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절의 시대, 연결을 묻다.
이 칼럼 시리즈는 정신과 전문의 이시형 박사가 자신의 유년 시절과 가족사를 바탕으로, 현대 한국 사회가 안고 있는 고독, 외로움, 관계의 단절, 독립의 역설을 성찰합니다. 과거의 체험을 통해 오늘의 문제를 되돌아보고, 진정한 연결과 연대의 의미를 모색하며 고독한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따뜻한 위로와 질문을 던집니다.
나에게 고독이란, 사실상 어울리지 않는 단어 중 하나였다. 그런데 이 책을 쓰면서 고독이라는 주제를 다루게 되니, 자연스레 내 생애의 고독은 언제였으며, 나는 어떻게 이 문제를 풀어왔을까 되돌아보게 되었다. 한마디로 말해, 나는 고독한 사람이 아니었다. 그럴 수가 없었다. 혼자 있을 시간이 없었기 때문이다. 집안엔 형제들이 많았고, 문만 열고 나서면 온 동네에 친구들이 넘쳐났다. 나는 정말 해가 저물 때까지 친구들과 어울리며 놀았으니, 고독할 틈이 없었다. 어쩌다 혼자 있는 시간이 주어지면, 오히려 그것은 내게 행복한 시간이었다. 인간관계의 압박, 굴레, 억압에서 벗어나 홀가분한 기분으로 혼자만의 시간을 만끽하곤 했다. 하지만 이런 사치스러운 시간조차도 자주 허락되지 않았다.
인턴 과정을 거쳐 정신과 공부를 할 때도 마찬가지였다. 늘 시간이 부족했다. 도서관, 심지어 화장실에 앉아서도 내일 쓸 칼럼을 준비하거나 무슨 이야기를 쓸지 고민해야 했다. 현장에 나가 환자를 돌볼 때도 진료 외에 해야 할 일이 많았다. 그렇게 혼자 있을 시간은 나에게 늘 사치였다. 그러던 내가 처음으로 고독을 느낀 건 미국에 갔을 때였다. 물론 미국 인턴 생활도 정신없이 바빴다. 짧은 영어로 인턴 과정을 버텨야 하니 눈치, 코치보랴 정말 힘들었다. 그런데도 하루 일과가 빨리 끝나고 인턴 숙소의 텅 빈 방에 들어서면, 그때서야 나에게 외롭다는 기분이 찾아왔다. 물론 그것도 잠시였다. 나에게 외롭다는 감정은 늘 사치스러운 것이었다.
미국에서 영어로 대화한다는 것 자체가 상당한 부담이다. 내가 영어를 제법 한다고 생각했는데도 실제로는 형편없는 수준이었다. 한국에 있었다면 혼자일 때 친구를 만나러 가면 됐겠지만, 미국에서는 영어의 벽이 내 앞길을 가로막았다. 그 부담 때문에 친구를 만나러 갈 수도 없었고, 사실 친구도 없었다. 그래서 처음으로 외롭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어려서부터 여럿과 함께 사이좋게 지내야 한다는 교육을 받아왔다. 혼자 있는 것은 문제라는 생각이 몸에 밴 듯했다. 협조성이 없거나 ‘또라이’라는 소리를 듣는 게 두려웠다. 그래서 혼자일 때면 왠지 죄책감이 들고 창피하다는 기분이 들기도 했다. 혼자인 것이 잘못되었다는 생각이 제일 먼저 찾아왔다.
그러나 정신과 의사로서 환자들을 만나면서, 나는 혼자일 수 있다는 것이야말로 인간의 성숙을 의미하는 것. 그래도 깨달음을 얻었다. 나는 이것을 ‘고독력’이라 불렀다. 고독할 수 있는 힘. 이것은 인간의 성숙도를 나타내는 힘이다. 고독을 견디려면 공부도 필요하고, 비슷한 체험도 필요하며, 그것을 소화할 수 있는 지혜와 인내가 필요하다. 그런 힘이 있을 때, 아무것도 하지 않고 멍하니 있는 시간이 오히려 내 삶에 놀라운 상승 효과를 주는 것을 경험했다. 하지만 실제로 고독에 대한 연구를 찾아보면, 대부분의 논문들은 고독감을 소극적이고 부정적으로 본다. 고독을 아름답게 표현하거나 의미 있게 다루는 사람들은 시인이나 소설가가 대부분이다. 정신과 의사로서 학문적으로 고독은 외롭고 힘든 문제로 주로 다루어졌다.
나 역시 힐리언스 선마을에서 일할 때 터무니없는 공격을 받으며 속상했던 적이 더러 있었다. 그럴 때면 숲길을 혼자 걸었다. 그러다 소나무 사이로 스며드는 햇살, 밤하늘 달을 보며, 대자연의 웅장함과 대화하면서 내 마음을 다잡았다. 그때마다 나는 참 작은 존재라는 걸 느꼈다. 이 거대한 우주 속에서 이렇게나 작은 일로 고민하며 외로워하는 내 모습이 작게 느껴졌다. 오히려 그 시간은 내게 귀중한 시간이 되던 것을. 나는 이것을 ‘솔리튜드(solitude)’라고 불렀다. 혼자 있을 수 있는 힘. 론리니스(loneliness), 즉 고독감과는 다른 차원의 것이었다. 론리니스가 소극적이고 부정적이라면, 솔리튜드는 능동적이고 긍정적인 것이다.
우리는 고독에 울거나 지레 겁먹을 것이 아니라, 고독을 소화해 ‘고독력’으로 승화시키는 순간을 만들어야 한다. 그때야말로 인간이 성숙해지는 시간이 될 수 있다고 믿는다. 그래서 나는 혼자 있는 시간, ‘솔리튜드 타임’을, 일부러 만들어서라도 누리려고 한다. 물론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이 솔리튜드 타임이야말로 우리 인생에서 가장 소중한 성장의 시간일 수 있다.