‘종’이 달라진다고 한다. 건물 층수를 올릴 수 있는 제한이 규정되는 것이다. 그 지역의 인구수에 따라서 건물 종이 바뀌어 나중에 더 높은 건물로 다시 지어 올릴 수 있는 기회가 오기도 한다.
회사 사옥을 리모델링하면서 1년 가까이 옆에서 지켜봤더니 이런저런 정보를 얻는다. 들으면 들을수록, 자신감이 떨어진다. 욕심도 사라진다. 만일 건물을 살 수 있을 만큼 돈을 모았다고 해도, 건물을 레버리지도 샀다고 해도 버텨낼 자신이 없다. 한 인간이 거대한 자연재해를 당하는 느낌이라고나 할까? 손도 써보지 못하고 당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하지만 이걸 주변 몇몇 지인은 해내고 있다. 버티고 이겨내고 결국 해낸다. 계속 새로운 일이 터질 때마다 해결하기 위해 백방으로 노력한다. 돈도 투자해야 하고, 사람에게 조언을 구해야 하고, 법도 알아야 하고, 행정 처리도 해야 하고, 끝이 없다. 세상은 넓고, 우리가 모르는 미지의 세계가 있다는 걸 절실히 느낀다. 나는 신이 있다고 믿기에 이 모든 일은 신이 정해준 사람만이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과연 이걸 가질 자격이 있는지 시험하는 것만 같다. 핵폭탄을 터뜨려 놓고서 살아남으라고 한다. 근처에 있는 나도 숨 막혀 죽겠는데, 이걸 어떻게 견디나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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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대 파이어족이 한 때 유행처럼 바람이 불었다. 지금도 그걸 추구하는 사람이 있을지 모르겠다. 건물주가 되어 관리만 하면서 월세를 받고 살아가는 파이프라인을 구축한 사례가 미디어에 나오곤 했다. 그때는 정말 부러웠다. 내가 가질 수 없는 삶을 그들은 살아가고 있었으니까. 그리고 힘들게 직장에서 근무하지 않고, 자기 재산을 관리하며 사는 삶이니 얼마나 좋은가. 하지만 감당할 게 많다는 걸 눈으로 보고 난 후에야 파이어족으로 사는 게 쉽지 않겠다 싶었다. 임차인이 안 맞춰지면 불안감 속에서 있는 돈을 까먹으며 살아야 하니까.
또 한편으로는 괜한 걱정일 수도 있다. 그들은 이미 감당할 준비를 해놓고 일을 벌인 걸 수도 있으니까. 혹은 일을 하나씩 해결하면서 또 더 성장했을지도 모른다. 원래 한번 해보면, 두 번째는 조금 수월하니까. 또 돈이 돈을 계속 눈덩이처럼 불려주니까. 남 걱정할 때가 아니라 내 코가 석 자인 걸 인지해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사실 앞의 모든 건물주 이야기는 지금 내가 처한 현실을 되돌아보기 위함이었다. 나 또한 한때는 건물주의 꿈을 꿨다. 우리 회사 사업이 잘되면, 나에게도 기회가 올 거라 믿었다. 아주 가까운 곳에서 건물주의 모습을 보니까 마치 내가 건물주가 된 느낌이었으니까. 함께 건물을 겪으면서 많은 걸 배웠기에 나도 이룰 수 있을 것만 같았다. 하지만 알면 알수록 어렵다는 걸 알게 된다.
무식이 용감이라고 모르고 시작하는 게 낫다. 대부분 잘 모르고 건물을 사서 고생을 하기에. 하지만 그 힘든 시간만큼 엄청나게 성장한다고 한다. 또 다른 지인이 건물 공사로 애를 먹었다고 했는데, 우리 회사 건물이 딱 그 상황이 되었다. 1년이 다 되도록 건물이 완공되지 않았으니까.
가까운 지인 소개로 비용을 어느 정도 절감할 수 있어서 한 선택이었다. 미팅할 때는 자신감을 보이던 업체였다. 하지만 이렇게까지 일정이 미뤄졌다는 건 결과로 평가할 수 있다. 능력이 안 되는 업체가 큰 공사를 맡아서 벌어진 일이라고밖에 볼 수 없다. 종종 공사 현장에 가면 무슨 구멍가게처럼 몇 명의 인부만으로 미세하게 공사 진도를 나갔다.
제대로 된 업체라면 시간을 줄이기 위해 사람을 더 써서라도 진도를 나갔을 것이다. 그리고 너무 늦지 않은 저녁 시간까지도 시간을 늘려가며 속도를 냈을 것이다. 하지만 인부들은 오후 3~4시가 되면 칼퇴근을 했다. 주말에는 다 쉬었다. 심지어 중간에는 인부가 도망가서 오지도 않았다. 말도 안 되는 일을 다 나열하자면 끝도 없을 것 같다.
달리 생각해 보면, 이건 사기를 당한 것과 같다. 돈을 주고 일을 시켰는데, 결과가 나오지 않았으니까. 더 말도 안 되는 일은 바로 공사 업체에서 포기를 선언했다는 점이다. 그렇게 시간을 질질 끌더니 능력 부족을 이제야 인정한 것이다. 위약금도 물어야 하고, 공사 지체된 지연금도 물어야 하고, 다음 공사 진행 시 발생하는 비용도 보상해야 하고 손해가 클 텐데. 그럼에도 이렇게 포기했다는 건 능력 밖의 일이라는 것밖에 설명이 안 된다.
불행 중 다행이라고 비록 비싸지만, 제대로 된 공사 업체를 구했다. 하마터면 부실 공사이거나 마감이 제대로 안 된 상태로 완공될 위기를 막았다. 그냥 이대로 계속 질질 끌다가 겨우 완공했어도 무슨 일이 생길지 모를 일이었다. 견적을 받고, 계획을 세워보니 빠르면, 2~3달이면 공사가 마무리된다고 한다. 이렇게 금방 끝날 것을 왜 1년 가까이 끝내지 못했을까. 역시나 싼 게 비지떡이라는 말이 맞는 듯하다. 조금 아끼려다가 더 큰 폭탄을 맞았으니까. 끝이 보인다. 나도 드디어 회사로 출근할 수 있다. 보통 직장인은 회사 출근을 싫어하기 마련인데, 나는 재택근무가 너무 지겨워 매일 규칙적으로 출근하고 싶다.
…
온라인 건물주라는 말을 들어 봤는가? 지인 중에 갑자기 온라인 건물주가 되겠다고 했다. 이게 무슨 말인지 알 수가 없었다. 활동을 지켜보니 오프라인으로 하던 사업을 접고, 바이럴 마케팅을 근간으로 한 사업으로 넘어갔다.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모르겠지만, 다단계 같은 느낌도 들었다. 복지 혜택이나 인센티브 등 구조를 보니 비슷했다.
20대 진로를 고민하던 시절 지인이 그렇게 나를 교육에 초대했다. 비슷한 장르의 회사였다. 이미 주변에서 가족들을 다 끌어들여서 잘못된 투자를 하고 망한 꼴을 봤기에 발을 들이고 싶지 않았다. 그런데 누군가는 그 일로 정말 잘 벌고, 잘 산다. 사람마다 적성도 성향도 다르기 때문이다. 다행히 온라인 건물주가 된 지인은 승승장구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 지인은 또 시대 흐름을 잘 타고 사업을 계속해 왔기에 위기가 오면 또 트렌드에 맞게 갈아탈 것이라 본다.
분명한 건 오프라인이든 온라인이든 건물주가 되는 일이 쉽지 않아 보인다. 내 인생에 과연 건물주가 되는 날이 올진 모르겠다. 지금은 오히려 건물이 아니라 서울에 아파트라도 한 채 분양받을 수 있을까 의구심이 든다. 최근에 잠실 쪽에 재개발하는 아파트 분양가를 보니 기절초풍이다.
30평대 국민 평수 분양가가 20억을 넘겼다. 내가 만일 10억이 있어도 10억을 구해야 한다. 아쉽게도 규제가 심해 대출은 어렵다. 결국 돈 있는 사람만 또 이런 집을 얻고, 집값이 올라 이득을 보게 될 것이다. 앞으로 빈부격차는 더 벌어질 것이다. 있는 사람은 더 가질 것이고, 없는 사람은 더 허덕일 것이다. 그렇다고 건물주의 꿈을 포기하고 살아갈 것인가? 그것도 미지수다.
회사 건물이 내 건물은 아니었지만, 아주 가까이에서 영향을 받으며 직간접적으로 피해를 받았다. 심신이 많이 지쳤다. 쾌적한 근무 환경을 기대했는데 그러지 못했으니까. 끝을 알지 못하는 기다림은 사람을 미치게 한다. 안타깝게도 우리 인생은 한 치 앞도 알 수 없다. 오늘 웃을지라도 내일은 울 수도 있으니까.
퇴사 후 2년 차는 혹독했다. 건물 주인도 아닌데도 건물 때문에 힘들었다. 누구든 새로운 일을 시작하면, 자리를 잡기까지 최소 3년은 걸린다고 하니까 앞으로 1년 더 힘들 걸 각오해야겠다. 그러니 차라리 마음 편하다. 원래 3년은 힘들다고 하니 말이다. 퇴사 3년 후의 나는 지금보다는 나아지지 않을까? 그렇게 믿고 싶다. 어떤 이야기든 발단, 전개, 위기, 절정, 결말로 끝나니까. 내 이야기의 끝은 좋은 쪽이든 안 좋은 쪽이든 결과가 나올 테니까. 무한 기다림보다는 차라리 그게 낫다.
(엔딩곡)
“한 번 더 나에게 질풍 같은 용기를. 거친 파도에도 굴하지 않게. 드넓은 대지에 다시 새길 희망을. 안고 달려갈 거야 너에게.”
*질풍가도
- 2006년 4월에 발매된 투니버스 쾌걸 근육맨 2세 앨범 1번 트랙에 위치한 타이틀 곡으로 유정석이 부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